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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아의 정열, 세비야의 아침

by 조영환

여행의 계절, 다시 걷는 스페인-안달루시아의 정열, 세비야의 아침 La mañana de Sevilla 스페인 광장 Spain Plaza in Seville



안달루시아의 정열, 세비야의 아침 La mañana de Sevilla


호텔에서 04시 20분 눈을 뜬다. 세비야 타워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산루카르 라 마요르에 있는 그랜 호텔 솔루카루 Exe Gran Hotel Solucar, Sanlúcar la Mayor이다. 창밖은 아직 어둡다. 아침 8시는 되어야 뜨는 이곳의 잠꾸러기 해는 아직 붉은빛을 드러내려면 한참 남은 셈이다. 어제의 고된 일정으로 잠을 더 잘 법도 한데,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니 무슨 조화 속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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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소파에 몸을 기대어 숙소를 둘러본다. 어제 둘러본 여행지의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그곳에 남겨두고 온 여운을 되새겨본다. 노트북을 열고 자판을 탁탁거리며 어제의 여행 기록과 단상들을 메모해 나간다.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지만 잠귀가 밝은 아내에겐 채 5분을 넘기지 못한다. 한국에서 보내온 이런저런 문자 소식들을 뒤적거리며 챙겨야 될 소식은 없는지 체크한다. 아내도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진홍색 소파에 마주 앉은 우리는 서로 몸은 괜찮으냐? 물으며,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노트북 자판을 탁탁거리며, 아직 어둠에 잠긴 세비야에서의 아침을 그렇게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필자의 세비야의 아침이었다.

안달루시아의 정열, 세비야의 아침 La mañana de Sevilla은 어떨까?

호텔 주변을 걸으며 세비야의 아침을 살펴본다. 낯선 여행지에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아침 산책을 즐기는 편인 필자에게 이 시간은 여행 중 그 어느 시간보다 즐거운 시간이다.


세비야의 아침은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도시의 아침은 부드러운 햇살과 함께 시작되어, 온화한 공기가 거리를 가득 메우면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활기차게 움직이며, 카페에서는 커피와 함께 아침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세비야의 아침은 고요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시간이다. 거리마다 파는 신선한 과일과 빵의 향기가 퍼지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 상인들이 가게 문을 여는 모습이 도시의 일상을 알려준다. 특히, 플라멩코의 본고장인 이곳에서는 아침부터 음악과 함께하는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아침의 세비야를 거닐다 보면, 사람들의 미소와 친절한 인사, 그리고 도시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 도시는 아침부터 방문객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세비야의 아침은 그런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 도시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우리의 여정은 포르투갈에서 다시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이른 새벽, 까보 다 호까 CABO DA ROCA에서 대서양을 가르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여행을 시작한 우리, 벨렘 역사 지구로 이동해, 웅장한 벨렘탑과 제로니모스 수도원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 속에 잠시 머물렀다. 국경을 넘어 안달루시아 예술, 문화, 금융의 중심지 세비야 Sevilla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른 새벽 대서양을 바라보며 시작한 여행은 세비야 현지의 열정적인 플라멩코 공연을 관람하며 마무리한 셈이었다.


181229764_Exe_Gran_Hotel_Solucar.jpg 출처 https://www.booking.com/Share-fvZ5kh


우리가 묵은 방은 마치 다락방 같았다. 일반적인 정방형의 방이 아니고 창 쪽으로 좁아지는 마름모형의 아늑한 방이다. 사진을 남기지 못했는데, 호텔 홈페이지 갤러리에 우리가 묵은 방의 사진이 올라와 있어 캡처해 두었다. 침대와 소파가 모두 진홍색인, 꽤나 강렬하고 인상적인, 침대 머리맡에 그림이 세 점이나 걸려있는, 안달루시아 다운 인상으로 남은 호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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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조식, 크루아상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망설임 없이 새벽어둠을 걷어내며 달린다. 이런저런 안내사항을 종달새 지저귀듯 풀어놓지만 귀에 들어오진 않는다. 사람들은 부족한 잠을 청하는지 어둠이 걷히지 않은 버스 안은 가끔 불편한 듯 내뱉는 헛기침 소리만이 이리저리 부딪친다. 차창 밖 올리브나무의 검은 그림자들이 두런거리며 차례대로 지나간다. 아직은 새벽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인가의 불빛들은 부스스 눈을 비비며 낯선 이방인의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 두리번거리는 여행자의 시선은 이내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쫓는다. 하늘에선 별빛이 쏟아진다. 희붐하니 새벽을 걷어내고 제 할 일을 다 한양 힘차게 태양을 지평선 위로 밀어 올리곤 이내 붉은 태양빛 뒤로 숨어버린다. 고만고만 자리한 붉은 기와지붕 위로 붉은빛이 쏟아져 내리는 세비야는 지금 09시이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품은 세비야의 아침은 이렇게 우리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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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스페인 세비야

