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랄다 탑과 세비야 대성당
여행의 계절, 다시 걷는 스페인-여유롭게 인생을 사는 세비야 사람들
황금의 탑 Torre del Oro 세비야대성당 Seville Cathedral 히랄다탑 La Giralda 알카사르 Alcázar de Seville 인디아스 고문서관 古文書館 Archivo de Indias 세비야의 중국집 북경성 CIUDAD DE PEKI 北京城
황금의 탑 Torre del Oro
우리는 스페인광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온다.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걸어 산텔모 다리 Puente de San Telmo 옆에 세워진 정 12 각형의 황금의 탑에서 잠시 멈춘다.
이 탑은 1220년 이곳을 지배하던 무어인이 자신들의 땅을 되찾으려는 가톨릭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로 사용했던 탑이다. 다른 한 편의 강에 있던 탑(anchor-point)과 쇠사슬로 연결하여 과달키비르 강을 통하여 세비야로 침입하는 침입자를 방어하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베리아반도 안달루시아와 북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였던 알모하드 칼리프 Almohad Caliphate에 의하여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군사시설인 셈이다. 1755년 리스보아 대지진 때 이곳도 상당한 피해를 봤고 1760년 보수되었다 한다. 맞은편에 있었던 탑은 철거하여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여행기를 쓰기 위하여 조사를 하다 보니 알카사르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벽과 연결되어 있는, 1992년에 복원된 Torre de la Plata를 황금의 탑 맞은편 강 건너에 있던 탑(anchor-point)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료가 가끔 보이는데, 이는 잘못된 자료이지 싶다. 아무튼 과달키비르 강가를 걸으며 상가지역으로 들어가니 거리의 호텔과 상점의 상호에 토레 데 라 플라타 Torre de la Plata (은의 탑)를 많이들 사용하고 있다.
‘황금의 탑’이라 이름이 붙게 된 연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모르타르, 석회 및 압축 건초의 혼합물로 만들어진 건축자재를 사용하여 지어진 탑이 강물에 비치면 황금빛을 띠어 황금의 탑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적절하고 타당해 보이나, 일설에는 탑의 상층부가 황금이었다는 설과 신대륙에서 세비야로 들어온 황금을 보관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란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은 설이다. ‘황금이 여기 있네!’라고 광고할 일이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싶다.
아무튼 황금의 탑은 남미 식민지 개척의 전초기지이자 아메리카 교역의 중심 도시였던 세비야의 관문 과달키비르 강을 지켜보며 서있다. 모든 유럽으로 들어가는 무역선과 식민지로 나가는 배들의 진출입항으로 교역에 따른 무역수수료 등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는 대항해시대, 한때 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세비야의 풍요와 번영 그리고 이네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지 싶다.
우리는 잠시 사진촬영을 하며 탑 앞에 머무른다. 가로수에 탐스럽게 달려있는 주먹만 한 오렌지가 하나 둘 툭! 툭! 땅으로 떨어진다. 하나를 주워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오렌지 향이 상큼하다. 가로수고 정원수고 오렌지나무가 지천이니 거리 곳곳에 오렌지가 나뒹구는 모습은 흔하게 벌어지는 광경이다. 여기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쓴다. 식당에서도 후식으로 오렌지를 통째로 준다. 그야말로 오렌지가 지천인 세비야이다. 황금의 탑 앞으로 야자수 나무 세 그루가 탑 꼭대기까지 자라고 있는 세비야 거리에서 이네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세비야 거리
우리는 다시 거리를 걷는다. 알록달록 붉은색, 황금색, 흰색, 황토색 등 건물마다 다양한 색상으로 조금은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들이 거리를 메운다. 아침햇살을 받아 작고 아담한 식당, 카페, 기념품점의 붉은색 차광막이 반짝거린다. 스페인은 대도시에서조차 높은 건물들이 그리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대개가 2~3층의 건물들이 주류다. 상점도 그리 넓거나 크지 않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인 이네들의 옛 영광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인지, 아니면 이네들의 성정이 그러한지 모를 일이지만 사람이 살기엔 시각적으로 편안하고 복잡하지 않은 그런 예쁜 상점들이 골목골목 아기자기하게 늘어서 있다. 크고 작은 오토바이가 인도 한쪽으로 정연하게 주차되어 있다. 카페에서 거리에 내놓은 허리 높이 이상의 키만 크고 작은 테이블이 이색적이다.
