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어딘가 허전하고 공허했던
[설국의 기억, 열도를 걷다]
도쿄로 돌아가는 길, 그때는 어딘가 허전하고 공허했던
주젠지호(中禅寺湖)의 겨울 풍경 속에서 나는 자연과 시간, 그리고 나 자신이 하나가 된 듯한 순도 100%의 평온을 만끽했다. 차가운 공기가 볼을 스치며 지나갔지만, 호수 위로 부서지는 햇살은 따스한 황금빛을 품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잔잔한 호수의 숨결만이 귓가에 스며드는 듯했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제 닛코(日光)를 떠나 도쿄(東京)로 향할 시간이었다. 고요한 호수를 기억 속 한 페이지에 곱게 접어 두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버스에 올라타자 백미러에 매달린 작은 종이비행기가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버스가 움직이고 있음을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다. 차창 밖으로 설경과 산길이 스쳐 지나가고, 버스가 속도를 더할수록 도심의 풍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도쿄로 향하는 길은 한적했다.
오후 3시 50분쯤, 사이타마현(埼玉県) 하스다시(蓮田市)의 한 휴게소에 들렀다. 그곳에서 반가운 스타벅스를 발견했다. 낯선 길 위에서 익숙한 것을 마주하면, 묘한 안도감이 스며든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겐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쥔 채 잠시 숨을 고르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휴게소를 오가는 사람들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의 삶의 단편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쉬어가는 이곳에서, 어떤 이는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리고, 어떤 이는 짧은 통화를 하며 다음 목적지를 계획하고 있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여행하는 젊은 여인의 발걸음이 한층 더 가벼워 보였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부모, 트렁크를 정리하는 여행자, 반려견과 함께 잠시 산책하는 노부부, 유니폼을 입고 휴게소 여기저기를 다니며 청소를 하는 사람까지. 그들의 작은 움직임 속에서 저마다의 이야기와 시간이 교차하는 순간이 담겨 있었다.
하스다시는 도쿄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도시로, 편리한 교통 덕분에 도쿄로 통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또한 닛코에서 도쿄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여행자들의 발길이 자연스레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버스가 다시 부드럽게 길 위를 나아갔다. 아라카와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지나며, 창밖으로 펼쳐진 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겨울 철새들이 유유히 강 위를 떠다녔다. 큰고니, 흰뺨검둥오리, 도요새, 물떼새, 그들은 마치 내 여행의 한 페이지처럼 잔잔한 강물 위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들 또한, 철마다 이 강을 찾아오는 여행자들이지 싶었다. 물살 위로 내려앉은 석양빛이 강물에 스며들었고, 나는 그 빛이 찰랑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내 마음도 그 물결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도시의 풍경으로 다가가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자연의 품속에 머무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흐릿한 겨울 햇살 아래, 무리를 지어 잔잔한 물살을 가르는 새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이 풍경은 나의 시선을 한참이나 붙잡아 두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며 하늘 저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석양빛을 머금은 하늘 아래, 도쿄의 고층 빌딩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뚜렷해질수록, 나는 다시 현실로 발을 들이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 순간, 설국의 주인공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 덮인 설원을 떠나 도쿄로 돌아오던 그의 발걸음처럼, 나도 센다이에서 시작된 설국의 기억을 따라, 길고 긴 시간의 끝자락에서 이 도시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설국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도쿄로 돌아가는 길, 그때는 어딘가 허전하고 공허했던 느낌이었지.” 그 글을 읽을 당시에는 그저 지나쳐 버렸던 문장이었지만, 지금 나는 그 감정을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고 세월이었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가며 점점 더 차갑고 낯설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나는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그의 내면 깊숙이 숨겨둔 고독과,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에서의 외로움을 고백했었다. 그 외로움은 도시가 변하고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져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가 느낀 공허함과 고독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설원의 고장을 빠져나와 도쿄로 오면서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시마무라는 이 도시에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찾으려 했던 것일까? 이 도시를 벗어나 시마무라가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설국에서 느껴졌던 그 모든 감정들이 어느새 이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한 올 한 올 풀어지는 듯했다.
설국 속 주인공이 도쿄의 빛을 마주하며 내면의 세계에 변화를 맞이하듯, 나도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도쿄로 돌아오며 겪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이제 내 안에서도 되살아나고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이 여행을 시작하며 떠올랐던 이 한 줄의 문장은 내 안에 묻어두었던 많은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사랑도, 고독도, 모든 감정이 그 하얀 눈과 함께 깨어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하얗게 덮인 마을에서 나는 내 감정이 무엇인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점점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끝없이 내리는 눈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인간의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나는 오래전 학창 시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을 때 대부분 문장을 깊이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다. 물론 그땐 그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이해하는 ‘설국’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 동안, 나의 문학적 세포 어딘가에 저장되었던 설국의 기억이 깨어나며 어렴풋이 느껴지는 설국의 감성이 내게 다가오는 순간을 맞이했다.
고요하고 차가운 설경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복잡한 감정들을 마주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면, 그 감정들 속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결국 고독과도 닮아 있는 외로움이었다.
이 고독 속에서 나는 스스로와의 연결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정을 마주할 수 있었다. 순간순간의 사랑과 고독, 그 감정들이 다 지나갈 것만 같았지만, 그때마다 그 속에 담긴 무언가가 나를 붙잡았다. 그때 나는, 시마무라와 기미코가 그토록 고독한 관계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시마무라가 그리도 갈망했던 사랑, 그 사랑을 따라가는 여정 속에서 느꼈던 허무함은 내게도 사뭇 익숙한 감정이었다. 그저 차가운 설경과 닮아 있는 시마무라가 느꼈던 고독은 내게도 다. 눈이 내리면 모든 것들이 덮이고, 사라지지만, 그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정. 눈 덮인 마을을 지나 이곳까지 오면서 나 역시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나온 길은 그저 눈 덮인 풍경이었을 뿐인데,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설국이 보여주는 하얀 아름다움 속에서, 그저 잠시 지나가는 것들이라 여겼던 순간들이 이제 내게는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았다.
센다이에서 시작해 도쿄까지 오면서 설국의 기억을 쫒았던 나의 여행은 사실상 마무리되고, 도쿄에서부턴 ‘하코네에서 온 편지’를 따라갈 것이다. 설국 여행의 끝자락에서, 나는 설국의 한 장면처럼 다시 고요하고 차가운 풍경을 맞이하면서도, 그 속에서 나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듯했다.
그렇게 오후 5시경, 나는 도쿄 아사쿠사(浅草)의 센소지(浅草寺)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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