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도키아의 심장 괴레메와 기독교의 신앙적 심장 수도사의 골짜기
이른 아침 5시 30분, 그는 눈을 뜨고 창문을 열어 옥상으로 나갔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아바노스 마을의 거리는 붉은 불빛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한 시간가량이 지나자 여명이 밝아오며 어둠이 서서히 물러났다. 마을은 아바노스 도자기 특유의 고혹적인 빛깔로 물들었고, 그의 마음 또한 붉은 불빛처럼 설레며 카파도키아에서 맞는 2023년 새해 첫날의 감동을 느꼈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어 그는 한참을 바라보며 새해 아침을 맞이했다.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을 챙겨 먹고 다시 창을 열고 옥상으로 나갔다. 이번엔 붉은 햇살이 아바노스 마을을 또 한 번 붉게 물들였다. 호텔 별관의 굴뚝이 마치 어제 보았던 요정의 굴뚝처럼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행장을 꾸려 7시 50분경에 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괴레메의 기독교 성지인 수도사의 골짜기를 찾아 이른 아침 호텔을 출발했다. 카파도키아 하늘에는 새해 소망을 가득 실은 풍선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열기구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하늘을 메우지만, 새해 첫날인 오늘 아침 수도사의 골짜기 위로 떠오르는 풍선은 왠지 특별하게 보였다. 두둥실 하늘로 떠오르는 풍선처럼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 싶은 그의 벅찬 가슴으로 이미 한여름 소낙비가 한 차례 억세게 퍼붓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국 땅 튀르키예에서 맞는 새해 첫날의 아침은 그렇게 감동적으로 밝아왔다.
이른 시간이기도 하지만 아침의 공기는 약간 쌀쌀했다. 카파도키아는 튀르키예 내륙의 겨울철에는 눈이 내리고 추운 지역이다. 그는 눈이 덮인 카파도키아 골짜기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만약 눈이 소복하게 쌓인다면 그야말로 겨울 왕국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멋진 설경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에 마음이 설렜다. 수도사의 골짜기로 올라가며 열기구가 떠오르며 가득 메운 하늘을 바라보니,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그야말로 그곳은 지상에 다시없을 장관이었다. 괴레메 수도사의 골짜기에서 맞는 이른 아침 풍경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벅찬 가슴으로 밀려오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힘차게 받아 안았다. 삐죽삐죽 솟은 산 위로 커다랗게 떠오른 풍선, 결코 시선을 뗄 수 없는 감동이 이른 아침 수도사의 골짜기를 메웠다.
상점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휑하니 바람만 이리저리 오가는 셔터가 내려진 상점가 골목을 지나, 그는 수도사의 골짜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상점 골목을 벗어나자 수도사의 골짜기 입구로 이어졌다. 골짜기로 오르는 진입로 변으로 울퉁불퉁 이어지는 암괴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암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큼지막한 각이 진 요정의 굴뚝 아래에도 어김없이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꼭대기에는 환기 구멍인 듯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과거 수도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머물렀던 곳임을 말해주었다.
낙타 주인은 보이지 않았고, 말뚝에 매어져 있는 두 마리의 낙타만이 다소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인지 추레하게 건초를 먹고 서 있었다. 아마도 관광객들을 태우고 이곳을 돌아보는 투어 상품으로 낙타가 동원되었을 것 같았다. 단지 낙타에 올라타 수도사의 골짜기를 배경 삼아 사진만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침 댓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아래위로 휘저으며 서 있는 낙타의 안쓰러운 모습이 왠지 그의 마음에 머물렀다. 그는 약간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오르는 수도사의 골짜기 진입로에서 몸을 돌려 괴레메 마을을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붉은 햇빛을 받은 알록달록한 풍선들이 괴레메 하늘에서 수많은 별빛이 되어 반짝이는 아침이었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 수도사의 골짜기
응회암은 다소 무른 성질 덕분에 쉽게 파내고 굴을 뚫기에 적합하다. 형태가 잘 유지되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도 변형되지 않고, 동굴 주택이나 교회를 짓기에 용이하고 유리한 재료로 여겨진다. 괴레메 골짜기에 형성된 수도사의 골짜기는 기독교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반도를 거쳐 근동으로 확산되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이후 389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로마제국에서 공인된 기독교는 유럽으로 퍼지고, 동서의 분열과 세속화, 형식화의 과정을 거치며 성직자의 특권 의식이 팽배해졌다. 심지어 성직자의 추천서 남발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앙의 본질인 순수성을 잃어가는 기독교를 거부하고, 스스로 노동하며 묵상하는 헌신적인 금욕주의적 수도 생활을 실천한 이들이 약 4세기에서 13세기 사이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였다. 이곳은 기독교 수도주의(Christian monasticism)의 근본을 두고 있으며, 괴레메 야외 박물관(Göreme Açık Hava Müzesi)과 수도사의 골짜기에서 기독교 수도원 교육의 시발점이 되었다.