이만하면 사람이 여유롭게 살만한 환경이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걷다 보니 세비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엔 급한 모습이 없었다. 버스나 트램을 타기 위하여 뛰는 사람들 보기 어렵다. 이쯤 되면 느긋하다고 표현하면 맞을 것 같다. 세비야는 일의 속도를 조절하고, 긴 점심시간(시에스타*)을 즐긴다고 한다. 보통 오후 2시부터 5시까지의 시간이 식사와 휴식에 할애되며, 이 시간 동안 가게와 사무실은 문을 닫기도 한단다. 참으로 여유로운 점심시간이다.
[필자 주]
시에스타(siesta)는 스페인과 일부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전통적으로 오후에 짧은 낮잠이나 휴식을 취하는 문화다. 일반적으로 점심 식사 후 1시간에서 3시간 정도의 시간을 시에스타에 할애하며, 이 시간 동안 많은 상점과 기업들이 문을 닫기도 한다.
시에스타는 특히 여름철에 더 흔하게 이루어지며, 더운 날씨에 피로를 덜고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이 문화는 스페인의 생활 리듬에 큰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은 시에스타를 통해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거나 개인적인 여유를 즐기는 데 집중합니다.
세비야와 같은 도시에서는 시에스타가 지역 사회의 중요한 일상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어, 사람들의 여유롭고 느긋한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다.
플라멩코,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고 아름다운 마리아 루이사 공원 산책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 거리의 카페에서 친구들과 커피를 즐기며 따듯한 햇살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삶이 무척 여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시각일까?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여행자인 필자의 눈에도 크나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시간과 속도로 살아가는 여유가 있는 듯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여유를 누리는 법을 아는 듯했다. 아마도 세비야만의 매력적인 거리의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히랄다탑 Giralada이 먼저 보인다. 우리는 골목길을 따라 세비야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거리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세비야 대성당에 다다른다. 성당 앞에 경찰관이 서있다. 도로를 자세히 보니 레일이 깔려 있다. 아니 웬 레일이? 머리 위를 올려다봐도 전깃줄은 보이지 않는다. 전차는 아닌데... 곧 궁금증은 풀렸다. 저기 멀어져 가는 꼬마자동차, 아니 버스나? 전기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세비야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트램이다. 환경에 부담을 덜 주고 문화유적을 매연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교통수단인 모양이다. 1.5유로에 시내 주요 지점을 연결한다.
세비야 대성당 입장을 위하여 줄을 서자 현지 가이드 이경호 씨는 로컬 가이드 ‘엔리케 Enrique’를 소개한다. 이네들 이름 중 엔리케란 이름이 꽤나 많다. 우리로 치면 철수, 미국으로 치면 찰스쯤 되지 싶은데, 버스기사도 엔리케였다. 엔리케는 게르만의 하인리히 Heinrich의 스페인식 발음인데, 영국의 핸리 Henry 이태리의 앤리코어 Enrico 독일의 하인리히 Heinrich 모두 같은 이름인 셈이다.
아무튼 로컬 가이드 엔리케는 어디를 가나 유적지 입장할 때 반드시 나오는 로컬 가이드이다. 현지 가이드는 한국어와 스페인어가 가능한 가이드이고 로컬 가이드는 자국어만 하는 가이드이다. 크게 하는 일도 없다. 표 끊어 주고 관람할 때 같이 따라다닌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가끔은 통제를 하기도 한다. 스페인 관광법은 자국민이 벌어먹고 살게 되어있다.
