여행의 계절, 다시 걷는 스페인-프라도미술관 Museo del Prado
마드릿 도심에 위치한 프라도미술관은 1819년 개관한 세계를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이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프라도에는 주로 12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스페인, 이탈리아, 플랑드르, 프랑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페인을 대표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엘 그레코(El Greco)와 주세페 데 리베라 (Jusepe de Ribera )를 비롯한 스페인의 거장들은 물론,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 등 유럽 미술사의 거목들의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유럽 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장소이다. 회화와 판화, 조각 등 약 8천 점의 역사적인 화가들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유럽 고전 미술 작품의 보물창고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과 고야의 1808년 5월 3일(El Tres de Mayo) 같은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가 고전주의 스타일로 설계한 건물로 당초 건축 목적은 자연사 박물관으로 계획되었으나, 개관 이후 미술관으로 전환된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페인의 자존심 같은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개관 이래 오늘날까지 예술을 통해 스페인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며,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작품들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과거 유럽 고전 미술의 깊이를 전하고 있는 미술관이다.
[필자 주]
*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플랑드르(현재의 벨기에 지역) 출신의 바로크 시대 화가로,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성으로 유명하다. 루벤스는 종교적 주제와 신화적 장면, 역사적 사건을 웅장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능력으로 유럽 미술계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화풍은 ‘루벤스풍’이라 불리며 바로크 미술의 상징이 되었다.
루벤스의 작품은 부드러운 빛의 사용과 인물의 강렬한 표정,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인 장면 연출이 특징이다. 십자가에 올려진 예수(The Elevation of the Cross)와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같은 작품에서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정치와 종교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유럽 여러 왕실의 초상화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그려 유럽 각지에서 널리 사랑받았던 화가이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루벤스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가 지닌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적 미감을 감상할 수 있다.
**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는 네덜란드 출신의 르네상스 화가로,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장면을 그려낸 독창적인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다. 보스의 작품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종교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불가사의하고 기괴한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인간의 죄악, 도덕, 천국과 지옥을 묘사했다. 그의 대표작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은 여러 패널로 이루어진 삼면화로, 천국, 인간의 타락, 그리고 지옥의 세계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쾌락의 정원을 포함해 보스의 주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어, 그의 독특한 화풍과 철학을 감상할 수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보스의 작품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어서, 그의 상상력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인터넷 사전을 뒤져보니 ‘플라도 Prado’는 ‘초원’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유럽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떠오른다. 예전에 귀족들이 ‘초원’의 저택으로 손님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소장품을 보여주며 과시하며 전속 음악가들을 불러들여 파티를 열고 놀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이름인듯하다.
아늑하게 조성된 녹지공간에 위치한 프라도 미술관은 과거 스페인 왕실 전용 화랑으로 지어져 국립 미술관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역대 스페인의 왕과 왕비 등 왕실에서 수집한 방대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왕실의 미술품 수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중세 유럽의 왕족과 귀족의 호사스러운 취미 덕에 15~16세기의 미술사를 한곳에서 보는 호사를 누리니 그저 좋은 일이다.
미술관 건물 정면에 벨라스케스 동상과 북쪽 계단에는 고야의 동상이 서있다. 오른쪽 언덕으로 눈을 돌려보면 아담하지만 예쁜 성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검색대를 통과해야 들어가는 미술관은 내부로 들어서면 사진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사실 미술관에서는 그림만 열심히 보면 된다. 사진은 얼마든지 인터넷에 잘 올려져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사진을 많이 찍게 되는데 사진을 찍느라 놓치는 것도 많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찍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기록적인 의미와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사진만큼 잘 담아내는 것도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라 하겠다.
