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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

by 조영환

론다를 떠나 그라나다로 (dejamos Rhonda y nos mudamos a Granada)


론다의 누에보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로 발을 들인다. 이곳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소설적 영감을 준 풍경을 품고 있다. 론다의 신시가지로 들어서며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타바스 바 '라 타베르나 La Taberna '의 흔적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그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글로 옮겼을까? 현실과 허구가 교차하던 그의 시간이 이 도시의 풍경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신 시가지 거리엔 작은 타바스 바들이 눈에 띈다. 헤밍웨이가 이런 곳에 앉아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소설의 영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간소하지만 깊은 맛이 담긴 타바스처럼, 그의 이야기도 그렇게 현실의 단면들을 하나씩 쌓아 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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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가지는 안경점, Los candiles, El Bandolero, 피자집, 지중해 요릿집 Menson Rondeno, 커피숍, Los Cristales 등 고만고만한 크고 작은 식당과 가게들이 밀집되어 있는 거리다. 이중 우리는 Parking Plaza Del Socorro 앞에 있는 엘 반돌레로(El Bandolero) 식당으로 들어간다. 와인을 곁들여 스페인의 정취가 가득 담긴 엔트레코트(entrecot)와 고구마 같은 구운 감자요리, 새우와 야채샐러드, 갓 구워낸 빵으로 맛있는 식사를 즐기며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론다에서 오찬을 즐긴다. 커피 맛이 나는 티라미수 Tiramisú 와 커피로 후식까지 챙겨 먹으며 유서 깊은 론다에서 스페인을 맛으로 즐기는 시간이었다.


점심으로 맛본 엔트레코트(Entrecôte)는 프랑스어로 "갈비 사이"를 뜻하며, 소고기의 갈비뼈와 등뼈 사이에서 얻은 부드럽고 풍미 깊은 부위를 가리킨다. 리브아이(ribeye)와 유사한 이 부위는 풍부한 마블링과 촉촉한 육즙 덕분에 한 입 한 입이 입맛을 자극했다. 부드러운 식감과 진한 고기 맛은 와인과 함께할 때 더욱 빛을 발했으며, 단순한 점심 식사를 특별한 미식 경험으로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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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를 바라보고 있느 청동 조각상, 2007년 조각가 Paco Perra의 작품_블라스 인판테 페레스 데 바르가스 (Blas Infante Pérez de Vargas, 1885-1936) 스페인의 안달루시스트 정치가, 안달루시아 민족주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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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Parkhaus ronda 공원을 둘러보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따스한 햇볕 아래 공원을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소리가 있는 곳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인지 부모들도 안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공원이다. 골목에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 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이지 싶다. 어렸을 적 좁은 골목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스페인 론다 거리에서 떠오를지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아이들 노는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을 보니 이제 서서히 익어가는 나이가 되어 가는가 싶고, 이제 두 돌이 지난 손주 얼굴도 떠오르는 론다에서의 달달한 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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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들른 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남긴다. 눈앞에 익숙한 로고가 들어온다. 기아자동차가 캐리어에 실려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기아차 주주도 아닌데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다시 차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니 길은 점점 구불구불해지고, 주변 풍경은 산악지대로 변한다. 아마도 시에라네바다산맥 어디쯤일 것이다. 초록빛 산세와 고즈넉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길에서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그라나다 Granada



론다에서 점심 식사를 한 우리는 이제 론다를 떠나, 이슬람 제국 사람들이 카스티야 정벌군을 피하여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그라나다 Granada로 향한다. 집시들이 사는 토굴들이 도로변 산 능선을 따라 즐비하다. 이곳 안달루시아 지방은 여름 더위가 가히 살인적이라 한다. 집시들이 토굴에서 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라면 현명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스페인 남동쪽의 그라나다 경계지역인 시에라네바다 Sierra Nevada 산맥 중턱은 가장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여름 더위는 혼이 빠질 지경이란다. 우리가 방문한 1월 초순은 아마도 이곳을 찾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인지 모르겠다.