괴레메 골짜기는 하나 둘 늘어나는 수도사들 덕분에 점차 동굴 형태의 기숙사에서 예배당까지 갖추게 되었다. 수도사의 골짜기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 바위에 사제들의 수도원과 수녀원이 따로 지어져 있다. 이곳에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동굴 주택이 존재하며, 이외에도 많은 예배당과 교회가 세워졌다. 성 캐서린 예배당(Azize Catherine Şapeli), 엘말리 교회(Elmalı Kilise), 몰타 하슬리 교회(Malta Haçlı Kilise), 성 바바라 예배당(St. Barbara Church), 성 바실리 교회(Chapel of St. Basil), 일란리 교회(Yılanlı Kilise), 차르클리 교회(Çarıklı Church), 토칼리 교회(Tokalı Kilise),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어둠의 교회(Karanlık Kilise) 등 카파도키아 지역에 세워진 약 365개의 교회와 예배당 중 30여 개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은 성경에 기록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기독교 성지이기도 하다(행 2:9, 벧전 1:1).
이러한 시설들은 내부 미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일부는 약 2~3km 거리의 지하 시설로 이어진다. 카파도키아의 심장과도 같은 괴레메 골짜기엔 기독교의 신앙적 심장인 수도사의 골짜기가 있는 셈이다. 이곳 출신의 성 시몬(St. Simon), 성 바실리우스(St. Basil), 나지안(튀르키예 Nenizi)의 주교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 대주교 그레고리우스, 성 바실리우스의 동생인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는 모두 카파도키아 출신의 주교이자 신학자이며 성인이다.
튀르키예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마치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등장하는 홍반장처럼, 이곳 수도사의 골짜기에도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없더라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견공이 있다. 그냥 나타나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사진까지 찍는다. 마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 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 웃자고 하는 말처럼, 관광 개 3년이면 사진까지 함께 찍는 튀르키예의 견공이다.
이곳에 건축된 동굴 교회에 그려진 벽화를 설명하는 괴레메 유적(Göreme ören yeri) 안내판을 살펴보았다. 위에서부터 좌에서 우로 하나씩 살펴보니, Deesis(옥좌의 그리스도상), Annunciation(수태고지), Journey into Bethlehem(베들레헴으로 여행), Nativity(탄생), Adoration of the Magi(동방박사의 경배), Flight into Egypt(이집트로 피난), Baptism(세례), Raising of Lazarus(나자로의 부활), Entry into Jerusalem(예루살렘 입성), Transfiguration(변형), Last Supper(최후의 만찬), Betrayal by Judas(유다의 배신), Crucifixion(십자가 형벌), St. Onuphrius-St. Thomas-St. Basil(성 오누프리우스, 성 토마스, 성 바실), St. Georgios-St. Theodore(성 게오르기오스와 성 테오도르)라는 제목이 붙은 총 15장의 그림이 있었다. 이곳의 여러 교회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프레스코화를 모아놓은 안내판으로, 예수의 탄생과 성경의 이야기, 그리고 순교자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낸 동굴 벽화이다.
성 바실리 교회(Chapel of St. Basil)
4세기경 소외 계층을 돕는 데 평생을 바친 성 바실리오를 기리기 위해 11세기에 건축된 성 바실리 교회를 관람한다. 암굴 입구 주변과 외부는 풍화와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보강재(아마도 와이어 또는 플라스틱 재질의 메쉬로 보임)를 사용하여 뿜칠로 덮여 있다. 교회 내부로 들어서면 유리로 덮인 유골이 먼저 눈에 띈다. 바닥에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기부한 이들과 그 가족의 무덤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무덤은 유골이 드러나 보이도록 유리로 덮여 있다.