여기에 소장된 작품들을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2주일 정도 봐야 할 것 같다. 한정된 시간으로 많은 작품을 다 볼 수 없었기에 꼭 봐야 한다는 대표적인 작품들을 설명과 함께 감상한다. 그중 필자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몇 점의 작품만 소개한다.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카를로스 4세의 가족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 (스페인어: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fɾanˈθisko xoˈse ðe ˈɣoʝa i luˈθjentes], 이름도 길고 발음도 어렵다. 아무튼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 미술시간에 배운 그 고야다. 16살 때 미술책에서, 커봐야 엽서 크기 정도의 고야 그림을 50 중반이 넘어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와서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a_familia_de_Carlos_IV,_por_Francisco_de_Goya.jpg Francisco_de_Goya_y_Lucientes #카를로스 4세의가족 1800년
고야는 벨라스케스(Velazquez) 이후 세기 만에 나타난 스페인 최고의 천재적 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1786년 카를로스 3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궁정화가로 데뷔한다. 궁정화가로서 고야는 왕과 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시기에 그는 왕실 내부의 미묘한 갈등과 긴장감을 잘 포착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야의 그림 중 ‘카를로스 4세의 가족(La familia de Carlos IV)’이 필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일깨운다.
이 그림은 참으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지만, 왠지 그들 사이의 유대감이 느껴지지 않고 어색하며 불편한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카를로스 4세의 가족으로,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자녀들로 알려져 있다. 화폭에 등장하는 카를로스 4세의 아들이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 왕비가 정부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이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근거가 없다. 다만, 왕비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실제 아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아마도 그녀만이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미술 작품의 해석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이 그림에서도 고야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구도와 표정을 통해 가족 간의 미묘한 긴장감과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드러냈다는 해석이 많다.
왕비가 화폭 중앙에 있고 왕은 오른쪽으로 비껴 서 있다. 이는 당시 고야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야는 이 구도를 통해 왕족의 권위보다는 그들의 인간적 모습과 내면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해석이 많다. 다른 해석으로는, 당시 스페인 왕실 내에서 상당한 실권을 행사했던 왕비를 중앙에 배치하여 왕실의 권력 구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왕족으로서 화려한 옷차림이지만 뭔가 빠져 있는 듯한 공허함이 화폭을 가득 담는다. 왕의 눈이다. 까를로스 4세의 눈이 초점을 잃고 허공을 가르고 있다. 참으로 절묘하다. 왕비의 딸 옆에선 여인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고개를 돌리고 마지못해 서있는 모습이다. 옆의 남자는 미래의 왕인 페르디난도 7세다. 고개를 돌린 여자는 페르난도 7세가 장차 배우자로 맞아들일 여자다. 뭔가 석연치 않다. 암울한 스페인 왕실의 다가올 미래를 예감이라도 한 느낌이 들었다. 왕은 하얀 스타킹을 신고 있지만 밝은 색상이 아니고 어둡고 칙칙하다. 이 또한, 왕가에 닥쳐올 위기와 몰락을 암시한 것일까? 그저 한 장의 그림일 뿐인데 어찌 저런 공허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튼 까를로스 4세는 1788년 즉위하면서 며칠씩 궁을 비우고 사냥이나 슬슬 하면서 소총 만들기가 취미였다. 정치나 사교는 그와는 맞지 않은 모양이다. 공무는 왕비가 신임하는 마누엘 데 고도이(Manuel de Godoy, 1767-1851)에게 모두 맡겼다. 사실은 공무만 맡긴 것이 아니라 왕비와 자신의 삶까지 맡겼는지 모른다.
마누엘 데 고도이(Manuel de Godoy, 1767-1851)는 스페인의 정치가로, 카를로스 4세 통치 시기 실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고도이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외모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후원 덕분에 궁정에서 급속히 승진하여 결국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는 왕비의 총애를 받으며 당시 스페인 내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둘렀고, 종종 왕실 내부 권력 구도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도이의 정책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프랑스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하면서도 영국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가 추진한 외교 정책은 스페인에 큰 손실을 초래하였고, 1808년에는 결국 나폴레옹의 압력으로 해임된다. 그리고 그의 사치와 부패는 스페인 왕실의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잦은 전쟁과 세금 증가, 농업 생산의 침체는 대중의 경제적 불만을 키웠고, 귀족 계층과 군대마저 고도이의 정책에 반발하기에 이른다.
