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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대불의 숨결 아래서

by 조영환

[설국의 기억, 열도를 걷다]


나라, 대불의 숨결 아래서



도요하시에서 아침을 맞는다.

눈을 떠 창밖을 보았을 때, 도요하시의 밤이 아직도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전날 늦은 밤, 호텔 창 너머로 바라본 도시의 불빛은 조용히 깜빡였고, 그 잔상은 나고야성의 밤을 떠올리게 했다. 비록 외관을 둘러보고 야경을 바라보는 선에서 그치긴 하였지만, 겨울 저녁의 서늘한 공기와 어둠, 그리고 성이 품고 있을 이야기들은 오히려 상상 속에서 더 또렷하게 살아났다. 고요하고 묵직한 시간은 그렇게 또 다른 여정으로 나를 이끌었다.


오늘 우리는 호텔조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천년 역사의 고도 교토(Kyoto, 京都)로 이동할 예정이다.


일상이 열리는 도요하시의 조금은 이른 아침 모습을 바라본다. 도요하시의 거리를 분주히 오가는 노면전차가 유독 인상 깊다. 도요하시는 1시간에 10편가량의 전차가 운행되고 있다. 일본 17개 도시 중 가장 활발하게 노면전차가 운행되는 도시이다.


"시영 전차", "트램" 등 여러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노면 전차는 도요하시시 중심부를 달리는 전차로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교통수단이다. 1925년 개업하여 지금까지도 5.4km에 걸쳐 13개의 역을 달리고 있다.


도요하시의 노면전차에는 특별한 리듬이 있다. 덜컹거리는 진동, 금속 바퀴가 레일 위를 스치는 찰나의 마찰음, 커브를 돌며 만들어내는 깊은 마찰음까지. 마치 오래된 시계가 다시 시간을 되새기듯, 도시의 호흡을 따라 고즈넉이 움직인다. 그리고 철도 애호가를 위한 트리비어이지만, 도요하시시 이바라역에는 일본에서 제일가는 급 커브가 있다. 무려 반경 11m이고 90도의 커브이다. 여섯 종류의 노면전차 중 덜컹덜컹 소리가 나고 흔들리며 달리는, 그야말로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멋을 자랑하는 차량부터 노상 레일을 따라 물 찬 제비처럼 매끈한 모습으로 미끄러지듯이 달리는 최첨단 전차도 있다. 차량마다 모양과 색깔도 다르고 각각의 매력을 뽐내며 시내를 오가며 도요하시의 아침을 열고 있다.


더 재밌고 일본적 특성이기도 한 것은 노면전차의 계절에 따른 변신이다.

노면전차는 도요하시시의 고풍스럽고 정취 있는 거리를 이동하기 위한 단순한 교통수단으로 머물지 않고 여름에는 이동식 비어 홀인 맥주 전차가 되어 도시락 스타일의 디너와 맥주 뷔페를 즐길 수 있다. 겨울에는 전차 안에서 추위를 다소 녹여주는 겨울의 인기 요리인 어묵을 즐길 수 있는 어묵전차도 달린다. 노래를 부르며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가라오케 전차도 있다. 그리고 더욱 놀랄만한 것은 개인적인 파티를 위해 예약하는 것도 가능하며 피자 배달 세팅도 할 수 있다고 하니 참으로 무한 변신의 노면 전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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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적어도 한 두 가지 정도는 부러운 것들이 여행자의 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도요하시의 노면 전차도 그중 하나이다.


예전에 포르투갈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본 적이 있는데, 차량이 오가는 도로에 차량과 노면전차는 물론 말을 타고 다니는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사내들과 마차를 몰고 가는 여인을 보며 잠시 몇십 년, 아니 몇 백 년을 건너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시간여행을 온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한때 그런 시간이 있었다. 청량리에서 종로, 서울역으로 이어지던 노면전차의 풍경. 하지만 전쟁과 압축 성장의 시대, 낡고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경제개발 논리는 빈곤 탈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우리를 지탱하던 시간의 층위를 허물어뜨리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정책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 예전의 모습들이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이 참으로 많다. 전쟁과 격변기 역사를 딛고 빈국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상목표였던 당시 경제개발 논리는 보존하고 변화, 발전시켰다면 엄청난 관광자원일뿐만 아니라 문화자원화 할 수 있었던 귀중한 유산들을 그저 낡은 것으로 여기고 경제적 성장논리에 매몰되어 맥이 끊긴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하기에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킬 뿐만 아니라 지속 발전시키고 현대 생활에 맞게 응용하고 변화시킨 외국의 사례들을 들여다볼 때면 왠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부러움일 것이다.