나는 환하게 웃는 엔리케, 크게 하는 일 없는 로컬가이드 그 엔리케에게 일을 좀 시켜 보기로 한다. 안 통하는 말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으며 유쾌하게 기념촬영을 제의한다. 그런데 그 엔리케가 갑자기 ‘빠따따, 빠따따!' 하며 외마디 소리를 한다. 아니 사진 찍자는데 어린아이도 아니고 갑자기 혀 짧은 소리를 해대는 거지…, 이거야 원 뭐라는 건지..., 아무튼 뭐, 앞뒤 다 잘라먹고 외마디로 '빠따따, 빠따따' 하니 당황스러웠는데, 표정을 보니 화내는 것 같진 않고 우리네 사진 찍을 때 하는 ‘김치~’라는 것 같아 얼른 '빠따따~'하며 활짝 웃어주니 그제야 좋아하는 엔리케이다. 엔리케와 나는 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서도 ‘빠따따~’를 하며 또 한 번 웃는다. 역시 크게 하는 일 없는 로컬 가이드 엔리케에게 일을 시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컬 가이드 엔리케가 모처럼 일을 한다.
세비야대성당, 히랄다탑, 알카사르 그리고 인디아스 고문서관이 세비야에서 비교적 큰길에 속하는 트램이 다니는 도로 앞으로 웅장한 위용을 드러낸다. “아니 뭔 성당을 이렇게 크게 지었을까?”, 성당에 진심인 이네들의 신앙심이 담겨있지 싶긴 한데, 밖에서 외관을 보니 뭐라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웅장했다. 그림엽서에 나오는 시골의 소박한 성당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성당 위를 올려다보니 어지럽다. 잘못하면 성당 올려다보다 뒤로 자빠질 지경이다. 어린이나 노약자는 따라 하지 않길 바란다. 가운데 이슬람식 돔 형 첨탑과 주변을 에워싼 듯 서있는 수많은 가톨릭식 첨탑들이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힌다. 기둥을 타고 오르며 세워진 너무나 많은 첨탑들이 압도하는 분위기다.
성당 옆으로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의 일상이 뒤섞인다. 세비야의 거리 어디에서든 우뚝 솟아 있는 히랄다 탑과 성당을 볼 수 있다. 마치 이 도시의 상징적인 풍경 같았다. 따스한 햇살 아래 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활기찬 대화를 나누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관광객들은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노천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여유롭게 느껴지는 세비야 거리의 풍경이다.
히랄다 탑은 그 웅장한 모습으로 세비야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상기시키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거리의 풍경이 된다. 탑의 아름다운 아랍풍 디자인은 과거의 유산을 느끼게 하며, 현대인들과 과거의 이야기가 함께 숨 쉬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지만 이곳에서 그들은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며 세비야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
알카사르 Alcázar de Seville
뾰족한 사각뿔 모양의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때 용이한 담장)과 성벽으로 지어진 성곽 형태의 알카사르 성곽이 보인다. 알카사르와 그 정원은 712년에 무어인들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과달키비르 Guadalquivir 강 주변을 통치하기 시작한 시기에 건립된 으리으리한 요새이다. 1248년 이후 왕실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페드로(Pedro, 일명 ‘잔혹한 왕 페드로’(Peter the Cruel))의 통치 기간에 보수했다. 알카사르의 내부에 건설된 이 궁전은 안달루시아의 아랍 예술에서 장식 표현과 기술을 빌려온 무데하르양식* 특유의 혼합주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 무데하르 양식(Mudéjar architecture)
8세기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국토를 빼앗겼던 스페인은 국토 회복 운동, 레콩키스타를 통해 15세기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로마네스크, 고딕 건축이 이슬람풍의 건축 양식과 섞여 여타 유럽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스페인 고유의 건축 양식이 탄생했는데 이를 '무데하르 양식'이라 일컫는다. 로마네스크 건축물에 이슬람풍 장식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벽돌과 석고를 이용해 아라베스크 무늬와 아치를 만들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스페인 세비야 여행 도서명 이지 스페인 포르투갈, 이지 유럽 저자 강혜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67006&docId=6040887&categoryId=67303
https://www.alcazarsevilla.org/en/
스페인과 이슬람의 잦은 충돌로 이슬람인들이 궁성을 요새화하여 만든 성채(城砦)는 육중한 돌을 깎아 성곽을 쌓아 올린 석축성이다. 알카사르 성문은 유난히 짙은 자줏빛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왕궁을 상징하는 사자 형상의 문장이 성문 위쪽에 새겨져 있다. 양쪽으로 망루가 세워져 있다. 전형적인 유럽의 성곽의 형태로 망루와 성벽, 여장으로 구성된 성곽이다.