이베리아반도에서 패퇴를 거듭하던 이슬람 세력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중 일부가 그라나다에 이르러 정착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를 이루었다. 이들이 바로 알람브라궁전의 주인인 나스리드(Nasrid) 왕조다. 영어식 발음으로는 ‘나스리드’라 불리지만, 필자는 스페인어 발음인 ‘나쓰르(Nazarí)’로 표현하기로 한다. 참고로, 아랍어로는 ‘바누 나쉬르(بنو نصر)’ 또는 ‘바누 알-아히마르(بنو الأحمر)’로 읽으며, 튀르키예에서는 ‘나자렛’으로 발음된다.


시간이 흐르며 나스리드 왕국의 존재가 점차 알려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이슬람인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해발 740m의 고원, 이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떠돌던 삶의 끝에서 이곳을 새로운 안식처로 삼으려는 희망을 품었을까, 아니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혔을까?



“아, 바로 이곳이다. 더는 갈 곳이 없다. 방어에 이만한 장소가 또 있을까?”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그라나다에 처음 왕조를 세운 무함마드 1세는 이 도시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을까? 그라나다의 풍경 속에는 이 모든 감정, 그들의 복잡한 심정이 아직도 어른거리는 듯하다.


아무튼 나쓰르 왕조는 이베리아반도 남쪽 끝 안달루시아 시에라네바다산맥 중턱의 알람브라궁전에서 1230년부터 1492년까지 그라나다 나쓰르 토후국으로 마지막 통치자 무함마드 12세 Muhammad XII까지 그라나다 지배하는 왕조였다.



알람브라 궁전 La Alhambra


알람브라(아랍어: الحمراء, 스페인어: Alhambra)는 "붉다"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로 궁전과 성곽이 함께 만들어진 복합적인 성채를 의미한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이다. 우리말로 알함브라궁전이라 쓰고 읽었던 기억이 많지만, 아랍어가 스페인어로 굳어져서 쓰이고 있는 Alhambra를 영문 식으로 알함브라로 읽은 때문이다. 스페인어에서 h가 묵음이므로 "알람브라"라 읽는 것이 바르게 읽고 쓰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로 옮겼을 때 공식 명칭은 알함브라 궁전이 아닌 알람브라 궁전이 옳게 쓰고 읽는 것으로, 필자는 이 여행기에서 알람브라로 쓴다.



알람브라궁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베리아반도의 역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랍인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8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711년, 아프리카 북부에서 바다를 건너온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입하며 가톨릭 문화가 자리 잡고 있던 지역을 차례로 점령했다.


무어인들은 현재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는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 남아 있던 유일한 가톨릭 국가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제외하고 이베리아반도 전역을 지배했다. 이로써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반도 전역을 차지하며 유럽에서 강력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 무어인들은 코르도바에 요새를 건설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한편, 이베리아반도 북부로 밀려난 가톨릭 세력은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이베리아반도를 되찾기 위한 국토회복운동, 즉 레콘키스타(Reconquista)를 시작했다.


레콘키스타는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에 걸쳐 이어졌다.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이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 기나긴 싸움은 결국 1492년, 까스띠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를 함락하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레콘키스타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1세가 깐따브리아 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레온 지역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레온 왕국은 알폰소 3세(재위 866년~910년) 시기에 두에로 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0세기부터는 나바라 왕국이 레콘키스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1세기 싼초 3세 대왕 시기에 이르러 강대한 국가로 성장했다. 싼초 3세는 까스띠야 백작령, 아라곤 백작령, 레온 왕국을 정복하며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나바라 왕국은 세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장남 싼초 가르시아 3세는 나바라 왕국을, 차남 페르난도 1세는 까스띠야 왕국을, 서자 라미로 1세는 아라곤 왕국을 각각 물려받았다.


