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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마리아 발현 성지 파티마 Fátima

by 조영환

여행의 계절, 다시 걷는 포르투갈-성모마리아 발현 성지 파티마 Fátima



살라망카에서 포르투갈로 이동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평소에 먹지 않았던 여러 가지 특색음식을 먹어보는 일이다. 같은 음식이라도 어디에서 먹는가에 따라 사뭇 다르다. 음식 역시 문화이기 때문이리라. 스페인에서 중국음식을 뷔페로 내는 식당 ‘북경성’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한다. 콩을 넣은 볶음밥 양배추를 무쳐내고 소고기 볶음요리에 김밥까지 추가된 것으로 보아 한국관광객의 기호를 곁들인 배려이지 싶다. 가게 입구 입간판에 1인당 8.50~9.90유로가 적혀 있었다.


스페인의 수질은 석회질이 많아 음용하기 적합하지 않다. 식당에서 제공되는 물도 공짜가 아니다. 음식 가격에 음료 불포함인 경우가 많다. 물값을 별도로 지불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더러더러 가져간 음식과 주류를 식당에서 먹기도 하고 식당의 물을 생수병에 가득 채워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는 아예 물을 달라는 사람들도 왕왕 볼 수 있다. 스페인에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다. 물 인심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후한 나라일 것이다.


한국인의 특별한(?), 우리 입장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들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 분명한 일이지 싶은 그 특별한 입맛을 감안하여 관광객을 받는 호텔에서는 튜브형 고추장이나 컵라면 정도는 허용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김치는 허용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얼마나 좋은 음식인가, 소금에 통째로 절인 하몽? 비교도 안 되는 음식인데... 어찌하랴 이네들은 그걸 아직 모르고 있으니...


소주를 즐겨 마시는 애주가들의 경우 물병이나 팩에 담긴 소주를 식당에서 식사하며 반주로 곁들이다 스페인 사복경찰에 적발되어 400유로의 벌금을 무는 사례가 왕왕 있다 한다. 실제로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 전에 벌금을 문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아주 비싼 소주를 드시는 셈이니 삼가셔야 할 일이다. 세금이 포함되지 않은 소주를 음식점에서 먹는 것 자체가 불법이란 얘기다. 스페인의 벌금은 무겁다. 불법의 경우는 주정차 위반도 보통 4백~5백 유로의 벌금을 물린다 한다. 식당에 한글로 주의사항을 적어 놓을 정도이다.


아무튼 스페인에서의 중국식 뷔페로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1917년 성모마리아 발현지인 파티마로 향한다. 예상 이동시간은 5시간 10분 정도이다. 오후 내내 버스로 이동하여 해가 질 무렵 도착할 예정이다. 그야말로 다부지게 버스를 타야 볼 수 있는 파티마이다. 스페인 관광 규정에 따라면 아마도 휴게소에 두 차례는 들러 45분은 쉬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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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스페인 살라망카

B) 6355 Vilar Formoso, 포르투갈

C) 포르투갈 코임브라

D) Cova de Iria, 2496-908 Fátima, 포르투갈

E) 포르투갈 리스본



포르투에서 일하고, 코임브라에선 공부하고, 브라가에서 기도하고, 리스보아에선 즐긴다는 포르투갈로


국경지대 마을에 다다른 시간은 15시 20분, 길가에 우체국 건물이 보인다. 우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Portugal)의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의 국경 마을인 Vilar Formoso를 지나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로 들어간다. 구글 지도를 살펴보니 코임브라를 거쳐 리스보아 (※ 현지인들은 리스본이라 하지 않는다.)로 갈 것이다. 국경을 넘는데도 여권 보자는 얘길 하지 않으니 유럽연합(EU)을 여행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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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이라는 국명은 중세 포르투갈 형성의 중심지였던 포르투의 라틴어 명칭인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에서 유래되었다. 현지 발음은 포르투갈에 가깝다. 수도는 대서양에 접한 항구도시 리스보아(Lisboa)이다. 우리는 흔히 영어식 표기로 리스본(Lisbon)으로 알고 있다. 포르투(Porto), 브라가(Braga), 코임브라(Coimbra), 파루(Faro) 등의 주요 도시들이 있다.