여행자의 눈은 성곽을 따라가다 한 곳에서 멈춘다. 성곽 위에서 내려오는 배수로, 이끼가 끼어 있는 성벽으로 오랜 세월의 흔적들이 내려앉아 있다. 갈라지고 모서리가 달아 있는 성벽의 모습이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아름답다. 성벽 옆으로 관광객을 태우고 한 바퀴 돌아왔는지 머리채를 아래위로 흔들며 숨을 몰아쉬는 백마가 끄는 노란색 바퀴를 끼운 마차가 서있다. 그러고 보니 앞에 서있는 두 대의 마차도 똑같은 노란색 바퀴다. 이곳의 마차는 모두 노란색 바퀴에 노란색 마구를 사용한다. 노란색이 갖는 명시성 때문일까..., 스페인 광장에서 본 마차도 노란색이었다. 알카사르 앞 작은 광장 중앙에 사방으로 분수가 나오는 조명등은 여행객들을 내려다보고 서있다.
현장학습을 나온 어린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성당의 벽체에 이내 묻혀버린다. 오늘도 세비야 사람들은 성당 건너편 거리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작고 하얀 트럭이 거리의 휴지통을 비우기 시작한다. 예쁘게 단장한 마차는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성당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과거 왕족과 귀족들이 딸각딸각 편자 소리를 흩날리며 호들갑스럽게 타고 다녔을, 중세 귀족처럼 깔끔하고 말쑥하게 단장한 마차는 승리의 광장 한쪽에서 이제 관광객들을 맞는다.
세비야대성당 Seville Cathedral
이곳은 많은 성인의 유골이 안치된 성당이다. 모든 성당에서 남자는 입장할 때 모자를 벗어야 한다. 우리는 엔리케의 안내에 따라 이네들의 철천지 원수 무어인들이 지은 알모하드 이슬람 사원이었던 지진으로 무너진 모스크를 철거하고 그 위에 짓기 시작한 세비야 대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오렌지가 가득 달린 오렌지 정원(Patio de los Naranjos, 오렌지 안뜰)이 우리를 맞는다. 바닥에는 오렌지가 여기저기 나뒹군다. 붉은색 블록을 세로로 깔아 놓은 정원 바닥은 꽤나 단단하고 꼼꼼하게 만들어져 있다. 모스크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세정을 위한 수조가 정원 한쪽에 남아있다.
부분적으로 이슬람 양식이 남아있는 성당의 화장실은 어떨까? 별게 다 궁금해진다. 정원을 지나 둥근 돔형 회랑을 따라 화장실로 들어간다. 간접조명으로 은은하고 따스한 느낌을 주는 아늑한 공간이다. 거기에 교과서에나 나올 것 같은 토기가 여러 점 놓여있어 안정감을 주는 분위기다. 화장실 앞의 대기 공간 분위기치곤 상당히 예술적이다. 돔형 통로에는 검은색 스웨터 차림의 소녀가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뒤적거린다. 이거 뭐라 표현해야 하나... 좀 과하게 표현하면 화장실조차도 환상이랄까.
