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계절, 다시 걷는 스페인-프라도미술관 Museo del Prado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광녀 후아나(Doña Juana la Loca)
프란시스코 프라디야(Francisco Pradilla Ortiz)의 ‘광녀 후아나’는 참으로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관 앞에 수녀복을 입은 여자가 서있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고 여자 뒤로 사람들이 서거나 앉아 있는 황량한 들판이 보인다. 그림 속의 수녀복의 여자는 스페인의 여왕 후아나였다. ‘미남 펠리페’로 불렸던 남편 펠리페 1세가 죽어 남편의 관을 운구하는 모습이 화폭에 담겨있는 그림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가련한 여인으로 보이는 그림이다. 단순히 그림으로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림의 제목은 ‘광녀’가 붙어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있구나!’ 하는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해설의 내용은 어느 정도 충족은 되지만 뭔가 부족하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 이 한 장의 그림 속에는 실로 엄청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utorretrato_de_Francisco_Pradilla.jpg
광녀 후아나 Doña_Juana__la_Loca__(Pradilla)_Museo del Prado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o%C3%B1a_Juana_%22la_Loca%22_(Pradilla).jpg
매장을 오랫동안 거부했던 후아나, 그녀는 남편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 여러 수도원을 순회하면서 남편 펠리페의 부활을 기원했다. 그런 와중에 수녀들의 접근조차도 질투하여 관을 잠시도 떠나지 못했다 한다. 정말 그랬을까? 왜 그랬지? 그 정도로 사랑했나? 그럴 수도 있겠지! 정말 펠리페 1세가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천하의 미남이었나? 펠리페 1세의 초상화는 아무리 봐도 그 정도의 미남으로 보이지 않았다. 미남과 미녀의 기준은 시대와 국가 그리고 사회적인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맞긴 맞나 보다. 아무튼 그림 속의 후아나는 처연한 모습으로 관을 지키고 있다. 어떤 사연이 저토록 남편에게 집착하는 광적인 상황을 만들었을까?
그라나다의 항복_La_Rendición_de_Granada_-_Pradilla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a_Rendici%C3%B3n_de_Granada_-_Pradilla.jpg
사실 그녀의 결혼은 자식보다는 국력이 우선이었던 이사벨 여왕에 의한 지독한 정략결혼이었다.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은 즉위하기 전 본인 스스로 남편을 선택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여자 측에서 먼저 청혼을 하는 영리한 여인이었다. 아라곤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맺음으로 후일 1492년에 그라나다를 점령하고 앗수르 왕조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이로써 이사벨 여왕은 이베리아반도에서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 재정복(reconquest))를 마무리한다. 이사벨 여왕의 통치는 강력했고 단호했다. 정치적, 종교적 통합만이 진정한 통합이라는 신념하에 이교도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에 대한 무관용의 원칙을 지속적으로 적용시켜 이베리아반도에서 이교도의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이전에는 허용되었던 유대인 추방령을 공포하며, ‘종교재판소’를 통한 가톨릭 순혈주의를 강조하며 국가 통합의 바탕으로 삼는다.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며, 적어도 표면적으론 통합(오늘날에도 스페인은 북부 바스크와 동부 카탈루냐 지역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심각한 상황이다.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마드릿역 폭탄 테러 사건 같은 유혈사태를 반복하면서 눌러 놓은 상황이랄까...)을 이루었던 카스티야는 왕국,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오늘날의 스페인의 기틀이 된, 가톨릭을 상징하는 국가로 우뚝 선 카스티야 왕국, 그 이면에는 ‘광녀 후아나’의 정략결혼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있다.
