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스럽고 오묘한 신의 조화 카파도키아와 성스러운 기독교 성지 데린쿠유
신비스럽고 오묘한 신의 조화이기도 한 땅,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에서의 여정은 그 자체로 자연과 인간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시간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수많은 세월 동안 형성된 대자연의 신비와 그 안에 녹아 있는 인류 문명의 층층이 쌓인 흔적들을 마주하게 되는 장소였다. 카파도키아의 풍경은 말 그대로 상상력을 넘어서는 경이로움과 신비를 품고 있으며, 그 속에서 인간은 한낱 자연의 찰나적인 일부일 뿐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곳을 ‘기기묘묘’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 지형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깊이와 복잡함을 지닌 풍경임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자연의 침식과 풍화 작용이 만들어낸 요정의 굴뚝, 협곡, 그리고 수많은 골짜기들은 지구의 오랜 시간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곳은 고대부터 이어진 인류 문명의 발자취가 깃든 장소이기도 하며, 끊임없는 전쟁과 세력의 변화 속에서 역사적 격동을 겪어온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자연과 역사의 조화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한다. 카파도키아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은 단순한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경험을 선사하며,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카파도키아는 사람들에게 경이로운 자연과 이 땅에 얽혀 있는 복잡한 역사를 통해 깊은 감명을 남기며, 떠나는 순간에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 장소가 된다.
괴레메 수도사의 골짜기를 떠나며 아쉬움이 가득한 순간, 튀르키예 여행 5일 차 여정은 카파도키아 괴레메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가량 이동하여 데린쿠유로 이어진다. 이번 여정을 통해 자연은 항상 인간의 상상력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무한한 영역이요 존재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 무한함은 그저 단순한 크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오묘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때때로 이를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아 고민에 잠기게 한다.
이틀 간의 짧은 여정으로 둘러본 카파도키아는 지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카파도키아의 파노라마는 충격적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심오한 자연 그 자체였다. 과연, 자연의 영역과 신의 영역은 따로 존재할까? 적어도 자연과 신의 영역 간 경계가 있을 수 없다는 막연하지만 때때로 확신에 찬 느낌이 드는 카파도키아의 파노라마가 떠오른다. 자연의 시간으로 보면 지극히 찰나일 뿐인 인간으로서, 기기묘묘한 카파도키아의 풍경을 바라보며 ‘신비스럽다’, ‘오묘한 신의 조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전부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카파도키아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의 상상력과 신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장소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여행을 통해 이들은 그 경이로운 자연과 복잡한 역사를 경험하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마음에 새기게 될 것이다.
카파도키아는 네브셰히르, 괴레메, 카이세리, 우치하사르, 위르귀프 등 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 협곡과 골짜기, 요정의 굴뚝 등으로 이루어진 고대 카파도키아 왕국의 땅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이곳은 오늘날 '카파도키아 파노라마'라 불리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형성된 곳으로, 풍화와 침식 작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카파도키아는 단순히 기이한 지형과 신비스러운 풍경만이 있는 장소가 아니다. 이 지역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 문명의 역사가 단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땅이기도 하다.
기원전 수 십 세기 전부터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의 충돌과 이 땅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이곳은 인류의 역사가 결국 세력과 문명 간의 충돌로 빚어진 전쟁의 역사임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는 땅이다. 문명과 제국의 흥망성쇠는 항상 땅과 함께하며, 한 나라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나라 또는 여러 나라와 세력이 무너져야 하는 역사의 필연성이 이곳에 고스란히 쌓여 있다.