천장은 둥근 아치형으로 깎아냈으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애프스’라 불리는 반원형 공간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프레스코화가 매우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한, 로마 황제 마커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시대인 310년경 순교한 로마의 군인으로 알려진 성 테오도르(St. Theodore)와 창을 들고 악룡을 죽이는 백마 탄 기사 성 게오르기우스(St. Georgius, 영어: 조지 George)의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각각 북쪽 벽과 남쪽 벽에 남아 있다. 이미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프레스코화들은 상당히 양호한 보존 상태를 자랑한다. 후세 화가들이 남긴 성 게오르기우스의 그림을 떠올리며, 벽화 앞에 잠시 머무른다.
악룡을 물리치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전설은 카파도키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옛 카파도키아 왕 세르비오스(Selbios)의 왕성이 있던 라시아(Lasia) 근처의 작은 마을 시레나에는 사람을 헤치는 기괴하고 무서운 악룡이 호수에 살고 있었다. 악룡은 매일 두 마리의 양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고, 양이 바닥이 나자 악룡은 독기를 뿜어내며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다. 결국 마을에서는 사람을 악룡에게 바치게 되었고, 시레나라는 작은 마을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제물로 바칠 사람이 없게 되어 왕의 외동딸까지 바쳐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왕은 공주에게 보석을 주며 멀리 도망가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악룡의 분노만 키우게 되었다.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게오르기우스는 악룡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공주가 용의 제물이 되기로 한 날 호수에서 악룡과 싸우게 된다. 독을 뿜어내는 용이 입을 벌린 순간, 그는 가지고 있던 긴 창으로 용의 입속에 일격을 가해 악룡을 제압한다. 게오르기우스는 공주의 허리띠로 죽은 악룡을 꽁꽁 묶어 마을로 끌고 가며,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룡을 물리쳤으니 사전에 약속한 개종의 약속을 지키라고 말한다. 이에 이교를 믿던 마을 주민들은 게오르기우스와의 약속대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성 바바라 예배당 (St. Barbara Church)
성 바실리 교회를 관람한 후, 성 바바라 예배당으로 향했다. 예배당 입구 왼쪽 벽면에는 오디오 가이드 번호 13번과 함께 튀르키예어 "Azize Barbara Sapeli"와 영어 "St. Barbara's Chapel"이 나란히 적힌 팻말이 부착되어 있었다. 하단에는 간단한 주의사항이 함께 안내되어 있었다. 이곳 역시 외부와 내부에 보강재를 사용해 벽면을 뿜칠로 덮어 보존 조치를 한 것이 눈에 띄었다.
입구와 내부엔 직원들이 상주하며 관광객들이 벽면의 그림을 손으로 만지는 등 훼손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
중앙 돔에는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와 기하학적인 무늬로 이루어진 십자가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 벽화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동굴 벽화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되기 마련인데, 성 바바라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는 특수한 기법으로 벽이 물감을 흡수하도록 그려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법 덕분에 이곳의 벽화는 다른 곳에 비해 원형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성 바바라 예배당은 벽화와 그 보존 상태가 돋보이는 공간으로, 동굴 교회의 독특한 역사와 종교적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동굴 교회를 관람하며 본 프레스코화를 통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비교해 보았다. 성경이 책으로 정리되기 전, 이러한 벽화들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주요 사건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프레스코화에 묘사된 예수님의 탄생 장면과 성경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벽화는 당시 신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신자들이 성경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그 신앙의 순수성과 역사성을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당시 처녀였으며, 나사렛 마을의 목수 요셉과 약혼한 상태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어느 날,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다"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 계시는 [누가복음 1:26~38]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계시를 듣고 가장 놀란 이는 아마 마리아와 요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며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라고 순종한다. 반면, 요셉의 입장은 달랐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관습은 약혼 후 1년 동안 부부가 따로 지내는 것이었으나, 약혼은 법적 구속력이 있어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가졌다. 따라서 약혼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면, 이는 간음으로 간주되었고, 매우 엄격하게 다뤄졌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는 것이 규정되어 있었다. 신명기 22장 24절에 "너희는 그 처녀와 그 남자를 성읍 문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이라"는 구절에서 보듯, 혼전 순결과 간통에 대한 법적 처벌은 매우 엄격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이 관습과 마리아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요셉의 입장은 경천동지 할 정도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그는 조용히 그녀와 헤어지려 했지만, 이 결정은 집안 어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때 대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요셉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당시 로마 제국은 모든 유대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요셉은 임신으로 배가 불러오는 마리아와 함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 모두가 고향으로 이동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길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어디서든 숙소를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한 마구간에서 머물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겸손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예수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이들은 근처에 있던 목자들이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이 기쁜 소식을 전했고, 목자들은 서둘러 마구간으로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복하며 경배했다(누가복음 2:8~20). 그뿐만 아니라 동방에서 온 박사 세 사람도 하늘의 별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예견하고 찾아왔다. 이들은 예수님께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이라는 귀한 예물을 바치며 경배했다. 성경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태복음 2:11).
