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계절, 다시 걷는 스페인-안달루시아 예술, 문화, 금융의 중심지 세비야 Sevilla 그리고 집시 Gypsy와 플라멩코 flamenco
벨렘역사지구 리스보아에서 세비야로
스페인은 크게 네 개의 권역으로 나뉘는데, 북쪽의 바스크, 중부 내륙의 카스티야, 동부 해안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그리고 지중해를 끼고 있는 세비야를 중심으로 한 안달루시아 지역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은 그중에서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가장 깊게 받아온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여러 문화가 교차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지역으로, 독특한 건축물과 예술, 그리고 풍부한 전통이 어우러져 있다.
A) 포르투갈 리스보아
B) Área de Serviço de Aljustrel(Colibri Aljustrel 휴게소)
C) Guadiana's International Bridge, 8950 Castro Marim, 포르투갈
D) 파데느레(Castle of Paderne)
E) Tablao Flamenco El Patio Sevillano
점심으로 바깔라우를 맛있게 즐긴 후, 우리는 리스본을 떠나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오렌지 나무와 올리브 나무를 감상하며 A-2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한참을 달려왔다. 온몸이 찌뿌둥한 느낌이 드는 이때, 버스는 알후스트렐(Aljustrel)이라는 휴게소로 들어선다.
Colibri Aljustrel 휴게소는 햇빛이 강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 주차장에는 차광 그늘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포르투갈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상점에 진열된 다양한 코르크 제품들이 눈길을 끈다. 코르크는 포르투갈의 특산물로, 참으로 신통하게 잘 만든다. 판매대에 놓인 코르크 슬리퍼와 여러 가지 제품을 유심히 살펴보며, 포르투갈 사람들의 코르크 다루는 기술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코르크의 질감과 색상, 그리고 다양한 형태가 그들의 창의성과 장인 정신을 잘 보여준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니, 높은 하늘에서 지평선 쪽으로 쪽빛 그러데이션이 펼쳐진다. 산이 보이지 않는, 조금은 낯선 풍경이 만들어내는 이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단층의 휴게소 벽면은 모두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푸른 하늘과 노란색 건물 사이에 은색 스틸 지붕이 묘하게 경계를 이루며, 산뜻하고 극명한 대비를 연출한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휴게소 건물이 아름답게 느껴지긴 처음인 것 같다.
푸른 하늘은 휴게소의 노란색 건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지평선을 거스르지 않고 지은 이 노란색 건물은 푸른 하늘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나는 휴게소 이곳저곳을 다니며 팔다리를 흔들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어준다. 지중해의 따뜻한 바람 덕분인지 화단의 화초는 연녹색의 싱그러운 잎을 활짝 펴고 햇빛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에서 느끼는 상쾌한 기운이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해 준다.
정확히 15분을 휴게소에 머문 버스는 다시 지평선과 평행을 그리며 달린다. A-2 고속도로는 지중해에 가까운 파데느레(Castle of Paderne)에서 Via do Infante de Sagre A22번 고속도로로 이어진다. 15시 20분, 우리는 흰색 벽체에 둥그런 창이 있는 뷰를 자랑하는 두 번째 휴게소, Telepizza AS Olhão Sul로 들어선다. 여전히 포르투갈 땅이다.
이곳의 바닥은 마차가 오갈 때 들리는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럽의 거리처럼 타일 같은 작은 돌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보기에도 예쁜 휴게소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30분을 머물며 커피를 주문한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며 대서양 바람에 실려 오는 따뜻한 햇살을 만끽한다. 이 순간 에스프레소의 맛은 여행 중 단연 으뜸이었다. 여행의 피로는 커피 향과 함께 조금씩 사라지는 듯했다.
휴게소를 나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며 흐르는 과디아나 강을 가로지르는 과디아나국제다리(Ponte Internacional do Guadiana)를 건넌다. 이 다리는 두 나라를 잇는 사장교이다. 국경을 넘자 도로는 스페인 안달루시아로 이어지는 Autopista del Quinto Centenario A-49번 고속도로로 바뀌며 스페인 땅으로 들어선다.