따라서 카파도키아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인류의 복잡한 역사와 자연의 경이로움이 얽혀 있는 장소로서, 그 풍경 속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카파도키아는 18세기경 프랑스의 한 수도사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왜? 어쩌다 프랑스의 선교사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을까?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던 카파도키아를 이네들은 왜 적극적으로 알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슬람교를 믿는 이네들의 삶에는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는 ‘적극적 또는 반드시’와 같은 가치관과는 다소 다른 ‘인샬라 in shā΄ Allāh’라는 삶의 방식을 채택한다. 이는 ‘알라가 원하신다면’이라는 의미로, ‘알라의 뜻이라며’ 다분히 신에 의지하고 맡기는 태도가 일반적이다. 장사가 잘 되지 않으면 그 이유를 고민하기보다, 종교적인 습관에 따라 인샬라를 되새긴다. “오늘 못 팔면 내일 팔면 되고, 내일 못 팔면 죽어서 팔면 되고, 오늘 공치면 내일은 괜찮겠지”라고 웃으며 유머러스한 삶의 태도를 지니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저 알라의 품에 있으니, “알라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실 것이다.”라는 종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선호하거나 가치관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슬람교를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의 짧은 생각으로 이러니 저러니 할 일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종교적인 습관에서 비롯된 맹목적이기까지 한 가치관이 아닐까 싶은데,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적극적이랄까, 우리의 적극성에 이네들의 ‘인샬라’를 조금 가미하면 행복지수는 조금 높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슬람교를 믿는 이네들은 카파도키아 천혜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널리 알리지 않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여행하게 된 프랑스에서 여행 온 수도사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프랑스 수도사는 이곳을 돌아보며, “아니 세상에 어찌 이런 데가 다 있나!, 이게 뭔가!”라며 믿을 수 없는 풍경에 매우 놀라워하며 동굴과 지하 도시에 사람들이 살고 교회가 건축된 모습, 요정의 굴뚝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와 협곡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수도사는 삽화와 함께 카파도키아 여행기를 《르 몽드》에 연재한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사진을 찍고 저장할 수 있는 시대지만, 사진이 없던 당시 삽화로 그려진 카파도키아의 풍경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장면들이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정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문을 펼쳐 들며, 카파도키아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인류 문명의 단층과도 같은 공간으로,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자연의 영역이자,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성스러운’ 신의 영역이었다. 이렇게 카파도키아는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는 카파도키아를 여행하며 느꼈던 여러 생각들이 전혀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카파도키아의 풍경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상의 범위를 벗어나고 다소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틀 간의 일정을 소화하며 카파도키아를 떠나는 오늘에서야 조금씩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메모할 수 있게 되었다. 버스는 괴레메를 떠나 약 30㎞가량 달렸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난 오전 10시 10분이었다. 카파도키아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그와 친구들을 태운 버스는 이내 네브셰히르 지하 도시인 데린쿠유에 도착하게 되었다.
성스러운 기독교 성지 데린쿠유 지하 동굴도시 Derinkuyu Yeralti Sehri (Derinkuyu Underground City)
1985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데린쿠유 Derinkuyu는 ‘깊은 우물’, 또는 ‘깊은 구덩이’를 뜻하는 말이다. 튀르키예어 derin은 깊은, 심오한 kuyu는 샘, 우물, 땅속으로 깊이 들어간 굴이나 구덩이를 나타낸다.
그는 한국어의 '구유'와 튀르키예어의 'kuyu' 발음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어에서 '구유'는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으로, 흔히 큰 나무토막이나 큰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 만든 것을 의미한다. 16세기 문헌에는 '구슈'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고어로는 '구'라고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교롭게도 로마자 표기인 'kuyu'도 같고 발음까지 유사하다. 한국어의 '구유'와 튀르키예어 'kuyu'는 모두 오목하게 파낸(凹) 구멍이나 구덩이를 의미하지만, 두 언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튀르키예어 'kuyu'는 땅을 파낸 구덩이나 우물을 뜻하는 반면, 한국어 '구유'는 돌이나 나무를 파낸 용기를 의미한다. 한국어 사투리에는 구덩이를 뜻하는 '구덕'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또한, 한국어 '구유'와 같은 의미의 튀르키예어 단어는 '야미리키(yemlik)'라고 읽고 쓴다. 언어학에 대한 논의는 아니므로 어원을 깊이 따질 필요는 없지만, 언어학을 전공한 적이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전개가 옆 길로 빠지는 셈이니 자세한 설명은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또한 과거 먼 옛날, 돌궐과 고구려인이 알타이산맥 동쪽 몽골 고원에 뒤섞여 살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상당수의 돌궐인이 고구려의 기층민이었고, 이들 간에는 상호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서로 간의 소통에 필수적인 언어가 뒤섞일 수 있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가 영어와 한자를 혼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몽골고원에서 떠돌던 북방의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중국에서 오랑캐라 멸칭하던 돌궐족은 기원전 3세기 무렵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떠오른다. 중국이 사용한 ‘오랑캐(우량카이 Uriankhai)’, ‘흉노 (匈奴)’라는 개념은 북방 유라시아 유목 민족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우리 조상 동이족(東夷族)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의 멸칭이다. 고대사 침탈에 혈안이 되어있는 오늘날의 중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주변 국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흉노(匈奴-민족을 지칭하는 匈에 노비라 멸시하는 奴를 천박한 노예, 시끄러운 노예, 중국 진나라 때에는 융적(戎狄)이라고도 하였음), 동이족(東夷族-동쪽의 오랑캐(東胡-匈奴의 동편에 있는 오랑캐), 몽고(蒙古 우매한 놈) 등 중국이 주변 국가를 지칭하는 멸칭을 폭넓게 그리고 상습적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몽골 초원에 제국을 건설한 민족들이다. 중국의 진나라는 이 때문에 동북방 만 리(萬里)에 걸쳐 장성까지 쌓게 된다.