세월의 흔적으로 약간은 검고 회색으로 변한 성당 북쪽 문 입구의 어마어마하게 높은 파사드 위로 오렌지 대여섯 개가 오버랩된다. 성당 안으로 들어오니 거대한 기둥들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내부 벽체와 천장을 지탱하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간접조명으로 천장에서 연출되는 황금빛 색채는 웅장한 기둥을 타고 내려오며 더욱 화려하게 느껴진다. 스테인드글라스가 76곳에나 설치되어 있다 한다. 가히 빛의 마술이고 예술의 경지라 하겠다. 마치 대항해시대를 상징하는 하늘에 떠 있는 황금빛 범선 같다.
본당 좌우에 하나씩 설치된 바로크 양식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에선 어떤 소리가 날까? 참으로 아름답고 섬세한 내부이다. 구조공사에 100년, 내부 장식에 300년이 걸렸다 한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벽면의 조그만 방들은 가문의 기도 제단이다. 성당에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전용으로 사용하는 가문의 제단들이다. 가톨릭 성당은 어디에나 이러한 가문의 소 제단이 있다. 성당 중심부에는 성가대석과 주 제단이 있는데, 성가대석은 서로 마주 보며 배치되어 있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과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는 내부는 금박으로 치장되어 있다. 성가대석은 페루에서 들여온 카오바나무로 만들었는데 못도 들어가지 않는 단단한 나무이다. 동쪽에서 해가 뜨니까 동쪽에 제단을 만들고 반대쪽에 성가대석을 만들었다. 성서에 근거한 조각 작품들이 가득한 주 제단은 황금 1.5톤이 입혀져 있는 황금빛의 거대한 목제 제단이다. 지나치게 화려한 성당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진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절실하였던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이네들의 마음도 느껴진다.
무리요 Murillo의 ‘성 안토니오의 환상’
성당 안 깊숙이 들어서자,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황금 제단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찬란한 광경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벽면 전체를 차지한 거대한 성화들, 햇빛을 받아 오묘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고풍스럽고 섬세한 문양들로 장식된 천장까지…
마치 모든 조각과 색채가 조화를 이루며 보는 이를 성스러운 공간으로 인도하는 듯하다. 어느 하나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인 장식들이 성당 구석구석에 숨어 있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결정하기조차 어려운 찰나들이 이어진다. 조용한 예배당 안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이 깃들어 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함 속에 경이로움과 성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성구실과 소 제단에는 거장들의 성화와 수많은 성구 관련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마치 별도의 미술관에 온 느낌이다.
이곳엔 특별한 그림이 한 점 걸려있는데, 세비야의 유명한 화가 무리요 Murillo의 ‘성 안토니오의 환상’이다. 하나의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걸려있는 이 그림은 오른쪽 하단의 안토니오 부분이 도려내어 도난당했었는데, 우연히 뉴욕 뒷골목에서 몇십 달러 주고 산 그림이 범상치 않아 감정을 의뢰하게 되면서 세비야 대성당의 그림임이 밝혀져 다시 찾게 되었다 한다. 자세히 보면 그림을 복구한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콜럼버스 묘 옆 벽면에 톨레도 대성당에서 보았던 ‘성 크리스토퍼’ 그림이 걸려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평정심을 찾아보려 애를 써본다.