고도이는 고야의 그림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있다. 고도이와 왕비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고야가 왕과 왕비, 그리고 가족을 표현하는 방식에 미묘한 풍자를 담았다는 일부 미술사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이쯤 되면, 마리아 루이사에 대하여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마리아 루이사(María Luisa de Parma, 1751-1819)는 스페인 카를로스 4세의 왕비로, 스페인 왕실 역사에서 매우 논쟁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르마 공국 출신으로, 14세에 사촌이었던 카를로스 4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비가 되었으며, 10명의 자녀를 낳았다. 자녀들의 출생과 가계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오가지만,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녀는 외모가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으나 활달하고 강렬한 성격으로 왕실 내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리아 루이사는 당시 왕실의 실세였던 마누엘 데 고도이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녀는 궁정 내 다양한 남성과 가까운 관계였다는 소문에 휘말렸고, 종종 활발한 성격과 다채로운 인간관계로 스페인 민중에게도 불안과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결국 스페인 왕실의 혼란과 몰락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정치적 또는 사적인 이유로 여러 남성들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야기는 궁정 안팎에 전해져 내려오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고야의 그림 속 그녀는 일반적인 미인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일 수 있으나, 이 또한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당시 스페인 왕실의 혼란과 맞물려 펼쳐진 그녀의 삶 속 다양한 이야기는 그 시대의 복잡하고도 불안정한 면모를 엿보게 한다. 역사적 사실이든, 소문에 불과하든, 아니면 단순한 가십 거리였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늠하기보다, 여행길에서는 그저 이런 이야기들이 주는 묘한 매력과 흥미를 가벼운 미소로 즐기며 넘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무튼 이 그림 속에서 고야는 당시 스페인 왕실의 어두운 그림자를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스페인 왕실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심각한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에 빠졌다. 특히 1807년 티르지트 조약과 1808년 퐁텐블로 조약으로 프랑스의 압박이 더욱 강해지면서 스페인은 불평등 조약을 강요받는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혼란을 이용해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로 인해 왕실은 급격히 분열되고 흔들리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 왕실에서는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으며, 급기야 카를로스 4세의 총신-더 정확하게 말하면 왕비의 총신이었지만-이자 실권자인 마누엘 데 고도이의 정책에 반발한 페르난도 왕자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고도이는 나폴레옹과 협상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 모두를 압박하여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후 스페인은 1808년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즉위시키며 사실상 프랑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는 스페인 민중의 강한 저항과 반 프랑스 게릴라 운동을 촉발했으며, 결국 스페인 독립 전쟁(1808-1814년)으로 이어진다.
그림 속에서 고야의 생각을 읽어본다.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속 그의 모습은 그림의 가장자리, 어둠 속에 묻혀 있다. 궁정화가로서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며 궁정에 속했지만, 고야는 자신을 왕족과 분리해 이 세계를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입장을 택한 듯 보인다. 그는 단순히 궁정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권위를 그리는 대신, 그림 속 가족들의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어색한 구도를 통해 왕실의 불안정한 내부 상황을 꼬집고 있는 관찰자의 모습으로 화폭에 등장한다.