668년 고구려의 멸망 후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이 돌궐로 이주하였으며, 682년 동돌궐 제국이 수립될 당시 인구의 절반가량이 고구려 유민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들 간의 언어적 연관성은 ‘우랄 알타이어족 Ural-Altaic languages’라는 같은 언어 계열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는 그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데린쿠유 이야길 하다 잠시 동아시아 고대사까지 이야기가 벗어났다.
지하 동굴도시에 관한 문헌상의 최초 기록은 아테네 출신의 그리스 군사학자인 크세노폰 Xenophon의 아나바시스 Anabasis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문헌에 따르면 “아나톨리아반도의 사람들은 지하에 동굴을 파서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을 건축하였고 가축이나 곡물을 저장하는 시설을 갖추고 잘 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히타이트 제국 시대엔 동굴 생활을 즐기는 별장의 개념으로도 사용되었다.
데린쿠유는 깊이 85m까지 내려가는 지하 8층 규모의 거대한 지하 도시로 기원전 8~7세기경에 게르만계 민족인 프리지아인(人)에 의하여 처음으로 만들어진다. 이후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온 초기 기독교인들이 숨어들었으며, 7세기경엔 이슬람 세력의 습격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거주지 유적은 모두 AD 5~10세기의 중기 비잔틴 시대에 속하는 것들이다.
8세기 몽골의 티무르 침략과, 780부터 1180년까지 이어진 아랍과 비잔틴 전쟁 동안엔 우마이야 아랍 및 압바스 군대의 습격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현재도 계속 발굴과 조사가 이루어지는 카파도키아의 전역에서 발견되는 지하 동굴도시는 카이세리 Kayseri와 네브셰히르 Nevşehir 지역에서 최소 200층 깊이의 지하 도시 40개 이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수용 규모는 3,000~5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지하시설로, 넓이는 약 185㎡, 연면적은 650㎡에 이른다. 카파도피아 지역에는 데린쿠유와 유사한 지하 도시가 약 3,000개가량이 존재한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이 지하 도시 중 여행자들에게 공개된 곳은 그가 오늘 관람하는 데린쿠유와 이곳에서 약 2㎞의 지하터널로 연결된 카이마클리 Kaymaklı지하 도시가 있다.
이들 지하 도시에는 예배당, 학교, 식당, 침실, 부엌, 마구간, 창고, 와인 저장고, 상점, 배수구, 지상으로 뚫려있는 환기구와 일반적인 통로보단 다소 넓은 커다란 통로, 다른 지하 도시로 연결되는 터널과 미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기능적인 차단 장치와 긴 창으로 공격을 할 수 있는 구멍 등이 갖추어져 도시로서의 기능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또한, 피신 생활을 동안에도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2층에 아치형 천장을 갖춘 넓은 방은 교육과 연구, 종교적인 강론 등이 이루어지는 시설로 추정되고 3층과 4층 사이에는 십자형 교회로 연결되는 수직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지상으로 뚫려있는 환기구와 커다란 통로는 환기와 함께 물을 운반하는 용도로, 때로는 신속하게 사람들이 숨을 수 있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데린쿠유와 같은 카파도키아의 지하 동굴도시는 기독교 박해 시대에 종교적 피신처로 사용되었다. 박해가 끝나고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기독교 신앙의 타락을 우려하며 순수한 신앙을 찾기 위한 수도사들의 수도원으로 몇 백 년간 활용되었다. 또한, 아나톨리아 반도가 기독교 세력의 땅에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점령된 후에도 이곳은 종교적 피신처로서의 역할을 지속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데린쿠유의 발견은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대개의 지하 도시들은 역사 속에 묻혀 있었으나, 마을에서 닭이 사라지는 일이 잦아지자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닭을 찾기 위해 구멍으로 들어간 한 아이가 갑자기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은 수색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지하 도시가 발견되었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혹은 공사 중에 땅을 파다가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이로 인해 이 땅에 얼마나 더 많은 동굴이 숨겨져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대부분의 발굴조사는 하버드와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 전공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카파도키아의 지하 동굴도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데린쿠유 지하 도시는 현재 3층까지만 여행자에게 공개되어 있다. 이곳은 미로처럼 얽혀 있는 작은 길들이 사방팔방으로 이어져 있어, 반드시 로컬 가이드를 따라야만 한다. 동굴의 입구는 네브셰히르에 있으며, 동굴로 들어가면 지하로 남쪽의 니데(Niğde) 지방의 마을 아그카사르(Ağcaşar)로 연결된다. 카이막클리(Kaymaklı) 지하 동굴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2㎞ 거리에 위치해 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길을 잘못 들면 3년이 지나도 나오지 못할 수 있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지하 도시이다.