이후 나바라 왕국은 점차 약소국으로 전락했으며, 레콘키스타의 주도권은 까스띠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이어받았다. 1234년 나바라 왕국은 프랑스에 복속되어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고, 나바라 지방은 오랫동안 프랑스 영토로 남았다. 1515년, 까스띠야와 아라곤의 군주를 겸하고 있던 페르난도는 자신을 나바라 왕국의 군주로 선언하며 1516년 나바라 지방을 스페인에 복속시켰다.


한편, 이슬람 세력은 내부의 반란과 가톨릭 국가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차 쇠퇴했다. 1037년 후 우마이야 왕조가 패망한 후, 이슬람 지배 지역은 타이파(소규모 독립 왕국)들로 분열되었다. 이후 모로코를 중심으로 한 알모라비드 왕조가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며 타이파들을 복속시켰지만, 1147년 알모라비드 왕조가 알모하드 왕조에 의해 패망한 뒤 이슬람 지배 지역은 다시 타이파들에 의해 나뉘었다.


이러한 분열은 그라나다 왕국이 1492년 에스파냐에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레콘키스타의 결과로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통치는 종식되었고, 오늘날 스페인의 영토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1469년, 아라곤 왕국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 2세와 까스띠야 왕국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이 결혼하면서 두 나라는 아라곤-까스띠야 공동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이 공동 왕국은 '에스파냐'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본격적인 통일 왕국의 길을 걷게 된다.


1478년에는 카나리아 제도를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하였고, 1492년 1월 2일에는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를 함락시키며 레콘키스타를 완전히 마무리했다. 이로써 781년에 걸친 이베리아반도 내 이슬람 통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같은 해, 1492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에스파냐가 신대륙으로 진출하며 세계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라나다를 정복한 에스파냐는 '알람브라 칙령'을 반포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전격 추방하였다. 이로써 종교적 통합을 꾀한 에스파냐는 가톨릭 왕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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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 궁전 입구에 설치된 동으로 만든 모형도를 바라보며 건축 과정을 설명 듣는 동안, 의문이 떠올랐다. 당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방법과 자재로 이 웅장한 궁전을 지었을까? 이곳 주변에는 큰 암석이나 목재가 풍부하지 않다. 온통 붉은 흙으로 덮인 이 땅에서 거대한 성채를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직접 흙을 한 줌 손에 넣어 비벼 본다. 잘게 부서진 돌과 흙이 적당히 섞인 독특한 질감이 느껴진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들녘의 붉은 토양을 떠올린다. 휴게소 근처 농가에서도 땅은 온통 붉은빛이 돌았다. 그곳에서 흙을 손에 담아 살펴본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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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흘러 무너지고 닳아 없어진 궁전의 벽과 타워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붉은빛 진흙과 자갈이 섞인 점토벽돌로 쌓아 올린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 이슬람 장인들은 주변에서 풍부하게 구할 수 있는 자재를 활용할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흙과 크고 작은 돌이 섞인 점토질은 이 지역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었고, 이들이 이상적인 재료임을 발견했으리라.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사용된 건축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거푸집을 사용하여 콘크리트 건물을 짓는 방식과 매우 유사했다. 진흙을 반죽해 거푸집에 채워 넣고, 각재로 고정하여 벽을 쌓아가는 방식은, 현대 건축에서 콘크리트를 부어 넣는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원리였다. 비록 시대와 재료는 달랐지만, 기본적인 구조적 접근법은 거의 같았다.


이런 방식은 건축 자재가 제한된 환경에서도 효율적으로 거대한 구조물을 세울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알람브라 궁전과 같은 장대한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지혜와 노력이 아니었다면, 붉은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이 땅에 웅장한 알람브라 궁전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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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난관은 이슬람 문화에서 청결을 중요시하는 물 문제였다. 궁전과 그 주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식수와 농업용수 공급은 중요한 과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씨에라네바다 Sierra Nevada 산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씨에라네바다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하며,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는 설산이다. 이 산맥에서 수로를 뚫어 물을 공급함으로써 그라나다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씨에라네바다의 이름은 스페인어로 ‘눈으로 덮인 산자락’을 뜻하는데, 이 지역의 자연환경을 잘 설명하는 말이다.


