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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젠지호수, 순도 100%의 편안함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곳

by 조영환


[설국의 기억, 열도를 걷다]

주젠지호수, 순도 100%의 편안함


설경 속으로 한 걸음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주젠지호(中禅寺湖)의 겨울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 같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 그리고 그 고요한 호수 위로 서서히 내려앉는 평화로움. 나는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식당에 자리 잡고 점심을 주문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눈부셨다.


식사는 단출하고 정갈했다. 바삭한 호박튀김과 고구마튀김, 따뜻한 미소시루(味噌汁), 작은 식탁용 숯불화로 위에 올려진 따듯한 오뎅탕, 그리고 흰쌀밥, 오렌지 두 조각과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를 얹은 무채절임. 특별할 것 없는 메뉴였지만, 이곳의 공기와 함께 어우러지니 그 이상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며 문득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란한 점심식사는 아니었지만 마음마저 편안해지는 식사란 기분이 들었다. 이 느낌 뭐지.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한 시간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


벽면에는 ‘어서오십시오 니코에.’, ‘이 계단으로 주젠지 호수에 갈 수 있습니다.’라는 붉은 글씨의 궁서체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정갈하게 붙여진 문구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묘한 친근함을 자아냈다. 식당 벽면에는 주젠지호와 폭포의 사계절을 담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다소 촌스러운 메뉴 사진들이 정감 있는 분위기를 더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늘 다녔던 단골식당이라도 온 것처럼 편안하고, 더없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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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주변의 겨울 풍경

점심을 마친 후, 소화를 시킬 겸 주젠지호 주변을 걸었다. 식당이 지형의 높낮이 차를 이용해 지은 건축물이어서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호수변 도로를 건너 수변으로 접근이 가능한 구조였다. 수북이 쌓인 눈 위로 눈길을 트며 나아가니 오리배들이 겨울잠을 자듯 조용히 묶여 있었다. 붉은색 도리이(鳥居)가 도로를 가로지르며 서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후타라산 신사 대도리이(二荒山神社大鳥居)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하얀 설경 속 붉은색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대비를 감상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소박한 2층 건물, 니코 시청 출장소(Nikkō city office Chūgushi simplified office, 日光市役所 中宮祠出張所), 그리고 보건진료소(日光市立奥日光診療所), 전화교환실(NTT East Chuzenji Telephone Switchboard, NTT東日本 中禅寺電話交換センタ)까지. 요즘 보기 힘든 시설들이 여전히 운영 중이었다. 잠시 타임슬립되어 과거로의 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이 마을의 분위기에 깊은 정취가 배어 있었다. 눈이 많이 내려 고립된다면 여전히 쓸모 있는 시설임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제설장비를 장착한 지프차가 제설작업을 마치고 도로변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눈밭에서는 썰매를 타며 즐겁게 노는 어린 남매의 모습이 보였다. 도심의 바쁜 일상과는 다른, 느리지만 평온한 삶이 이곳에 존재했다.



자연과 하나 되는 마을

호수를 따라 걸으며 마을을 둘러보니, 이곳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을의 상점과 식당, 시설물들은 모두 화려함을 배제한 채 소박한 멋을 간직하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선착장이 보였다. ‘닛코국립공원(日光国立公園)’, ‘주젠지호(中禅寺湖)’, ‘해발 1269m’라고 적힌 나무 이정표가 말뚝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무판자로 만든 이정표마저 자연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호수에 반사된 강렬한 햇살이 온통 은빛 물결로 변했다. 따스한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호수를 바라보니, 이곳의 평온함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모든 걱정과 번잡함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 도심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순수한 쉼이 되는 호사를 누리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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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곳

호숫가에는 몇 안 되는 소박한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자명당(紫明堂, Shimeidō)과 常陸屋가 눈에 띄었다. 자명당은 1873년(메이지 6년)에 창업한 곳으로, 96세 할머니가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계산할 때 전자계산기를 빌려 계산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인근에 있는 히타치야(常陸屋, 常陸 (히타치)는 일본 지명이나 성씨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고 屋(야)는 "가게" 또는 "집"을 뜻하는 접미사로, 상호명 등에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로 간 몇몇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크게 붐비지는 않았지만, 된장라면(味噌ラーメン)과 돈가스 정식(豚かつとじ膳)이 의외로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했다. 화려한 광고나 간판 없이도, 소박함 속에서 오랜 세월 지켜온 맛과 정성이 느껴지는 마을 식당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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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며 남긴 여운

눈을 치운 도로 위로 천천히 차량이 지나가는 모습, 붉은 도리이 옆 하얀 눈밭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노는 연인, 그리고 롱코트를 걸치고 마을로 들어서는 한 여인의 모습까지. 이곳에서의 풍경은 모두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왔다. 호수를 지켜보는 듯한 야시로야마(社山)와 난타이산(男体山)의 든든한 존재감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소박함과 평안함이 느껴지는 이곳에서 가진 잠시의 산책이었지만, 나에겐 선물 같은 여행이었다. 번잡한 세상을 떠나, 순도 100%의 순수한 평온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주젠지호에서의 하루는 내 안에 오롯이 스며들었고,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겨울이 지나면, 선착장 위에 올려진 보트가 다시 호수를 가로지를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이곳은 변함없이 소박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여행자를 맞이할 것이다. 자연과 사람, 그리고 시간이 조용히 어우러지는 곳, 그것이 바로 주젠지호였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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