그는 지하 3층까지 내려가 데린쿠유 관람을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가 본 동굴도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인간의 의지는 때로 전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저 ‘인간의 의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데린쿠유 지하 동굴도시는, 살기 위해 동굴을 파야만 했던 사람들의 절실함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야 했던 이들의 고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살짝 드리운 데린쿠유 광장을 걷고 있는 여행자들은 지하 동굴도시에 남아 있는 어마어마한 인류 문명의 역사를 목격하고 있었다. 광장 건너편, 하얀색 벽에 붉은색 지붕이 덮인 2층 건물의 앞마당과 벽, 그리고 좌판에 진열되어 걸려 있는 크고 작은 다양한 모양의 붉은 토기들은 이곳 지하 도시에서도 상당히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개미굴 같은 지하 동굴에서 곡물과 음식을 저장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아바노스 도자기 마을에서 만들어진 토기만 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데린쿠유 문자 조형물 앞에서 여행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으며 머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광장 한편에서는 오렌지와 석류를 좌판에 가득 쌓아 놓고 주스를 만들어 팔고 있는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가득한 환한 미소는 마치 이곳의 끝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의 손길은 세월의 따뜻함과 여유를 담아내는 듯했다. 그는 150리라를 지불하고 즉석에서 착즙 하여 만든 오렌지와 석류 주스 세 잔을 건네받아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마셨다. 주스 잔 속에 비친 노부부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따뜻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미소는 잔잔한 햇살 아래에서 더욱 빛났고,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였고, 알 수 없는 평화로운 기운이 노부부에게서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노부부가 건네준 주스 한 잔은 그들이 데린쿠유에서 받은 비현실적 문화적 충격을 부드럽게 녹여내는 듯했다. 지하 도시에서 사람들이 개미처럼 살았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 어려웠지만, 주스를 마시는 순간, 그들의 마음은 차츰 평온을 되찾아갔다.
데린쿠유 지하 동굴도시는 카파도키아의 숨겨진 보물로, 그 깊은 땅속에 감춰진 성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단순히 건축물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과 신앙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데린쿠유의 구조는 그 자체로 경이로움을 자아내며, 이 지하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여행자들이 데린쿠유의 입구에 들어서면 이곳의 깊이와 신비로움에 압도당할 것이다.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떠올랐다. 동굴의 벽에는 고대의 기독교 상징이 새겨져 있었고,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였으며,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스며들어 있는 장소였다.
이 지하 도시의 구조는 복잡하면서도 실용적이었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통로와 방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수도원, 주거 공간, 그리고 저장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존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였다. 여행자들은 이러한 구조를 통해 인류의 지혜와 적응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핍박 속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깊은 땅속으로 숨었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믿음과 신앙을 지켜 나갔다.
데린쿠유는 단순한 지하 도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신앙의 상징이자, 종교적 믿음과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이다.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생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데린쿠유의 차가운 돌 벽은 그곳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남긴다.
지하 동굴 도시를 떠나는 순간, 여행자들은 단순히 과거의 유적을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낀 감정과 깨달음이 오랫동안 그들의 마음속에 남을 것임을 알았다. 데린쿠유는 그의 기억 속에서 성스러운 성지로서,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장소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그의 여정은 카파도키아를 떠나 끝도 없이 펼쳐지는 튀르키예 평야지역을 따라 튀르키예 땅 한가운데인 실크로드 루트 콘야 Konya로 갈 예정이다. 실크로드 상인들의 숙소 오브룩 한 Obruk Hanı 카라반 사라이 Selçuklu kervansarayıdır, 지진으로 인해 땅이 꺼지고 지하수가 생겨난 오브룩 담수호 Obruğu(gölü)에도 들릴 예정이다. 시간상 도중에 입구경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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