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로 끌어올려지는 불안

2025년 3월 1일

by 양동생

예상할 수 없는 불행은 사람을 기이하게 만든다. 예컨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사무실에서 해고 통보를 받는 것보다는,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해고 소식을 오늘 금요일 오후에 들었을 때가 더 괴롭다. 구체적인 슬픔보다 모호한 불안이 인간을 더 불편하게 한다. 그것은 수면 아래서 조용히 움직이는 해파리처럼, 형체는 불분명하지만 찔리면 분명히 아프다.


나도 그런 감정을 가끔 느낀다. 역시나 누나에 대해서다.


누나는 나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특별히 미워하지도 않는’ 쪽보다는, ‘묘하게 불편해하는’ 쪽에 가깝다는 건 이미 여러 번 말한 사실이다. 물론 이건 내가 느끼는 방향의 감정이고, 누나가 아니라고 하면 나로선 반박할 근거도 없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온도라는 건 체온계로 측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뉘앙스와 무게감, 어깨 근처의 공기 흐름 같은 것으로 서로를 읽는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면 나는 어쩐지 더 신경이 쓰인다. 그건 무섭다기보다는 약간 찝찝한 기분이다. 운동화를 신었는데 양말 속으로 모래알이 하나 들어온 것처럼, 걷는 데 지장은 없지만 계속 의식하게 되는 종류의 감정. 어쩌면 나는 누나와 멀어질까 봐 걱정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방식은 늘 그렇게 약간은 유치하고, 약간은 우습다.


그럴 때면 루틴을 붙잡게 된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커피를 내리고, 같은 방향으로 공원을 돈다. 하루에 한 번은 사과를 먹고, 일주일에 한 번은 창문틀 먼지를 닦는다. 이런 것들이 내 하루의 균형을 맞춰주는 추 같은 역할을 한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에는, 이런 자잘한 리듬들이 나를 나로 있게 한다.


누구는 그런 루틴에 극단적으로 매달린다. 운동에, 채식에, 언어 규범에, 정치적 신념에.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옳다'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보다는 그 말 뒤에 있는 불안에 더 주목하게 된다. 어쩌면 그들도 불안한 세계 속에서 자기만의 안전지대를 만든 것뿐이니까. 나의 루틴은 누나에게 카톡을 줄곧 보내는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누나를 생각하고 있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에게 누나는 여전히 익숙하고도 낯선 존재다. 가까우면서도 멀다. 누나의 눈빛 하나, 말투 하나에서 나는 나만의 언어로 메시지를 해석하고 또 오독한다. 누나는 아마 모를 것이다. 내 마음속에 자리한 작은 해파리 하나가, 그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도 살짝 흔들린다는 걸.


세상은 쉽게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사랑을 의심하고, 친밀함을 거리낌으로 오해하고, 다름을 틀림이라 여기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나는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려 한다. 누군가와의 거리에는 정확한 답이 없다는 걸 알기에.


불안은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서 조금 멀어지고, 또 조금 가까워지는 일을 반복하며 하루를 산다. 확신은 없지만, 조용히 믿는다. 그 찝찝함조차,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2화누나와 나들이를 가고 싶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