스페인어에서 "Sierra"는 대개 산맥을 칭하는 Montanas보다는 작은 산악지대를 일컬으므로 구릉지대와 산맥의 중간 정도로 산이라 한다. 론다와 미하스, 말라가를 거쳐 이곳으로 오면서 크고 작은 산을 넘었는데 구글 지도를 살펴보니 산 이름 앞에 모두 ‘씨에라’가 붙어 있었다. 씨에라네바다산에는 유럽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스키장이 지중해를 끼고 위치하고 있어 겨울스포츠인 스키와 말라가 해변의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전 세계 몇 안 되는 관광지이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그라나다는 매년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인기 있는 휴양지로 자리 잡았다.


아무튼 씨에라네바다 설산에서 이들은 어떻게 물을 끌고 왔을까?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자재들이 없었던 13세기였다. 13세기 초 당시의 토목 기술로 언덕에는 높이 2미터 너비 1미터의 터널을 뚫고, 계곡에는 수로를 얹기 위한 다리를 놓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물길을 확보하여 궁전으로 공급하여 약 오천여 명의 사람들이 궁성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로울 지경이다. 궁정 여기저기로 물은 흐르고 있었으며 물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런데 궁전 어디에도 고여 있는 물은 없다.


무어인들의 물 다루는 기술은 참으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알람브라 궁전을 둘러보면서 그들의 뛰어난 수리 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전 내부의 정원과 연못, 그리고 그라나다 전역을 연결하는 복잡한 수로망은 무어인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저장하고, 분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여 궁전과 도시의 생활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동시에, 물의 흐름을 통해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들을 만들어냈다. 가압펌프가 없던 그 시절에 말이다.


물의 흐름을 정밀하게 제어하고 관리하는 기술 없이는 당시처럼 복잡한 수로망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그라나다와 같은 도시에서는 물이 중요한 자원이었고, 무어인들은 이를 매우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의 수리 기술은 단순히 실용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 문화에서 물이 가진 신성함과 청결의 의미를 잘 반영한 것이었다.