신대륙의 발견에 이은 세비야의 번영, 이슬람문화의 상징성을 지닌 모스크에 건설된 대성당, 당시 세비야의 재정적인 능력은 가히 천문학적이었을 것 같다. 이 정도 대규모의 성당 건축과 1.5톤의 황금이 입혀진 주 제단, 황금 제단, 은의 제단 및 16~17세기에 걸쳐 이루어지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제단 뒤편의 조각품, 창살 공예와 사제석 같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장식물을 확충할 수 있는 재정은 세비야의 번영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세비야대성당은 세비야의 번영을 쏟아부은 건축물이자 이슬람 세력을 의식한 가톨릭 상징물이다. 또 한편으론, 세비야대성당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가톨릭과 이슬람 두 문화의 뿌리 깊은 충돌이 빚어낸 갈등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단지 규모가 크고 장식이 화려한,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런던 세인트폴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 ‘일 년에 이백만 명이 찾는 성당’ 이란 그렇고 그런 수식어 보다 가톨릭과 이슬람 두 문화의 뿌리 깊은 갈등의 상징물로써 카데드랄과 히랄다가 한 곳에서 서로 자신의 목소리만 주장하는 현실적인 갈등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나만 그런 것인가...
크리스토발 꼴론 Cristóbal Colón
성당 주 제단 옆으로 특이한 광경이 보인다. 네 사람이 관을 메고 서있는 조각이다. 콜럼버스의 묘다. 앞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보통의 경우 성당 바닥이나 벽체 등에 관을 안장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런데, 왜 관을 땅에 묻지 않고 저렇게 메고 서 있을까? 호기심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사연을 들어본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크리스토발 꼴론 Cristóbal Colón, 여기저기서 모두 지원을 거절당하고 결국 이사벨 여왕의 개인 돈으로 지원을 받아 세비야의 과달키비르 강에서 항해를 떠난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출항하여 1492년 10월 12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후원으로 원하던 항해에 성공하고 1503년까지 4번의 항해를 했지만 이사벨여왕에게 약속한 금은보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이사벨 여왕이 죽자 스페인 왕들은 그를 버렸고, 관절염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콜럼버스는 1506년 5월 21일 54세의 나이로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콜럼버스는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며 그가 처음 발견했던 히스파니올라 섬(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의 유언으로 36년 후인 1542년 히스파니올라 섬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그의 유해가 옮겨졌다. 하지만 1795년 프랑스가 이 섬을 정복하자 유해는 쿠바 아바나로 옮겨졌다. 1898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콜럼버스의 유해는 세비야 대성당으로 오게 되었다 한다.
콜럼버스의 유언대로 유해가 스페인 땅에 닿지 않도록 콜럼버스의 관을 4명의 스페인 왕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카스티야 국왕과 레온 국왕이 고개를 들고 앞에 서 있고 아라곤 국왕과 나바라 국왕이 고개를 숙이고 뒤에서 뒷부분을 잡고 있다. 스페인의 4 왕국 중에서 앞의 두 왕국은 콜럼버스를 지원했고 뒤에 두 왕국은 지원하지 않아 콜럼버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출신에 한낱 항해사에 불과했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스페인의 번영을 가져왔기에 그의 관을 스페인 왕들이 들고 있다 한다. 까스티야 국왕의 발을 만지면 세비야에 다시 온다는, 웃자고 한 이야기를 들은 여행객들이 까스티야 국왕의 발끝 부분을 하도 만져 이곳을 다시 오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만큼이나 반질반질 빛이 난다. 현재는 만질 수 없다 한다.
이 성당 안에는 페르난도 콜럼버스, 콜럼버스의 아들의 무덤도 있다. 그는 아버지의 신대륙 발견에 관련된 행적을 조사하여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는 명확한 기록을 세비야 성당에 맡겼다. 그간 유럽 사회에서 잊히고 무시된 신대륙 발견에 관한 아버지의 박탈된 지위와 명예를 회복하고 스페인의 영웅으로 추대되는 공적이 인정되었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서 추기경, 국왕만이 출입하는 문 앞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또한, 무어인으로부터 세비야를 수복한 페르난도 3세를 비롯한 네 명의 왕과 기부금을 낸 부자들과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소이기도 하다.
아무튼 당시 세비야의 가톨릭은 모스크를 대체하려 했으며, 1401년에 모스크가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천하 유일의 고딕양식 대성당으로 개조되었다. 1420년에 세비야대성당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15세기 건축 유적 중 하나가 되었다.