요즘 국내여행을 하다 보면 뒤늦게나마 이를 깨닫고 정부와 각 지자체에서 복원과 전승, 그리고 미래유산으로의 전승에 힘을 기울이고 있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례로 국민 여가생활과 건강에 기여하는 생활밀착형 옛길 복원사업과 문화유산을 도보 산책로로 연결하는 역사문화 탐방로 조성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빠른 속도의 사회는 피로를 동반하고, 뿌리를 잃은 변화는 때때로 혼란을 낳는다.
그렇기에 도요하시의 느린 전차는 속도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더 멀리 데려다주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나를, 우리를 잠시 쉬어가게 한다.


도요하시에서 노면 전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도심의 복잡 번다함과 빠른 속도감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정서적 안정감은 당연히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도요하시를 여행하게 된다면, 전차를 타보시길 권한다.
속도를 낮추는 일은, 단순한 이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https://japanharu.net/9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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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나는 교토로 이동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도요하시에서 나고야를 지나, 이번에는 나라로 향한다. 기차 창 밖 풍경은 흰 수묵화처럼 펼쳐지고, 흐린 하늘 아래 드러나는 나뭇가지들은 겨울의 고요를 품고 있다. 하루가 막 깨어나는 시점, 도시에서 벗어난 풍경은 조금씩 숨을 고르며 나를 동대사로 데려갔다.


교토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천년 역사의 고도 교토(京都, KYOTO)라는 이미지가 그렇게 느끼게 했던 거 같다. 교토로 이동하며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군것질을 하는 것도 여행 중 소소한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고헤이모치(五平餅)가 눈에 들어온다. 모치는 떡을 의미하는데 꼬챙이에 꼬치처럼 꿰어 구워 내고 있다.

간판에 고자이쇼명물(御在所 名物, めいぶつ)이라 적었으니 우리로 치면 지방향토 음식쯤 돼 보이니 일단 먹어 보기로 한다. 맵쌀밥을 짓이겨 경단모양으로 꼬치에 꿰어 구운 떡이다. 양념장을 발라 구운 것 같다. 맛은 달기도 하고 약간 신맛도 느껴진다. 참깨의 고소한 맛과 견과류도 씹힌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곳은 일본 중부지방(中部地方)으로 미에현(三重県) 고모노에 있는 고자이쇼산(御在所岳)으로 오르는 Gozaisho Ropeway (御在所ロープウェイ, Gozaisho Rōpuwei)와 유노야마 온센(湯の山温泉, 湯山山)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일본 중부지방에서 전해지는 향토 음식인 고헤이모치를 먹으며 잠시 이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삶이 배어 있는 고헤이모치를 한 입 베어 물며 여행을 이어간다.

도요하시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마치고 4시간가량을 달려 교토로 가기 전, 사슴공원으로 유명한 나라공원(奈良公園, 나량공원)에 들렀다.


공원으로 들어서자 사슴들이 다가온다. 두려움 없는 눈빛. 거리를 두지 않는 생명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이를 얻기 위해서인지 꽤나 적극적으로 관광객들 곁으로 다가오는 사슴들도 왕왕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사람 반 사슴 반이다. 약 10만 평의 넓은 잔디밭 공원에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함께 어울려서 살고 있는 사슴들의 천국인 셈이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사는 오래된 풍경 같았다. 시간을 잊은 한 장면처럼, 이곳에서의 사슴은 ‘지금’이 아닌 ‘언제나’의 존재로 느껴진다.

공원 내에 자리 잡고 있는 동대사에는 학창 시절 역사시간에 배웠던 정창원(쇼소인, 正倉院)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금(新羅琴, 시라기 고토, 8세기경 신라의 현악기)이 기억난다. 쇼소인에 보관된 신라금(新羅琴)은 8세기경 신라에서 건너온 현악기로, 한반도와 이곳의 연결을 증명하는 유산이다.

이곳에서 일본불교 화엄종(華嚴宗)의 대본산인 동대사(도다이지, 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 카스가타이샤(春日大社) 등 세계문화유산과 나라국립박물관( Nara National Museum, 奈良國立博物館, ならこくりつはくぶつかん)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매년 이곳에서 열리는 특별 전시회는 동대사 쇼소인에 보관돼 있던 일본 유물을 비롯해 한국, 중국, 인도의 진귀한 고대 유물이 일반에 공개된다.

교토는 여기서 약 42km의 거리이다. 나라는 710년에서 784년, 교토로 옮기기 전 74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고도이다.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땅. 사슴공원은 메이지 13년(1880)에 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며 다이쇼 11년(1922)에 나라의 명승지로 지정,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람과 사슴이 공존하는 이 공간은, 문명의 흔적을 따라 걷는 여행자의 마음을 맑게 한다.


도요하시의 조용한 전차에서 시작된 하루는 고자이쇼의 향토 음식, 그리고 나라의 사슴과 대불을 지나 이제 천년 고도 교토로 이어진다.

느린 열차처럼,

겨울의 여행도 서두르지 않는다. 속도를 낮추는 대신,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된다.

계절과 도시, 그리고 나라는 서로 다른 숨결이었지만,

그렇게 하나의 여정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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