이슬람 문화에서 물은 단순한 자원을 넘어, 신성하고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요소였기에, 무어인들의 물 다루는 기술은 건축뿐만 아니라 문명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람브라 궁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독창적이고 실용적인 수리 기술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당시의 과학적 사고와 창의적인 접근은 유럽의 건축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었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기술들은 단순히 한 시대의 성취에 그치지 않고, 후대 건축과 문명에 큰 유산을 남긴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들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건축가와 학자들에게 귀중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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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꽃과 나무로 꾸며져 있는 정원은 당시 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을 얻기 위한 밭으로 농사를 지었던 농토였다. 정원의 연못에도 계속 물이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간다. 흐르는 깨끗한 물은 이슬람교의 청렴함을 상징한다. 또한, 물을 계속 흐르게 설계했던 이유는 외적이 수원에 독극물을 풀어 공격할 가능성으로부터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못에는 물고기를 키워 물에 오염을 감지하는 장치를 갖추었고 성곽 밖으로 배수를 완벽히 함으로써 완벽한 안전을 확보하면서 물을 풍부히 사용하였다 한다. 지금도 당시의 대부분의 관개시설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니, 이들의 물 다루는 솜씨에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물이 귀한 사막 출신의 선조들의 지혜를 이어받은 후손인 무어인, 이들은 생득적으로 물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지극히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단순한 장식이나 화려함을 넘어서, 무어인들의 지혜와 실용적인 접근, 그리고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기술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그들의 비범한 기술은 궁전 곳곳에 숨겨져 있으며, 그 특유의 예술적 감각이 공간을 더욱 독특하고 신비롭게 만들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건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철학과 문화적 깊이가 녹아 있는 공간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는 전 세계인들을 매혹시키며, 알람브라는 여전히 그들의 뛰어난 기술과 예술적 유산을 전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알까사바 Alcaza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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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 궁전은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함마드 1세의 나쓰르 왕조는 최후의 보루로 1238년부터 나쓰르 궁 (후일 알람브라궁 )을 짓기 시작한다. 그것도 방어하기 좋은 산 중턱 높은 언덕 위 제일 앞쪽에 성을 방어할 수 있는 요새와 타워 즉, 알까사바 Alcazaba부터 짓기 시작한다. 왕조가 머물 궁전 나자리에 Nazarie보다 방어를 위한 요새부터 짓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가톨릭 군대를 피해 이곳 그라나다까지 도망쳐왔던 나쓰르 왕조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고 지긋지긋 몸서리 처질 지경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알까사바에 올라 그라나다를 내려다보니, 왜 이곳에 성을 지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알람브라는 가톨릭 군대의 위협을 피하고자 지어진 성이었기에, 그라나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의 지형은 요새로서 최적의 위치를 제공했다. 성곽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13개의 타워는 경비초소로서 방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성채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왕조가 거할 기본적인 장막을 짓는 것으로 시작하여, 점차 궁전의 기초가 마련되고, 궁전 나자리에 아름다운 공간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궁전 나자리에 Naza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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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나자리는 외궁과 내궁으로 구분된다. 외궁에서는 각종 궁전 의식이 행해졌으며, 외부 인사들과의 접견이 이루어졌던 장소로, 그라나다 언덕에 밀집된 붉은 집들이 내려다보인다. 홀을 지나면 두 자매 방과 아름다운 돔형 천장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여행객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스투코(stucco)는 벽에 바르는 미장 재료로, 골재, 분말, 물 등을 섞어 만든다. 이 재료는 벽돌, 콘크리트, 어도비, 또는 목조 건물에 사용되며, 굳고 나면 단단해져 건물의 방화성과 내구성을 높이고, 외관을 아름답게 만든다. 당시 궁전의 벽면 장식은 화려함을 자랑하며 그 아름다움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라이온궁전의 분수를 떠받치는 12마리의 대리석 사자상은 이슬람 양식이 아니다. 이 사자상들은 주변에서 선물로 받은 것들로, 발견 당시 사자상 주변은 파헤쳐져 있었고, 돌들이 여기저기 나뒹굴며 폐허와 같은 상태였다. 궁전은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훼손되었지만, 그 잃어버린 아름다움은 여전히 느껴진다.



아라야네스 정원 Patio de los Arraya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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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야네스 정원(Patio de los Arrayanes)은 35m * 7m 크기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졌다. 연못에 비친 기둥과 건물의 대칭적인 조화가 매우 아름다운 정원이다. 왕의 목욕실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과 색감의 조화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할렘 내부는 옷을 입지 않은 여자들만 있는 공간이었으며, 그라나다의 무더운 기온 때문에 여성들은 옷을 걸치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상부 회랑에서는 여성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볼 수 없던 장님 음악가들이 연주를 하며 궁전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고 한다.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곳을 바라보면, 궁전은 화려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꼬마레스 궁전 comares t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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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주목적이었던 알람브라 궁전은 왕족뿐만 아니라 신하와 그들의 가족, 시종과 경비들까지 거주해야 했으며, 당시로서는 작은 도시처럼 그 규모가 컸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조는 점차 안정을 찾았고, 안달루시아 지방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세월을 보냈다. 방어가 가능한 궁전과 그 주변의 자원 덕분에 왕국은 까쓰띠야 왕국의 군대의 위협 속에서도 약 250여 년 동안 번영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유스프 1세 왕 대에는 왕궁의 군대와 바다 건너 이슬람 제국의 군대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고 성채를 벗어나 기독교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공격은 참담한 대패로 끝나고, 나쓰르 왕조는 큰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이 불안감을 떨쳐내고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왕조는 궁전의 증축에 나선다. 바로 이 시기에 증축된 궁전이 꼬마레스 궁전이다.