이들은 ‘뽀르또’라 발음하는 포르투(Porto)는 대항해시대를 여는 무역 거점 도시로 이곳 역사지구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포르투에서 일하고, 코임브라에선 공부하고, 브라가에서 기도하고, 리스보아에선 즐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시마다 개성이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아마도 일하고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니 기도하고 즐길 수는 있지 싶다. 축구선수 에우제비오, 호날두가 이곳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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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은 전 세계 코르크 생산의 60%를 점유하고 있다. 우리는 코르크의 용도로 와인병마개 정도로 알고 있지만 이네들은 코르크로 못 만드는 것이 없다. 슬리퍼, 구두, 가방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판매한다. 공기만 통과시키고 액체는 차단하는 코르크의 특성이 와인 숙성은 물론 다양한 제품을 가능케 한다.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들 중 와인 생산에 있어 아직도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세계 6위의 와인 생산국으로 주정 강화 포도주인 뽀르또(Porto) 와인은 대표적인 수출상품이다. 선물로 와인을 산다면 당연 뽀르또를 추천하는 이유이다.


주정강화 와인의 유래는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의 보르도 지역이 영국의 속령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전쟁 이후에 프랑스와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였던 영국은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더 이상 수입하지 않았고, 보르도 와인이 그리웠던 영국인들은 새로운 시장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보르도 지역에 비해 거리가 멀어, 장거리 운송이나 항해, 고온의 보관 환경으로부터 와인이 변질되는 것을 막고자 와인에 도수가 높은 브랜디를 가미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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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30분을 쉬어 가는 휴게소에서 벨렘빵, 에그타르트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바로 그 빵 4개를 5유로에 사서 미리 사둔 뽀르또(Porto) 와인 한 병을 나누어 마신다. 벨렘빵과 뽀르또 와인, 궁합이 잘 맞는다. 와인을 즐겨하는 편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레드와인 특유의 떫은맛에 도수가 있어 소주를 즐겨 마시는 우리네 입맛에 맞는 편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이곳 휴게소에서는 뽀르또 와인을 잔으로도 판매하고 있었다. 뽀르또 한 잔과 벨렘빵을 곁들인다면 휴게소에서 꽤 멋진 브런치가 될 것 같다. 우리는 백년전쟁 후 영국인이 그리워했던, 그 뽀르또 와인을 원산지에서 마셔보는 여행의 호사를 누린다.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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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으로도 판매하고 있는 뽀르또 와인


다시 버스는 휴게소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무료함도 달래고 포르투갈 문화도 접하는 의미로 빠두(Fado)를 들으며 이동한다. 한글로 표기할 때 ‘파두’라 쓰는 포르투갈의 전통음악, 빠두(Fado)라는 장르이다. 일반적으로 애수 어린 곡과 노랫말, 가난한 이의 삶이나 바다에 대한 노래가 많다. 리스보아의 빠두는 우울하고 슬픈 전통적인 빠두와 대학도시로 젊은 대학생들에 의하여 전통적인 빠두가 조금은 생기발랄하게 변형된 형태의 코임브라 빠두로 크게 구별한다. 낯선 음악이지만 감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짧게 들어보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애수 어린 곡조만도 아닌 것 같다. 음악을 말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빠두도 다양한 여러 주제를 다루며 애수 어린 슬픔과 한탄들 만을 표현하는 곡조만도 아닌 듯하다.


내친김에 Amalia Rodrigues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1920~1999), 리스보아의 빈민촌에서 태어나 ‘빠두의 여왕’으로 불렸던 포르투갈의 국민가수 빠두를 들어보고 넘어가자.


https://youtu.be/xicAWA0nB8E?si=r8vfbj11FHPvwwZj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아무런 입경 절차 없이 국경을 넘는다. A-62 도로에서 A-25 도로로 바뀐다. 참 편리하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광경이다. 바리케이드도 없고 군인도 경찰도 보이지 않는다. 통관을 위한 사무소도 물론 보이지 않는다. 양국 간 조약으로 가능한 일이란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역사적인 배경(1580년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의 왕을 겸하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의 형성)이 작용하는 것 같다. 어쨌든 포르투갈로서는 육로를 통한 교류는 스페인을 통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현실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는 듯하다. 시차는 다시 한 시간, 14시 20분으로 시간을 맞추고 우리는 한 시간 젊어진다.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에 들어선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은 과거 대항해시대에 남미대륙을 두고 식민지 경쟁을 벌였었던 라이벌 관계였다. 북중미 대다수와 남미 대부분의 지역들은 스페인이 차지하였고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집어삼킨다. 대신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스페인은 필리핀과 그 일대만 차지하고 나머지 인도,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해안의 무역 거점들은 모두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떨어진다. 이들 두 나라가 세계를 둘로 쪼개어 차지하는 형국이 되었던, 그들 만의 대항해 시대였던 것은 아닐까?