왕의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중심에서 벗어난 왕의 위치, 표정에서 드러나는 공허함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당시 스페인 왕실의 위기와 혼란을 고야가 담아내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어둠 속에 그려 넣은 이유는, 이 작품이 왕실의 요구로 그려졌지만 고야 스스로는 이들과 다르며, 권력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는 고야가 지닌 예술가로서의 독립적 의식과 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
고야의 마하 연작은 같은 여인을 같은 포즈로 두 가지 버전-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으로 그린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논란을 일으킬 만한 주제였다. ‘마하’라는 단어는 당시 스페인에서 패셔너블하고 개성 있는 여성, 즉 ‘멋쟁이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고야는 이 연작에서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양면성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oya_Maja_naga2.jpg 프란시스코 데 고야 - The Nude Maja. On-line gallery. 프라도 미술관
특히 옷 벗은 마하는 고야가 여성의 누드를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당시 스페인 사회와 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고야는 종교재판에 소환되었고, 이 그림은 외설적이며 신성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압수당했다. 그러나 고야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성의 모습을 더욱 대담하고 예술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1803년에 옷 입은 마하를 다시 그렸습니다. 이 두 작품은 같은 여인을 똑같은 포즈로 표현하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인간 존재의 다면성을 암시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원래 벌거벗은 모습으로 존재했다는 점을 상기하며, 고야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과 당시 사회적 억압 사이의 갈등을 탐구하고자 했을 수 있는 견해가 미술사가들의 시점이다.
그런데,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린 당시에는, 왜 여성의 벗은 몸이 부정적으로 느껴졌을까? 종교재판까지 갔다면 재판의 근거나 기준이 있을 터인데, 외설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을 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종교적인 해석의 근간에는 무언인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인간의 원죄의식을 여성과 관련지으면서 누드 표현이 사라지고 인간의 몸을 드러내는 일을 부정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중세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누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형성된 배경에는 기독교적 원죄 의식과 성에 대한 엄격한 도덕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세 교회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 이야기에서 비롯된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나체를 죄와 연결 지었고, 특히 여성의 몸은 유혹과 타락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중세 미술에서 누드 표현은 점차 사라지거나 제한되었으며, 신체를 드러내는 것은 부정적이고 금기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종교적 맥락에서 제한적으로 신체가 묘사되기도 했지만, 이는 보통 엄격한 상징성을 띠거나, 고결함을 드러내기 위해 채색하거나 각종 장신구로 가려 표현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이 재조명되면서 인간 신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리긴 했지만, 중세 전반적으로는 성과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중세 가톨릭의 권위는 왕권 위에 있었다.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이었던 가톨릭의 잘못된 해석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1836년 압수된 그림을 다시 돌려주었다 하니 가톨릭 종교재판의 오판을 인정한 셈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다음으로 관심 가는 것은 그림의 모델인 마하, 말뜻 그대로 ‘멋쟁이 여성’은 누구일까? 누구인지 모른단다. 마하의 모델이 누구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마하라는 말뜻 그대로 ‘멋쟁이 여성’은 고야가 그의 그림 속에서 스페인의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여성상을 담아내고자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의 실체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모델의 정체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어쩌면 고야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이 그림은 왕비의 애인이었던 수상 마누엘 데 고도이가 정부 페피타 츠도우(Pepita Tudó)의 나체를 감상하기 위하여 의뢰했다는 설과 고야가 알바 공작부인을 사모하여 그렸다는 설이 있지만, 두 견해 모두 확인된 사실은 없다. 다만, 알바 공작부인(María Cayetana de Silva)이 모델이었다는 설은 고야가 그녀를 짝사랑했다는 이야기와 맞물려 상당히 신빙성 있고 흥미로운 설로, 이 설은 고야가 작품에 남긴 열정적이고 섬세한 표현이 알바 공작부인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담았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지지만, 고야는 이를 부인한 바 있다.