황금은 왕과 존경을, 유향은 구세주 또는 대사제를, 몰약은 죽음을 이긴 분, 즉 신을 상징하는 성물이었다. 이 세 가지 예물은 예수님의 왕권,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 당시에는 이러한 이야기를 기록할 성경 책도, 기록할 방법도 충분치 않았던 시기였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관한 이야기들은 구전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성경의 사건들을 가장 선명하게 시각적으로 전한 것이 바로 수도사의 골짜기에 있는 프레스코화들이다. 이곳의 프레스코화는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당시 성경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신앙적 이야기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특히 기독교의 중요한 사건들인 예수님의 탄생, 순교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교회의 역사 등이 이러한 프레스코화에 생생히 담겨 있다. 성경의 이야기가 기록될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수도원에 남아 있는 이러한 그림들은 신앙의 전통을 시각적으로 보존하고 오늘날까지 전달해 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수도사의 골짜기에 있는 예배당과 교회의 벽화들은 주로 암석 표면에 직접 그리는 방식과 함께 프레스코 세코,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벽화들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 기독교 역사와 같은 주제를 표현한 그림들로, 당시 문자로 기록할 수 없었던 신앙적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프레스코화는 벽면에 석회나 석고를 바른 후 그 위에 수성 안료로 그리는 기법으로, 물감을 벽에 흡수시켜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게 한다. 특히 괴레메 지역의 수도원의 벽화들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며, 오늘날에도 그 선명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유산들은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수단을 넘어,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와 역사적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은 이러한 벽화들을 보존하고 관리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써 수도사의 골짜기 역시 그 일환으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수도사의 골짜기는 기독교의 유산이자 인류사적으로도 중요한 유적지로, 4세기부터 13세기까지 천 년 동안 이어진 수도 생활의 흔적을 담고 있다. 필자가 짧은 시간 동안 관람한 소견으로도, 이곳은 종교적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카파도키아를 방문하는 누구에게나 꼭 한 번은 보아야 할 문화유산이다. 동굴 교회와 수도원의 벽화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을 포함한 기독교 사건들을 표현하고 있어, 이를 통해 당시의 신앙과 종교 예술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동굴 벽화들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 기독교의 역사적 사건을 시각적으로 기록한 유산이다. 필자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파사드에 조각된 '탄생과 수난' 장면들과 비교하며, 수도사의 골짜기의 동굴 벽화들이 서양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러한 유사점은 기독교 예술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한편, 수도사의 골짜기를 충분히 탐방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루나 이틀 정도 시간을 들여 교회와 수도원 시설을 좀 더 자세히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면 더 깊이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짧은 일정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부족한 글이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더 깊이 있는 정보는 아래의 사이트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는 수도사의 골짜기에 건축된 예배당과 교회, 수도원 시설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https://neredekalinir.com/kapadokya-hakkinda/
https://www.cappadociahistory.com/blog
#튀르키예여행 #터키여행 #여행에세이 #세계여행 #여행처럼살자 #튀르키예국민을응원합니다 #희망의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