우리는 약 1시간 30분가량 달리다가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형성된 밀집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흰색과 붉은색의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에서 유독 구리빛깔의 세비야타워(Torre Sevilla)가 눈에 띈다.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가장 높은 이 타워는 180.5미터에 달하며 40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그렇게 4시간 30분을 달려 안달루시아의 예술, 문화, 금융의 중심 도시 세비야에 도착한다. 과달키비르 강이 흐르는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스페인어 에스파냐(España)와 영어 히스패닉(hispanic) 그리고 세비야(Sevilla)
여기서 잠시 우리는 스페인과 세비야에 관하여 몇 가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특별한 정서와 플라멩코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역사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것들로 한정한다.
제2차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제국은 이베리아 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로마의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이베로 강가에 사는 사람들’, 즉 ‘이베로족’을 지칭하여 ‘이베리아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제2차_포에니_전쟁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는 포르투갈, 아라곤, 까스띠야-레온, 나바르 왕국이 존재했으며, 히스파니아(Hispania)는 이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외부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지칭할 때 두리뭉실하게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까스띠야-아라곤 연합왕국(에스파냐 왕국)이 성립한 이후, 이 용어는 포르투갈을 제외한 에스파냐를 가리키는 용어로 바뀌었다. 일설에 따르면, 히스파니아는 페니키아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의미는 ‘토끼가 많은 땅’이라는 뜻이다. 이는 오늘날 스페인어 '에스파냐' (España)와 영어 '히스패닉' (Hispanic)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히스패닉'이라는 용어는 주로 미국에 거주하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의 인구 조사국에 따르면, 원래 '히스패닉'이라는 용어는 미국 내에서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모든 민족을 지칭하며, 일명 '라티노'라고도 불린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는 미국 내에서 3,500만 명 이상이 '히스패닉' 또는 '라티노'로 분류되었으며, 특히 많은 한인이 거주하는 LA에서는 히스패닉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세비야는 고대 로마 시대에 '히스팔리스'(라틴어: Hispalis)로 불렸고, 무어인 지배 시기에는 "시장이 열리는 곳"이라는 뜻의 아랍어 '이쉬빌리아'(أشبيليّة)로 알려졌다. 레콘키스타 이후에는 다시 라틴어 '히스팔리스'가 사용되었으며, 이후 p가 v로 변하는 음운 변화를 거쳐 현재의 '세비야'(Sevilla)로 정착하게 되었다.
가장 많은 이민족의 자취가 남아있는 도시 세비야
세비야는 고대부터 다양한 이민족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도시이다. 로마 시대에는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되어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이후 서고트 왕국의 일시적인 수도로 기능했다. 712년에는 베르베르인에 의해 정복되었고, 알모하드 조(1130년~1269, 무와히드 조라고도 불림) 시대에는 수도 역할을 했다.