세비야대성당, 히랄다 탑, 알카사르, 인디아스 고문서관(古文書館)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다. 대성당과 알카사르 사이의 카사 론하 Casa Lonja 고문서관(古文書館)은 1784년 카를로스 3세의 명에 따라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친필 문서, 신대륙 발견 및 정복에 관한 자료 등 수많은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카사 론하 Casa Lonja는 필리프 2세가 가장 좋아했던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가 설계한 것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과 거래를 조절하기 위해 건설된 ‘무역관’이다. 1503년 이후 알카사르 별채 안에 있는 유사한 시설물들을 대체한 ‘무역 거래소’는 1583년~1598년에 건축되었으며, 에스큐리알(Escurial)의 건축가가 선호하는 엄격한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의 마지막 작업은 1649년에 완성된 후에 다목적으로 사용된 카사 론하는 1784년에 인디아스 고문서관으로 바뀌었으며, 1790년부터는 아메리카의 식민지와 관련된 모든 역사와 외교 문서들을 보관하게 되었다.
https://heritage.unesco.or.kr/세비야-대성당-알카사르-인디아스-고문서관/
히랄다탑 La Giralda
1172년~1198년에 야쿠브 알 만수르 Yaqub al-Mansur 왕조가 건설한, 이슬람 사원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미나렛, 옛 모스크의 첨탑이었던 히랄다는 주인이 바뀐 땅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1248년 세비야의 레꽁기스따 이후에 종탑으로 바뀌었다. 16세기에 히랄다의 꼭대기에는 히랄디요(Giraldillo, 풍향계) 역할을 하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적인 여성상이 얹어졌으며 28개의 종이 설치되었다 한다. 이로써 히랄다탑의 높이는 97.52m로 세비야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세비야에서는 신규 건축물 높이를 히랄다 탑의 높이 이상으로 짓지 못하게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히랄다와 함께 이슬람 모스크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대성당의 유일한 곳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구획된 북쪽 문 푸에르타 델 페르돈(Puerta del Perdon)과 북쪽에 있는 세정 의식에 사용되었던 수조가 설치된 오렌지 정원 ‘파티오 데 로스 나란호스(Patio de los Naranjos, 오렌지 안뜰)’로 모스크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푸에르타 델 페르돈은 가톨릭과 이슬람의 융합으로 탄생된 무데하르 양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기존의 알모아드 모스크의 일부를 허물지 않고 그 위에 지었다.
우리는 대성당 옆에, 이베리아반도 사람들에겐 아주 이방적인 이슬람 양식의 히랄다(Giralda) 첨탑을 오르기로 한다. 예전에 아랍인들은 말을 타고 올랐다는데 만만치 않겠다 싶다. 하지만 기왕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으니 올라가 보기로 한다. 히랄다 탑 위에선 어떤 세비야의 모습이 보일까 무척 궁금해진다. 약 98m의 높이의 첨탑 안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경사로를 따라 오르내리면 최소한 높이의 두세 배에 가까운 이동거리가 될 것 같다. 오르는 경사로 중간중간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전시해 놓은 자료들을 보면서 오른다. 경사로를 오르면서 차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오르는 방향으로 머리를 살짝 들면 흙벽에 새겨진 층수가 보인다. 이곳에 여행 와서 계속 걸어서인지 그리 힘들지 않게 오른다. 그래도 숨은 턱까지 차오른다. 생각은 힘들지 않다는데 몸은 힘든 모양이다. 얇은 블록을 세로로 깔아 강도를 보완하여 만들어진 경사로였다. 계단이 아니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34, 왜 그렇게 34는 크게 보이던지, 우리는 마지막 램프 34층을 오르고서야 전망대에 올랐다.