B) 스페인 광장

C) Plaza de toros de la Real Maestranza de Caballería de Sevilla

D) 세비야 대성당

E) 스페인 41004 Sevilla, Patio de Banderas, 알카사르




대항해시대, 한때 전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안달루시아의 정열, 세비야


500여 년 전 유럽 사회에서 아시아에 관한 지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책과 함께, 신부와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을 통해 유럽인들은 동쪽으로 계속 가면 인도, 일본, 한국과 같은 동방의 땅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탈리아의 젊은 탐험가 콜럼버스는 오랜 연구와 고심 끝에 "서쪽으로 두 달만 항해하면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 항로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가는 포르투갈의 항로보다 더 짧고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미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서쪽 항로를 통해 동방으로 가는 방법이 포르투갈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길이라 여겼다. 이러한 판단 아래 콜럼버스는 치밀하게 항해도를 작성하고 계산을 거듭하며 확신을 다졌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의 유력 귀족과 왕족을 만나 후원을 구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계획은 번번이 거절당했고, 그는 수도원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매진했다. 그러던 중 수도원의 신부가 그를 이사벨 여왕에게 다시 소개하게 되었고, 그는 여왕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상세히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왕실 소속 학자들의 철저한 검토 끝에 여전히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이사벨 여왕은 개인적인 후원을 결심했다. 그렇게 석 달 열흘 만에 출항한 그는, 결국 평생 인도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대륙 아메리카 땅을 밟는다. 결과적으로 인도 항로를 개척하려다 삼천포로 빠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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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는 왜 인도로 가려했을까? 아메리카 대륙을 왜 인도라 믿었을까?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려했던 이유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 간의 교역은 육로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오스만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를 정복한 후 중동과 동유럽 지역과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전통적인 교역로였던 실크로드가 막히거나 비용이 증가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유럽 각국은 아시아의 풍부한 향신료, 비단, 도자기 등을 직거래할 수 있는 해상 경로를 찾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시작된 신항로 개척은 유럽 중심의 세계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질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답변 중 하나가 바로 후추이다. 15세기말 당시 후추는 금과 맞먹을 만큼 귀중한 향신료로, 유럽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고기를 구워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동서 교역을 통해 아시아에서 들여온 후추가 가미되면서 음식의 풍미가 새롭게 변화했다. 후추 특유의 향과 매운맛은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후추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의 상류층과 중산층 사이에서 후추가 귀한 조미료로 자리 잡으면서, 이를 직수입하기 위한 새로운 무역로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만약, 후추를 대량으로 구할 수만 있다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이런 이유로 콜럼버스와 같은 탐험가들이 직접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으며, 이는 결국 신대륙 발견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여러 차례 항해를 하고도 여전히 신대륙을 인도라 믿었던 이유는 그의 고정관념과 아시아에 대한 열망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유럽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지리적 이해는 매우 부족했다. 그가 발견한 땅에는 인도 특유의 후추와 같은 향신료가 없었고, 대신 잉카, 아즈텍, 마야 문명이 번성했던 지역으로, 현재 중남미 대륙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는 이를 인정하기 어려워했다.