거기가 거기 같은 풍경을 다섯 시간째 보며 포르투갈 평야지대를 통과하고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엔리케 왕자는 항해 학교를 세우고 타륜과 이슬람인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해도와 항법을 가르치고 원거리 항해훈련을 했다.


엔히크 지 아비스 (포르투갈어: Infante Dom Henrique de Avis)_Domínio público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enry_the_Navigator1.jpg



15세기 당시 유럽의 상황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권이 강했던 시대였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우리가 경유했던 터키 이스탄불)을 점령하면서 직접적인 동서 교역이 차단되고 이슬람인을 통하여 교역이 이루어지게 된다. 자연스레 오스만제국은 이러한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다. 유럽 제국의 통치자들은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교역할 수 있는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 동서 교역의 독점권을 쥐는 일이었다. 이는 지리상 발견의 가장 큰 동기로 작용한다.


이러한 경쟁에 가장 앞서 있던 나라가 포르투갈이었고 1415년 세우타(Ceuta, 북아프리카 모로코 북부 지역으로 중국과 인도산 향료를 유럽에 공급하던 이슬람 항구)를 점령,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포르투갈은 동서 교역의 독점권을 거머쥐게 되고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상선들은 아프리카 지역의 흑인들을 발견하게 되고 이들을 거래하는 비인도적인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인다.


무역의 형태는 서아프리카에서 총을 노예들로 바꾸어, 다시 아메리카 대륙에 팔았고, 한 척에 500명 이상의 노예들을 싣고 아메리카로 떠났다. 삼각무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죄 없는 노예들은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질병과 싸워야만 했다. 이들 흑인 노예들은 아메리카의 대규모 설탕이나 사탕수수 농장인 아시엔다(hacienda: 일반적으로는 평야지대의 거대한 농장을 뜻하는 단어이나 폭넓은 의미로 대항해시대 중남미에서 대토지 소유 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에서 비인간적인 가혹한 노동과 학대에 시달리는 질곡의 세월을 겪게 된다.


이처럼 ‘대항해시대’란 말은 신대륙 발견도 아니었고 새로운 역사도 아닌 사리사욕을 위한 무자비한 정복과 식민지 지배의 시발이었다. 식민지 원주민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끔찍하고 무서운 '대암흑시대'였지 싶다. 아무튼 서아프리카 항해 루트의 개척은 지중해 동쪽에 머물렀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그 바깥 대서양 중심 세계로 전환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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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간을 이동하는 내내 산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산지가 70%에 이르는 국토에서 자란 우리에겐 그저 생경할 수밖에 없는, 차창 밖을 내다봐도 지형지물이 많지 않은 평야로만 쭈욱 이어지는, 좋은 소리도 세 번 하면 듣기 싫다는데, 거기가 거기 같은 풍경을 무려 다섯 시간째 보고 있자니 다소 심드렁해진다. 드넓은 평야는 겨울인데도 목초가 푸릇푸릇하다. 끝도 보이지 않게 늘어선, 코르크 채취로 붉은 속살을 드러낸 코르크나무 사이사이로 아주 이따금씩 지나가는 농가가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농부라도 보일 때는 눈물이 날 지경으로 반가운, 구름은 낮게 깔려 있고 양 떼들과 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참으로 목가적인 한가로운 풍경이 보이는 오후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한 무리의 새떼들이 푸른 하늘을 수놓는다. 평화로운 들판에는 목초 농사와 관련된 기계가 멈춰서 들판을 지킨다. 얕은 구릉지에 길게 띠처럼 형성된 고만고만한 주택들이 낮은 태양 아래 더욱 희게 돋보인다. 듬성듬성 코르크나무숲이 오후 햇살을 삼킨다. 회전을 멈춘 풍력발전기만 하릴없이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터라 일행들 대부분은 곤한 잠을 자는 모양이다. 그런데 새벽 3시 50분에 눈을 뜬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여행은 창문을 열면 찬 바람이 훅 몰려들어 오듯이 그렇게 색다른 많은 것을 보게 되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느낌은 생각을 생각은 또 새로운 공부로 이어지니 심드렁한 평야를 다섯 시간째 보고 있지만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인 걸까?