혹, 까를로스 4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는 아니었을까? 객관적으로 보면, 이는 당시 왕실의 권위와 사생활을 감안할 때 현실성이 낮다는 의견이 많다. 아무튼 누가 모델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까지 모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은 고야의 이 그림을 더욱 신비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요즘 용어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아닐까?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모델의 정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고,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는 고야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오늘날까지 이 작품을 둘러싼 관심을 끊임없이 유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아무튼, 고야의 마하 연작은 많은 설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그만큼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고야는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단순히 여성의 나체를 표현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의 사회적 위험과 종교적 금기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렸다는 점에서, 그는 단순히 인체미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페인 상류층과 그 사회의 모순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앞으로 남은 11일의 스페인 여행에서도 찾아질 것 같지는 않지만, 궁금증을 갖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기에 필자는 이 그림을 보면 이런저런 궁금증에 물음표를 가져다 붙이고 있는 셈이다.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의 처형’
고야의 또 다른 그림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은 스페인 민중봉기와 하루 뒤인 다음날, 민중을 총살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은 그림이다. 초상화를 잘 그려 궁중화가가 된 고야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는 그림으로 민중의 절망과 공포를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간 반도 전쟁을 치른다. 프랑스 대혁명의 혁명적 이상을 지지했던 고야였지만,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외면하지 않고 전쟁의 잔혹상을 사실적으로 그대로 묘사하였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l_dos_de_mayo_de_1808_en_Madrid.jpgEl_dos_de_mayo_de_1808_en_Madrid_프라도 미술관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l_Tres_de_Mayo,_by_Francisco_de_Goya,_from_Prado_thin_black_margin.jpg El_Tres_de_Mayo,_by_Francisco_de_Goya 프라도 미술관
그림의 내용은 참으로 끔찍하였다. 고야는 이후 1810년에서 1820년까지 제작한 ‘전쟁의 재난(Los Desastres de la Guerra)’은 전쟁 중에 일어난 학살과 비인도적 만행을 기록한 고야의 판화집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적 참상과 비극을 더욱 깊이 기록하였다. 이 판화집은 전쟁 중 일어난 학살과 잔혹한 장면들을 충격적으로 묘사하여,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고 인간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고야의 고민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고야의 이 작품은 우리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어딘가 모르게 좀 익숙한 그림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적 상처, 특히 6.25 전쟁이나 최근의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1980년 우리 세대는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래서인지 고야의 이 시선은 너무나도 친숙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쟁의 재난과 수많은 희생, 억압에 맞서는 민중의 저항, 폭력이 인간성에 남기는 상흔을 되새기며 경각심을 갖게 되는 기록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이런 연관성은 예술이 특정 시대와 국가를 넘어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야가 그의 작품을 통해 전하는 경고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것이며, 이 메시지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주고 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rancisco_de_Goya,_Saturno_devorando_a_su_hijo_(1819-1823).jpg Francisco_de_Goya,_Saturno_devorando_a_su_hijo_(1819-1823)
고야는 1812년 아내 호세파의 사망 이후, 그의 삶은 심각한 암울함에 빠지게 된다. 40대 중반에 청각을 잃고 마드릿 근처의 집에 머물면서 고독과 절망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고야가 청각을 잃는 것은 단순히 청각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정신적 상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베토벤과 비슷한 상황으로, 베토벤이 청각을 잃고도 교향곡 9번 ‘합창’을 작곡한 것처럼 고야도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려 했다. 그의 절망은 더욱 깊고 치명적이었다. 아무튼 고야의 말년은 그야말로 끝없는 절망 그 자체였으리라 여겨진다. 고야는 프랑스 보르도에서 1828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반도전쟁 이후 외딴집에서 살기로 작정한 고야의 말년 작품은 그의 내면의 어둠과 절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검은 그림' 연작에서 고야는 이성이라는 명분 뒤에 감추어진 전쟁의 광기와 인간의 비극을 강렬한 색채와 감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전쟁이 고야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사회에 미친 충격을 반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자식을 삼키는 사트루누스'는 그의 절망적 감정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으로, 암울함과 공포가 함께 느껴지는 충격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고야는 평생 동안 1,870여 점의 그림을 남기는 성실한 화가였다. 렘브란트와 함께 자화상도 많이 그린 화가로 20여 점의 자화상이 있다. 이러한 자화상들은 그가 겪은 고통과 고뇌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어, 관람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이다. 고야의 전시실 한 곳에는 암울한 말년의 그림들로만 전시되어 있다. 고야의 불행한 삶과 예술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전쟁의 광기와 죽음의 그림자가 고야의 시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감상할 수 있는 중요한 전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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