콜럼버스의 탐험과 항해는 유럽의 지리적 지식이 제한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는 자신이 세운 이론과 목적에 대한 확신이 강했다. 그가 만난 원주민들과 독특한 환경 역시 그의 이론을 뒤흔들 수는 없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한 부를 얻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고, 콜럼버스 역시 인도를 찾아내겠다는 사명감을 안고 항해를 시작했기 때문에, 현실과 그의 기대가 다르더라도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항해 중 도달한 카리브해의 섬들은 그가 인도에 도착했다고 생각할 만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의 풍부한 자연환경, 독특한 식물과 동물, 그리고 현지인들의 모습이 그가 상상한 "동방 인도"와 일치한다고 여겼다. 또한, 그는 이미 인도에 도달했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후 여러 차례의 항해에서도 이 믿음을 유지하며 신대륙이 아닌 인도 일부에 도달했다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해에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의 이슬람 잔류 세력을 몰아내고 오늘날 스페인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그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1492년 세비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스페인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의미 있는 도시이다. 세비야는 남미 식민지를 개척하고 아즈텍과 마야와 잉카의 황금과 은이 과달키비르 강을 통하여 들어오면서부터 이목이 집중되는 도시다. 식민지 개척을 위한 배들이 바로 이곳 세비야의 과달키비르 Guadalquivir 강 하구에서 떠났고, 돌아올 때도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이사벨 여왕의 환송을 받으며 떠났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돌아온 곳도 바로 이곳 과달키비르 강이다. 말하자면 이곳 세비야는 남미 식민지 개척의 전초기지이자 아메리카 교역의 중심 도시인 셈이다. 모든 유럽으로 들어가는 무역선과 식민지로 나가는 배들의 진출입항이었던 세비야는 교역에 따른 무역 수수료 등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대항해시대, 한때 전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였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특유의 정서와 함께 풍요로운 번영을 이룩하며 독창적인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집시들이 전통적으로 춤추던 플라멩코는 세비야 사람들의 열정과 자유로운 삶의 방식과 어우러지며 예술로서의 경지에 이르렀다. 세비야의 활기찬 분위기는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롯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바람둥이 귀족 돈 후안을 이야기한 돈 지오반니, 그리고 미천한 신분이지만 자유로웠던 집시여인의 영혼과 사랑을 노래한 비제의 카르멘 등 많은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활발하고 역동적이었던 당시 세비야의 풍광들과 어우러진 세비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은 음악가들의 창작의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세비야의 열정적이고 개방적인 생활상을 반영하며 예술적 혼을 불어넣었다.


또한 세비야는 스페인의 3대 화가 중 하나로 꼽히는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고향이며,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무리요 역시 이곳에서 태어나 창작의 황금기를 보냈다. 세비야의 예술적 풍경은 그림과 음악, 문학의 융합을 통해 세비야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며 오늘날까지도 예술의 도시로 기억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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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비야 타워 Torre Sevilla를 지나 과거 대항해시대의 중심도시로 역사적인 사건들을 지켜봤던, 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형성된 안달루시아의 정열, 세비야 시내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세비야의 이발사’를 추억하며 ‘피가로의 결혼’을 골목 어귀의 허름한 식당 간판으로 사용하는 세비야 사람들의 삶이 짙게 배어 있는 세비야 시내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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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플라멩코 공연을 봤던 EL Patio Sevillano 공연장 옆으로 흰색 벽체에 황금색 몰딩으로 마감한 투우장의 파사드 모습이 과거 이네들의 영광을 말해주듯 금박으로 덮인 흰 벽을 더욱 돋보이게 드러낸다. 1761년에 지은 바로크 양식의 왕립 마에스트란사 투우장 Plaza de toros de la Real Maestranza de Caballería de Sevilla이다. 투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비야대성당 Seville Catedral이 있고 13세기 군사 망루였던 황금의 탑 Torre del Oro 또한 과달키비르 강가에 있다. 알카사르 왕궁 Alcázar, 카를로스 5세의 궁전, 세비야 대학, 스페인광장 Plaza de España 등 우리가 오늘 둘러볼 곳이 거의 이곳 투우장을 중심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변에 밀집되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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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키비르 강변 상업 지구의 세비야 타워가 푸른 하늘로 솟구친다. 세비야 타워에 부딪친 햇빛이 반사되어 부서진다. 92년도에 세비야 세계박람회 Seville Expo '92가 이곳 과달키비르 강 까르투하 ISLA DE LA CARTUJA에서 열렸다. 오페라 카르멘의 배경이었던 세비야의 담배공장, 지금은 세비야 법대가 입주해 있는 건물을 지나 스페인 광장에 다다른다.