포르투갈 성모마리아 발현 성지 파티마(Fát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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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차창 밖이 어둑어둑해지는 오후 5시 43분경에 우리 일행은 파티마에 도착한다. 날씨는 조금 추운 편이다. 우리가 오늘 묵을 호텔 Cruz Alta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잠시 걸으며 파티마로 향한다. 주변은 모두 호텔과 상가로 조성되어 있다. 인도에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원기둥 모양의 휴지통이 줄지어 4개씩이나 한 곳에 비치되어 있다.



참회의 길




그리 멀지 않은 성당 종탑 위에서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 성당으로 진입하는 길가에 십자가 조명이 환하게 길을 밝힌다. 주위는 어둠이 내려 고요하기만 하다. 성지여서인지 사람들 목소리도 작아졌다. 약간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성당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뭔가 좀 특별한 길인 모양이다. 어둠이 내린 저녁인데도 종탑의 빛을 반사하며 반들반들하다. 파티마 소 성당(Chpela das Aparicoes) 봉헌 때, 성모님을 뵈러 가는 길인데 서서 걸어갈 수 없다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무릎으로 기어갔다는 ‘참회의 길’이다. 그 후 자신의 죄를 참회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픈 걸음들이 만들어낸 길이다. 왠지 신발을 신고는 걸을 수가 없어 보인다. 반들반들한 참회의 길을 옆으로 조용히 걸어본다. 성당으로 길게 이어지는 참회의 길을 보는 것만으로도 파티마에 올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 있지 싶었다.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파티마에 다녀오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무엇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파티마의 ‘참회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투명하게 안이 들여다보이는 소 성당 예배당에 환하게 밝혀진 촛불이 유난히도 밝게 느껴졌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촛불이 켜져 있는 제단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 중이다. 1917년 세 어린이가 파티마의 성모를 목격했던 그 자리에 세워진 파티마 소 성당이다. 성모 발현 당시 이름이 무엇이냐는 아이들의 물음에, 여인은 “나는 로사리오의 성모다.”라고 대답하였다. 히야친다와 두 어린이들은 코바 다 이리아라고 불리는 목초 지대에서 성모 발현을 경험한 것이었다.

광장을 걸어본다. 주변에 비해 약간 움푹 들어간 지형이었다. 1928년 5월 13일에 건축을 시작하여 1953년에 봉헌된 네오 클래식 양식의 성모 발현 기념 대성당(Fatima Basilica)이 우뚝 서있다. 이미 어둠이 내린 탓이기도 하지만 사방으로 불빛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어서인지, 어둠 속에 유독 파티마 바실리카의 모습만이 하얀 불빛 조명으로 드러나며 더욱 신성하게 느껴진다. 푸른 하늘이 성당을 감싸주는 낮에 보는 파티마 바실리카의 모습은 어떨까? 지금 이 시간, 어둠 속에 오직 단 하나의 빛으로 다가오는, 파티마 바실리카의 모습을 바라보며 차분한 마음으로 성당을 둘러본다. 거대한 대성당(Basilica) 중앙 종탑은 65m이며 제단 좌우에는 성모 발현을 목격하고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복자 히야친타(1910~1920)와 프란시스쿠 마르투(1908~1919)가 2000년에 시복 되었으며 측면에는 수도원과 병원 건물이 회랑으로 넓게 이어져 있다. 전 세계에서 많은 환자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루치아 도스 산토스는 수도회에 입회해 1928년 첫 서원을, 1934년 종신서원을 하고 1948년부터 코임브라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 2005년 2월 14일 (97세) 하느님 품에 안겼으며, 이듬해 2006년 파티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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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바실리카와 광장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어귀에 베를린장벽(Berlin Wall)이 전시되어 있다. 발현 당시 성모마리아가 러시아(당시 소련)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 결국 독일이 통일되고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는 등 공산주의가 몰락한 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웠다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잠시 머무르며 분단의 현실에선 우리 민족을 위해서 묵상기도를 올린다.


파티마의 경제는 성지순례관광으로 유지되고 있다. 매년 파티마의 성모 발현 날짜인 5월 13일과 10월 13일에는 길에 가득 찬 100만여 명의 순례자가 파티마를 찾아온다. 연중 묵주기도와 촛불 행렬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로 과거에 비해 큰 규모로 발전하였고 성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상점과 호텔이 들어선 거리가 형성되었다. 상점을 들여다보니 성모 발현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었다. 장시간 버스로 이동해서인지 피로가 몰려온다. 상가거리를 지나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저녁식사 후에 살라망카에서 산 하몽 말린 무화과를 꺼내 놓고 뽀르또 와인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낸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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