당시 통일을 이룬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장남인 후안(Juan)과 차녀 후아나는 신성로마제국의 마르가리트 공주(Margarita de Austria, 스페인-합스부르크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로 펠리페 Ⅳ세의 딸), 펠리페Ⅰ세 왕자와 각각 정략결혼을 추진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와 겹사돈을 맺게 된다. 정략결혼은 당시 유럽 왕가들이 세력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미래를 담보하는 정치적 외교 전략이었다. 동시에 유럽 여러 나라들과의 결혼 동맹은 주변국들이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하게 만들기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력의 균형과 견제에는 결혼만 한 수단이 없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왕가에서는 개인의 이익, 또는 왕가에선 조금은 낭만적이긴 하지만 사랑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따라야만 했다. 평소 이사벨 여왕은 딸들에게 “우리는 여왕이 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치는 허락될 수 없다”라고 냉정하고 단호한 주문으로 ‘군주는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 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Juana_la_Loca_recluida_en_Tordesillas_딸 인판타 카탈리나와 함께 토르데시야스에 수감된 미친 후아나 Museo del Prado 1906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uana_la_Loca_recluida_en_Tordesillas.jpg
아무튼 16세의 소녀 후아나 공주는 이사벨 여왕의 뜻을 따라, 1천500여 명의 수행원과 120척의 선박을 거느리고 대항해시대를 여는 해양강국으로 부상한 왕국의 위세를 과시하며 플랑드르(벨기에) 지역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정략결혼을 위해 떠난다. 후아나는 결혼식 전날 펠리페 Ⅰ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후아나 공주는 낯선 그곳에서 오로지 남편인 펠리페만을 바라보며 믿고 의지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펠리페 Ⅰ세는 그렇지 않았지만...,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며 화려한 여성편력으로 상처를 주는 남편은 결혼 후에도 여러 여자들과 불륜을 맺는다. 남편 펠리페 Ⅰ세의 배신은 후아나로서 감당하고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낯선 이국에서 남편만을 바라보는 성격의 후아나 공주는 이때부터 남편에 대한 집착 증세를 보이게 되고 급기야 미쳐 버리고 만다. 카스티야 왕국의 상속녀 후아나 공주 대신 ‘광녀 후아나(Juana la Loca)’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남편에 대한 지독한 애증과 집착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괴롭혔고 남편 펠리페 Ⅰ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상적이지 못했던 ‘광녀 후아나’가 감당하기 어렵고 버거운 상황이었다. 광증과 편집 증세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칭호를 소유하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미치광이였지만 그녀의 존재는 왕국의 통합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이사벨 여왕의 순수 혈통이었다. 진정 그녀가 받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왕가의 공주로 태어나 비운의 삶을 살다 간 후아나 공주(1479~1555), 가족으로부터 위로와 도움이 필요했지만 페르난도 아라곤 왕국의 국왕이었던 아버지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스페인 제국)을 후아나 대신 실질적인 통치권을 가졌던 아들 카를로스 Ⅰ세는 그녀를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성의 산타클라라 수녀원에 34년간 감금한다. 어쩌면 국익이 우선인 공주로 태어난 후아나의 운명이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화려한 여성편력으로 외도를 일삼던 바람둥이 남편 펠리페 1세는 부르고스(Burgos, 지금의 카스티야 레온지방 부르고스 주)에서 죽었다. 후아나 여왕은 남편의 시신을 직접 운구하여 그라나다에 안장할 예정이었다. 남편이 죽었음에도 후아나 여왕은 여자들을 경계하고 남편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수녀원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으며, 운구하는 동안 그의 시신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의 운구는 8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고 대항해시대를 여는 오늘날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이루는 이사벨 여왕의 딸로 태어난다. 공주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타고 태어난 후아나의 일생은 비운이었다. 현명하고 지혜로웠고 강하고 당찬 여성이었던, 카스티야 왕조를 물려받아 강성대국으로, 그리고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는 어머니 이사벨 여왕과는 대조적인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비운의 여왕 후아나는 훗날 많은 문학작품과 그림, 영화, 오페라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후아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그림이 ‘광녀 후아나’가 아닐까 싶다.
나에게 프라도미술관의 ‘광녀 후아나’는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로 태어난 후아나의 비운의 삶을 단적으로 묘사한 그림이었다. 황량한 겨울, 검은 옷을 입은 후아나가 관 옆에 서 있는 모습은 쓸쓸하면서 음산한 느낌으로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그림에 얽힌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 보니 후아나의 가련한 삶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지는 그림이다.
스페인 여행 첫날,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하며 유난히 호기심을 자극했던 그림 한 점이 전혀 몰랐던 역사적인 인물과 관심 없었던 세상의 이야기와 만나는 동기가 되었다. 여행 전에 스페인에 관한 관심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음악적으로 매력적인 민족이고 과거 작곡을 전공한 필자에겐 공부할 때 알게 된 음악사적 얇은 지식과 관심 정도가 전부였다. 세고비아나 플라멩코(flamenco), 플라시도 도밍고(Plácido Domingo),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 안익태(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árrega) 등 스페인 음악가들과 투우의 나라 정도가 스페인에 대한 나의 단상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여행 일정 중 첫째 날에 만난 프라도 미술관의 그림 한 점으로 스페인의 과거와 영광된 역사 뒤의 아픔도 만났다.
왠지 이번 스페인 여행은 예감이 좋다. 대장암 수술받은 후 정확히 두 달째가 되는 1월 10일 출발 일정이어서 많이 망설이다 결정했던 여행이었다. 회복이 아무리 빨라도 대장의 일부를 절제(切除)하여 길이가 짧아진 대장 탓에 자주 화장실을 가야 하는 필자에겐 이번 스페인여행은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일정이었다. 정장제도 처방받아 챙기고 이런저런 상비약들도 준비하였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무장도 필요했다. 그런데, 첫날 이곳 프라도 미술관에서 강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림을 본 것이다. 여행 내내 에너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은 가벼웠고 컨디션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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