스페인 광장 Spain Plaza in Seville


우리는 마리아 루이사 공원 Parque de María Luisa에 인접해 있으며, 대성당 동쪽으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세비야의 가장 인상적인 장소 스페인 광장으로 들어선다. 1929년에 세비야에서 열린 에스파냐-라틴아메리카 박람회를 치르기 위하여 건축가 아니발 곤살레스 Anibal Gonzalez의 설계로 지은 스페인 광장이다. 입구로 들어서는 육중한 출입문과 계단실, 외벽 모두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아줄레주 Azulejo(타일 그림, 타일 장식)는 이슬람인들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이다. 이슬람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세비야다운 건축물이다. 주 출입 현관의 타일 그림과 장식들, 그 자체가 예술이다.

20221208_003320_세비야_스페인광장_구글위성지도_캡쳐.jpg 세비야광장_Google 위성지도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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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_101328.jpg 스페인 광장을 설계한 아니발 곤잘레스 (Aníbal González)


세비야까지 오면서 봐 왔던 여러 광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중세나 그 이전에 형성된 기존 광장들은 사각 형태의 광장이었다.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은 원형이다. 널따란 광장 가운데 배치한 중앙 분수대와 해자처럼 둥그렇게 흐르는 인공 호수, 그 위를 원형 아치교를 설치하였다. 회랑과 광장의 높낮이, 원형 아치교와 중앙 분수대 광장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입체적으로 설계된 광장이다. 그러면서 이네들이 의도한 바를 쉽게 알 수 있는 중앙 집중식의 광장이었다. 건축물 전체의 색감은 붉은색 톤이다. 건축물과 회랑, 50개 주의 부스, 광장 모두가 붉은색 톤으로 처리되어 통일감과 안정감을 극대화한 광장의 모습이다. 4개의 다리로 상징되는 4개의 왕국의 통합과 중앙집권의 강화를 모색하는 스페인 정부의 생각을 무리 없이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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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중앙을 기점으로 정확히 좌우 대칭인 건축물이다. 광장으로 향한 둥근 반원형 벽면을 따라 스페인의 50개 주를 상징하는 부스가 마련돼 있다. 부스의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는 그 주의 대표적인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아줄레주로 잘 표현해 놓았다. 그림 상단에 주를 상징하는 기로 쓰이는 문장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우리는 1492년 아람브라를 점령하며 레콩키스타 Reconquista의 결말을 보는 이사벨 여왕이 항복을 받는 장면이 그려진 그라나다 와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후 원주민과 함께 돌아와 이사벨 여왕을 알현하였던 바르셀로나, 부르고스 등 몇 개의 주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다.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한 아줄레주이다. 카스티야 레온 부스 앞 노점상에서 플라멩코 춤을 추는 여인의 그림을 20유로에 팔고 있다. 바르셀로나 부스 앞에선 집시 여인이 플라멩코 소품으로 보이는 부채와 캐스터네츠 따위를 광장 바닥에 펼쳐놓고 팔고 있다. 나는 코르도바 외 몇 개의 부스를 더 관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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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겨울의 햇볕 속에 스페인 광장은 활기로 가득 차 있다. 호수 옆 화단의 형형색색 꽃들은 한겨울에도 여전히 만개해 있고, 아내는 꽃을 감상하며 즐거워한다. 그 순간, 중국인 관광객들이 광장에 들어서며 그 특유의 말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이가 든 외국인 부부는 카메라를 삼각대에 올려 거리를 맞추고 있고, 타일로 장식된 부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그들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 이곳에도 역시 집시들이 관광객들 옆을 서성이며 관심을 끌기 위해 이야기를 걸고 있다.


붉은 핑크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전형적인 스페인 여인이 붉은 바지와 하늘색 남방, 검은 재킷을 입은 사내의 손을 잡고 광장을 가로질러 걷는다. 그 모습은 안달루시아 특유의 열정을 잘 드러낸다. 계단에 앉아 붉은 깃발을 펼치며 무언가 설명하는 안달루시아 소년, 그 주변에서 스페인 광장의 풍경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 젊은 커플,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함께 웃고 떠드는 모습은 광장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만든다.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얽히고설키며 형성된 이 공간은 세비야의 문화와 정서를 느끼게 하는 한편,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물하고 있다.