(舊) 알 카사르와 히랄다의 탑은 후대에 개축되었다.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였던 세비야는 중세 그리스도교 양식의 유적이 적은 편이다. 모스크를 파괴한 후 세운 세비야 대성당(Catedral de Sevilla, 15~16세기)은 스페인 후기 고딕 양식의 대표작으로, 세계 최대의 고딕 성당 건축물이다. 모스크를 파괴한 종교적 이유를 떠나, 이 부분은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아무튼 세비야는 신대륙 발견 이후, 식민지 무역의 유럽 진출입 항구로서 번영을 구가하며 예술이 꽃피는 도시로 발전하였다. 17세기에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세비야 미술관에는 수르바란과 무릴료 등 세비야 파의 걸작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특히, 15세기부터 집시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발달한 플라멩코는 19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형태로 확립되었다. 프랑스 작곡가 비제(Georges Bizet)의 오페라 ‘카르멘’은 이곳 세비야의 담배 공장 여공으로, 가난하고 비참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사랑과 자유를 추구하는 집시 여인 카르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시(Gypsy)와 플라멩코(flamenco)
스페인에는 원주민인 이베로족 외에도 3000년 전부터 페니키아, 그리스, 유다, 라틴, 아랍, 집시 등 다양한 민족이 도래하여 여러 인종의 혼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족들의 영향은 스페인 민속음악의 다채로운 엑조티시즘(exoticism으로 잘 드러난다.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의 북쪽 피레네산맥은 자연적으로 유럽 문명의 흐름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제공하였다. 또한, 많은 산맥과 하천에 의해 구분된 각 지방은 특유의 풍속과 전통을 간직하고 있어, 그 지역의 향토 음악이나 무용은 전통적이면서도 개성적이고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집시(Gypsy)는 원래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 지역에서 이동을 시작한 유랑 민족으로, 이후 중국에서 발생한 전쟁을 피해 이집트까지 이르렀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유럽,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현재 집시들이 거주하지 않는 나라로는 그린란드, 일본, 그리고 한국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Romani_people
영국인들은 집시의 고향이 이집트일 것으로 생각하고 "이집트인(Egyptian)"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해 그들을 "집시(Gypsy)"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15세기 보헤미아 왕이 집시들에게 통행권을 부여하면서 "보헤미안(Bohemian)"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대개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국경을 넘나들며 이동했고, 주로 천막이나 포장마차, 동굴 등에서 생활하였다.
유럽에 사는 집시들은 바구니와 목공예품을 팔거나, 타로카드를 이용한 카드점 등을 열어 생계를 유지했으며, 곡예나 음악 연주 같은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랑 생활로 인해 지역사회에 동화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차별과 박해를 받았으며, 정착한 집시들조차 농노로 전락해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종종 "집시처럼"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악마의 상징으로 몰려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화형 또는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집시 박해는 제국주의 팽창기 절정에 달했으며, 나치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동성애자와 집시를 포함시켜 조직적인 박해를 가했다. 현재까지도 집시들은 유럽 전역에서 도둑질, 사기, 유괴, 마약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로 인해 유럽 각국의 추방정책 등이 촉발되며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현대 유럽 사회에서 집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큰 사회 문제로 남아 있다.
플라멩코(Flamenco)는 15세기 중엽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이주한 집시들의 문화와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아랍계 모르족의 문화가 혼합되면서 탄생한 즉흥적인 예술 형태이다. 그 어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불꽃"을 뜻하는 스페인어 flama에서 유래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랍어의 felag (농부)와 mengu (도망자 또는 피난민)를 잘못 발음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안달루시아 집시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플라멩코는 음악에 맞춰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화려한 춤사위를 보여주며, 공연 중간에 들어가는 추임새가 흥을 더해 준다. 이는 한국의 판소리 추임새와 비슷한 방식으로, "올레(Ole, 잘한다)", "보니타(Bonita, 예쁘다)", "구아뽀(Guapó, 멋지다)" 등의 외침으로 무용수들의 열정을 북돋운다.
플라멩코의 공연자들은 각각 고유한 호칭을 지닌다. 남성 무용가는 '바일라오르(Bailaor)', 여성 무용가는 '바일라오라(Bailadora)'라 불리며, 남성 가수는 '칸타오르(Cantaor)', 여성 가수는 '칸타오라(Cantaora)'라고 한다. 기타 반주자는 '토카오르(Tocaor)' 또는 '기타리스타(Guitarista)'로 불리며, 각자의 역할을 통해 플라멩코의 독특한 리듬과 에너지를 표현한다.