종탑에는 크고 작은 르네상스 양식의 종들이 걸려 있었다. 이 종들이 동시에 모두 울리면 종소리는 세비야 시내 전체로 퍼져나갈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공간은 좁았고 관광객은 많아 여유롭게 전망을 감상하기에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히랄다의 정상, 종탑 전망대에서 세비야를 바라본다. 아! 너무 좋다. 시원하고 개운하고 그냥 보이는 대로 세비야를 내려다보는 것이 좋았고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눈부신 세비야가 있어 좋았다. 무슬림들의 모스크였을 때는 이곳에서 세비야 시내로 아잔 소리가 울려 퍼져 나갔을 것이다. 대성당의 종탑으로 바뀐 후에도 목적은 전망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사방으로 조망할 수 있는 세비야를 마음껏 내려다본다.
히랄다탑에서 내려다본 세비야 조망
오랜 세월을 견뎌오며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이끼 낀 성당의 첨탑 뒤로 세비야 시내가 보인다. 히랄다에서 내려다보니 대성당의 엄청난 건축규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과달키비르 강까지 시야를 가져간다. 참으로 장관이다. 왕립 투우장과 강변의 엑스포 빌딩도 한눈에 보인다. 알록달록 흰색과 붉은색 노란색이 어우러진 주택가의 모습도 아름답다. 사방 건물들이 빼곡하다. 그러나 고층 빌딩은 없다. 세비야의 시가지는 지중해 햇살을 받아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스페인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참으로 편안하다. 높은 빌딩들이 없다시피 하니 막힘이 없는 스카이라인이다. 자연의 스카이라인을 거스르지 않고 집들이 지어졌다. 멀리 보이는 스카이라인 아래 포근하게 감싸져 있는 도시의 모습이 우리네 도시와 사뭇 다른 도심의 경관이다. 보기에 좋으니 사람들의 정신건강에도 좋으리라. 외관만 보고 올라왔던 알카사르 성곽 안으로 돈페드로 궁전과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히랄다의 좁은 공간을 활용해 전시해 놓은 기구와 돌, 첨탑에 사용된 조각 모형 등이 당시 장인의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던 조각과 장식 등 당시의 건축 방법을 말해준다. 공구라고 보이는 건 작은 망치 몇 개와 크고 작은 정 들이다. 우리는 종탑에서 함께 기념 촬영을 마치고 히랄다를 내려온다. 대성당 파사드로 오렌지가 쏟아져 내린다. 오렌지나무가 그득한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음 웃음으로 가득하다.
세비야의 중국집 북경성 CIUDAD DE PEKI 北京城
오렌지 가득한 정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시장기를 달래야 했다. 거리를 이동하면서 많은 현지인들과 마주한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길모퉁이에 가게에 Photo & Phone과 Kodak 싸인이 크게 쓰여 있다. 관광지여서 아직 필름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배낭여행객들이 핸드폰 칩을 찾는 가게란다. 물론 현지인들도 이용한단다. 이슬람의 영향이 남아있어서인지 스카프 파는 가게들이 참으로 많다. 기념품 가게에서도 스카프는 기본 품목이다. 거리에 초록색 원기둥 모양의 큰 쓰레기통이 특이하다. Andalusi, Agape, casa castro, BARATILLO, Cruzcampo, Torre de la Plata… 이곳 상점과 카페 상호들이다.
이윽고 CIUDAD DE PEKI 北京城, 조금 익숙한 문자가 보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오늘의 점심을 해결할 북경성이라는 중국집이다. 식당엘 들어서니 현관 왼쪽으로 입상 부처님께서 버티고 서 계신다. 우측으론 중국에 가면 많이 보는, 사람 키보다 더 큰 화병이 버티고 서있고 이어서 뷔페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다. 히랄다까지 오르고 많은 것을 본 만큼 배가 고팠던 우리는 중국요리를 맛있게 먹어준다. 비교적 우리 입맛에 맞는 모양이다. 일행들이 모두 배불리 먹은 모양이다. 누가 한 말인지 지당한 말씀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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