중앙 현관의 아치 너머로 보이는 중앙 분수대에서는 아침부터 물줄기가 힘차게 솟아오른다. 분수대가 자리한 광장 바닥은 수도 없이 많은 작은 돌들이 모자이크처럼 박혀 화려한 문양을 자아내고, 이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여행의 순간에 깊이 빠져든 모습이다. 광장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평화롭다. 우리는 완전 좌우대칭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정부청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다. 분수대 하얀 물줄기가 힘차게 솟구친다. 해가 진 뜨거운 여름날 저녁에 야간조명과 함께 이 광장을 본다면 또 다른 느낌의 광장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안달루시아 전통 복장의 여인들이 금방이라도 나타나 정열적인 플라멩코를 추며 시끌벅적 축제를 즐길 것 같은 분위기다.



섹시한 붉은 원피스를 입은 김태희가 플라멩코를 추며 나타날 것 같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한가인이 뛰어나올 것 같은 이곳, 그래서인지 한국관광객들은 드라마의 장면을 연상하며, 드라마 속의 주인공인 된 것처럼 유난히 많이들 부스 앞 광장에 사진을 찍는다. 아마도 그녀들을 베끼고 있는 모양이다.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2 클론의 습격’ 도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한다. 호수에 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름에는 배를 타는 사람들로 서로 엉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노 젓는 가족과 연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 스페인 광장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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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형 다리 밑 벤치에 검은색 민소매티셔츠에 간편한 청바지 차림의 금발 소녀가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앉아있다. 그리 춥지 않은 이곳의 겨울 풍경이다. 자전거를 타고 나온 시민은 여행객들 무리 속으로 눈을 돌리며 이방인들을 바라본다. 색소폰과 팬플룻 2중주 연주 소리가 광장으로 울려 퍼진다. 우리 귀에 익숙한 한국 가요를 연주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 관광객이 온 것을 알아차렸거나 한국인 관광객들이 그만큼 이곳을 많이들 찾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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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건물은 현재 세비야 주의 정부청사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로 치면 도청에 해당되는 관공서란 얘기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도청(?), 우리로선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시청, 도청이든 청사 신축에 엄청난 돈을 들여 지으면서 시민들 휴게 공간 제대로 하나 없는 몰인성, 몰개성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과 배치되는, 감성 없는 그저 그런 건물을 지어놓고 지자체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느니, 부채가 얼마라느니 한심한 얘기들만 나오는 현실이 안타깝다. 통계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스페인을 찾는 관광객의 숫자가 연간 6천만 명이 넘는 모양이다. 이네들이 그렇다고 뭐 꽤나 친절한 국민성을 지녔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친절로 무장을 한 사람들은 아닌 듯싶은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관광 수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셈이다. 관광자원도 되고 정부청사 건물로도 쓰고 이건 뭐, 제대로 꿩 먹고 알 먹고 있는 세비야 스페인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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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청사 사무실 공간을 들여다보니 여유롭고 깨끗하다. 은은한 간접조명으로 근무 피로도도 최소화한 있을 건 다 있는 사무실이다. 사무실 안에서 근무하는 키가 훤칠한 남자가 사진은 찍지 말라는 표정을 짓는다. 일하는 공간이 뭐 그다지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널찍하고 여유로운 사무실 분위기다. 외무부 외국인 등록 사무소 앞으로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외국인 거주 증서 때문에 기다리는 외국인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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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을 따라 걷는다. 균일한 육각형 모양의 천장 문양이 아치형 회랑을 따라 이어진다. 아름답다. 그냥 아름답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간편한 티셔츠, 남방 차림의 젊은 연인들이 아름다운 타일로 장식된 다리 난간에 매달려 한가로이 호수 위를 바라본다. 광장 외진 구석 붉은 담벼락에 사람들의 이름이 낙서되어 있다. ‘YAYA, YAYO, PACO, JOSE’ 등등 한국 사람 이름은 없다. 이곳에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낙서로 남긴 사람들의 이름이나 별명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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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청사로 사용하는 건물 회랑, 중앙광장 분수대와 호수, 그 위로 50개 주의 부스가 마련된 공간, 그리고 2층 구조의 건물과 가지런한 아치형 회랑과 맞물려 반원형으로 돌아가는 선과 면, 보는 이에게도 편안하고 눈에 거슬리지 않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성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건축물임을 새삼 느낀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관광객을 태우고 분수가 올라오는 광장 여기저기를 다녀야 할 노란색 마차는 마리아 루이사 공원 앞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앞에선 우리 친구 고 박사 부부는 뭘 찍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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