플라멩코 공연 EL Patio Sevillano 극장
우리는 도시의 불빛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점차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저녁 무렵에 세비야 파세오 드 크리스토발 콜론 Paseo de Cristóbal Colón 11A 거리에 위치한 플라멩코 극장에 도착한다. 과달키비르 Guadalquivir 강을 끼고 조성된 이 거리는 탐험가 콜럼버스의 이름을 기리며 그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공연장 오른편에는 바이올린을 든 모차르트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LA CIUDAD DE SEVILLA A W. A. MOZART (1791-1991)"라고 적혀 있다. 이를 직역하자면 '세비야시의 모차르트'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문구를 곰곰이 읽다 보니, 연대가 조금 이상해 보인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1756년에 태어나 179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1791년은 그가 사망한 해다. 여기에 1991년까지 적혀 있는 걸 보면, 세비야에서 그의 사후 200주년을 기념하며 세운 기념비임이 분명해 보인다.
아마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의 작곡가 모차르트는 세비야에 자신의 기념비가 세워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스페인에서 전설적으로 전해지던 돈 후안 테노리오라는 캐릭터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그의 유명 오페라 돈 조반니와 피가로의 결혼이, 그가 떠난 지 200년 후에도 세비야의 한 극장 앞에 기념비로 남을 줄은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롯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는 사실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극 삼부작 중 일부를 각색한 작품들이다. 보마르셰의 이야기에서 세비야의 이발사는 첫 번째 이야기로, 롯시니가 오페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피가로는 재치 있는 이발사로 등장하여 주요 인물들의 계획을 돕는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인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피가로가 이발사 일을 그만두고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으로 들어간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이를 모차르트가 오페라로 작곡했다. 이 두 오페라는 동일한 인물 피가로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작곡가에 의해 오페라로 재탄생하며, 유쾌하고 풍자적인 줄거리와 생동감 넘치는 음악을 통해 두고두고 사랑받는 걸작으로 자리 잡았다.
모차르트의 사후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진, ‘피가로의 결혼’ 공연으로 유명한 Teatro de La Maestranza 극장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s://www.teatrodelamaestranza.es/en/
EL Patio Sevillano 공연장은 세비야에서 유서 깊은 플라멩코 전용극장 중 하나로, 과달키비르 강이 흐르는 콜럼버스 거리, 즉 Cristóbal Colón 거리의 Teatro de La Maestranza 극장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특히 모차르트의 사후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며, 피가로의 결혼 같은 고전 오페라가 공연되는 Maestranza 극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EL Patio Sevillano는 1952년 코르티호 엘 구아히로 Cortijo El Guajiro*가 만들어진 해에 설립되었으며, 이후 1956년에 플라자 델 두케로, 1973년에는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60년이 넘는 공연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세비야에는 이곳 외에도 약 20여 개의 전용 공연장이 플라멩코 공연을 펼치고 있어, 이 도시는 플라멩코 예술의 본고장으로서 명성을 자랑한다.
[필자 주]
Cortijo El Guajiro는 세비야에서 유명한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플라멩코 예술의 중심지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장소다. ‘코르티호’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인 스페인 농가나 농촌 스타일의 구조를 가리키며, 이곳의 분위기는 스페인의 전통과 자연미를 살린 무대로 꾸며져 있다.
1952년 설립된 이후, 많은 플라멩코 거장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펼쳤으며, EL Patio Sevillano와 마찬가지로 세비야에서 플라멩코 문화를 대중에게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다양한 춤, 노래, 기타 연주 등 플라멩코의 여러 요소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플라멩코 전용 공연장이다.
이 극장의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s://elpatiosevillano.com/en
세비야를 비롯한 마드릿 바르셀로나 등 플라멩코 공연 티켓 알아보기 http://www.flamencotickets.com
이 플라멩코 전용 극장은 1인당 70유로에 원하는 디너와 음료가 제공되는, Show + Dinner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 위해서 찾은 플라멩코 전용극장이다. 우리는 맥주, 와인, 탄산음료, 샹그리아 중 레드 와인을 주문한다. 샹그리아는 와인에 소다수와 과일을 섞어 만든 칵테일로 스페인식 전통음료란다. 눈과 혀로 스페인을 즐기고 느끼길 원한다면 샹그리아도 괜찮을 듯싶다.