궁전 증축은 왕조의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요새와 타워를 보강하고 관개수로, 창고, 공중목욕탕, 사원, 정원 등을 새로 설치했다. 궁전이 완성되자, 나쓰르 왕조는 주변국의 귀족들을 초청하여 화려하게 꾸며진 궁전을 자랑했다. 햇빛이 등 뒤로 비추는 곳에 앉아 왕이 손님들을 맞이하며, 궁전을 본 인근 귀족들과 손님들은 나쓰르 왕국에 대한 경계심을 다시 갖게 되었다. 이는 왕조가 전쟁에서 패하고 군사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허장성세의 책략이었다.


그러나 결국 내부에서 발생한 반란으로 유스프 왕은 세비아로 도망쳐 머물게 되며, 나쓰르 왕조는 내외부의 위협 속에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오직 왕의 여자들만 머물 수 있는 궁 하렘 حريم harī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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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후, 왕은 다시 알람브라 궁전으로 돌아와 '하렘'이라 알려진, 오직 왕의 여자들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또다시 증축한다. 새로운 궁전은 소성 벽돌로 지어졌으며, 벽체는 타일과 석재 패널로 마감되어 있고, 금박과 회반죽, 진흙 반죽을 이용한 테라코타로 마감 처리가 되어 있다. 기둥 사이를 이어주는 아치와 그 곡선을 따라 삽입된 작은 반원 형태의 아라베스크식 문양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다. 또한 석회 타일과 아랍문자(‘알라만이 유일한 신이다’)와 식물 모양을 도안한 기하학적 무늬, 꽃무늬 등이 복잡하고 촘촘히 장식되어 있다.


아치형 천장은 종유석이나 벌집무늬 형태로 스투코로 처리되어 있어, 궁전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다. 그 자체로 하나의 아방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 세밀하고 화려한 장식들이 궁전 전체를 감싸고 있다.



술탄의 여름 궁전 린다라하(싸이프러스) 정원 Patio de Lindaraja 제네렐 리페 Genera life와 알람브라궁전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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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왼편 언덕 위에 제네랄리페(Genera life)라 불리는 술탄의 여름 궁전과 분수 정원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손꼽히는 제네랄 리페를 이제까지 힘내서 함께 했던 아내는 둘러보질 못했다.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하며 쥐가 나는 관계로 여름궁전으로 건너는 다리가 있는 성채 벤치에서 잠시 쉬기로 하고 홀로 왕궁의 여름 궁전으로 향했다. 분수와 작은 폭포, 연못, 작은 냇물 등을 곳곳에 배치하고 통로는 전부 꽃과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싸이프로스 나무로 꾸며졌다. 인위적으로 각을 세우고 깎아놓은 정원수는 낯선 여행객들을 맞는다.



세키아 정원의 물방울 소리가 아름다운 선율처럼 흩어진다. 마치 타레가의 감미로운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의 트레몰로 선율이 들리는 듯했다. 타레가는 제자인 콘챠를 사랑했지만, 유부녀였던 콘챠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타레가의 상심은 병처럼 깊어 갔으며 스페인을 여행하게 되었고 그라나다에서 콘챠와의 애틋한 하루를 보낸 타레가는 이곳 알람브라를 찾아 궁전을 둘러보며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튕기는 소리를 듣고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의 감미로운 트레몰로 주법으로 이어지는 기타 선율을 작곡을 했다 한다.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이 음악은 후에 캄보디아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양민 200만 명을 학살한 20세기 최악의 사건을 영화화한 ‘킬링필드’의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던, 19C 후반의 스페인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Francisco Tarrega의 명곡이다.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들어보기



물사다리 Escaler del Au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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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둘러보는 내내 머릿속에 남는 의문, 당시에는 어떤 기술로 이런 분수를 만들었을까?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정원 위로 올라가 보니 씨에라네바다 산맥으로부터 온, 어른 손으로 수로의 폭을 감싸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수로가 30도 정도의 경사로 산 위에서부터 힘차게 흐르고 있다. 필자가 생각했던 수로는 많은 물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넓은 사각형의 뚜껑이 없는 물도랑 형태인 개거 수로를 생각했는데, 그 추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사각형의 개거가 아니다. 그리고 두 줄기의 물이 따로따로 산으로부터 내려와 두 개소의 수로를 따라 땅속으로 연결된 좁은 수로관으로 바로 떨어지는, 수압을 높여주는 구조였다. 이곳의 비빌은 수압을 높여주는 좁은 수로관이었다.


흐르는 물에 손을 넣어본다. 겨울임에도 물은 차지 않다. 수로는 돌을 깎아 만든 곡형의 개거였고 수직으로 땅속으로 묻혀 있는 수로관을 따라 땅 위로는 물 한 방울 튀지 않는 구조이다. 참으로 놀라웠다. 자연 상태의 고저차를 이용한 압력을 활용해 분수의 분출 정도를 결정하는 자연 수압 방식이다.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현대의 기술은 압력을 인위적으로 가하는 가압펌프 기술이 있지만 이때에는 그런 기술이 없을 때였다. 궁성 내에 공급하는 모든 물을 표고차를 고려하여 설계한 자연 수압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물을 다루는 탁월하고 천부적인 기술을 생득적으로 가진 타고난 물 기술자들인 무어인들이었다..

http://generalife.org/escalera-del-agua.php


난공불락의 알람브라는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던 지금의 마드릿 중심의 내륙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까스띠야 왕조와 바르셀로나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아라곤 왕조의 결혼 동맹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두 왕조의 가톨릭 동맹군은 1492년 알람브라를 함락한다. 알람브라 궁전이 완성되고 150년이 흐른 후였다. 이사벨 여왕에 의해 알람브라 궁성은 정복되고 이베리아반도에 마지막 남은 이슬람 세력은 완전히 패망하여 나쓰르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들은 북아프리카로 퇴각하며 알람브라를 되돌아보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한다.



알람브라 궁전의 보존과 가톨릭 양식의 카를로스 5세 궁전 건축


알람브라궁을 정복한 가톨릭 군대는 이슬람 문화가 집약된 궁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이슬람 문화를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한두 곳을 제외하고는 아무 곳도 바꾸지 못했다고 한다. 궁성이 너무 아름다워 파손하지 말라는 이사벨 여왕의 결정과 함께 필요한 부분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가톨릭 양식을 첨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알람브라 궁성 내부에 대규모의 가톨릭 양식의 건물을 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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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제국을 몰아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카를로스 5세(Carlos V) 궁전을 1526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40년간 남짓 짓기 시작하지만 결국은 아랍인들의 반란으로 공사가 중단된다. 스페인 제일의 르네상스식 건물로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마추카의 유일한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정사각형 내부에 커다란 원형 빠띠오이고 열주의 아름다움(1층 도리아, 2층은 이오니아식)은 견줄만한 곳이 없다. 하지만 짓다 만 것이다. 그러고는 이 궁성의 일들은 가스띠야 왕궁에선 까맣게 잊게 된다. 1800년 초반까지 자그마치 300년간 역사적으로도 잊힌다.


알람브라궁전의 최초의 훼손은 바로 이 시기였다. 그렇게 잊히고 버려진 기간 동안 집시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이후 여행을 즐겨했던 미국 공사관 워싱턴 어빙이 이곳을 여행하면서 산속에 버려진 너무 아름다운 궁전을 발견하고 그곳에 모여 살던 집시들을 통하여 궁전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알람브라 이야기"라는 책으로 출간하면서 유럽 사회를 비롯한 세상에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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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궁전은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그렇게 세상에 다시 나온다. 알람브라 궁전은 물의 궁전이라 불릴 정도로 물이 풍부했던 궁전으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궁전이다.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제국, 나쓰르 왕국은 이렇게 화려한 궁전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왕과 왕의 여자들은 없고 장님 악사들도 없는 화려한 궁성에는 오직 고양이들만이 여행객을 맞는다. 해 질 녘 붉은 노을을 떠안은 궁전은 말 그대로 ‘알람브라’였다.

@thebcstory

#알람브라 #그라나다 #나쓰르왕조 #스페인여행 #엔트레코트 #씨에라네바다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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