우리는 지정된 자리에 앉아 종업원이 가져온 레드와인을 마시며 목을 축인다. 무대는 화려하지 않아 오직 플라멩코 공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전통적인 무대이다. 여행지 어디를 가나 반드시 나타나는 집시들과 그와 관련된 부정적 이미지와 안달루시아의 플라멩코라는 예술은 분명 집시의 양면성이었다. 하지만 선입견은 버려야 공연에 집중할 수 있다. 집시라고 누구나 마약을 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집시라고 누구나 플라멩코를 추는 것은 아닐 것이니 말이다. 편견을 버리고 플라멩코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집시 예술의 열정을 느낄 때, 비로소 진정한 안달루시아의 밤이 열릴 것이다.
세션마다 달라지는 춤 동작과 얼굴 표정이 참으로 다양하고 역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수는 계속되고 현란한 발구름, 남성 가수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뭔지 모를 감성을 자극한다. 두 명의 기타 연주자의 현란한 손놀림(핑거링)이 기타 줄을 현란하게 오르내린다. ‘바일라오르’(남성무용가)의 단순한 의상에 비하여 붉은색 ‘바일라오라’(여성 무용가) 의상은 절도 있고 끊어지는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춤 동작과 어울려 무용수의 몸에 휘 감기며 매우 정열적으로 느껴진다. 긴 손가락 사이에서 따르륵~따르르륵~ 현란하게 부딪치는 캐스터네츠의 소리는 한순간에 보는 사람의 시각과 청각을 모두 빼앗아 간다.
비제의 ‘카르멘’을 플라멩코로 각색한 공연, flamenco Carmen은 스페인 투우에서 등장하는 마타도르 Matsdor의 칼과, 카포테 (capote 투우사의 붉은 천)까지 동원되며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작은 무대가 꽉 찬 느낌이었다. 카르멘 역할을 맡은 ‘바일라오라’의 연기력 또한 돋보인다. 오페라 ‘카르멘’의 집시여인 카르멘의 모습도 저러했을 것 같다. 집시여서인지 카르멘을 연기하는 플라멩코 무용수 바일라오라의 춤과 노래는 자연스럽고 보기에 편안한 담배공장의 여공인 카르멘을 연기하고 있다.
군무와 독무 등 여러 세션들을 보면서 이들이 온몸으로 풀어내는 특별한 감성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남는다. 깊이는 모르겠으나 흡인력이 있는 장르의 예술임에 틀림없다. 형식미를 중요시하는 고전적인 음악에 익숙한 유럽인들에겐 당연히 큰 흥밋거리였을 것이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 듣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플라멩코만의 특별한 요소는 이네들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노래나 춤이 아닌 자신들의 애환을 감추지 않고 표출하기 위하여 불렀던 노래이고 추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감성적인 춤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노래와 춤에서 영혼의 외로움을 느끼는 동안 공연은 막바지 하이라이트로 치닫고 있었다. 현란한 기교의 발 동작과 기묘하고 힘찬 춤사위로 무대를 압도하는 남성 독무와 절제된 춤사위와 함께 보여주는 간결한 사파테아도(구두 발끝과 발꿈치로 마룻바닥을 치는 기교), 현란한 캐스터네츠, 감성의 절정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여성 독무에 이어 피를 토해내는 듯 구성진 힘 있는 노래와 기타 음악이 어우러지는 군무로 공연을 마무리한다. 관객인 우리는 더 이상 관객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무대의 여성 무용수가 ‘올레!’를 외치며 흥을 돋운다. 그들과 함께 올레를 외치며 마음을 담뿍 뺏긴 공연이 막을 내린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리듬과 선율, 그래서 더욱 외로운 음악과 춤 플라멩코, 그들의 음악과 춤은 그들의 유랑 생활만큼이나 자유로웠으며 지독한 외로움과 애환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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