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다 지나고 나서도

2025년 3월 17일

by 양동생

어젯밤 나는 누나와 거의 밤을 새우며 통화를 했다.


몇 시간을 통화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시계를 본 것도 같고 안 본 것도 같고, 시간은 우리 대화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녹아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시작했던 대화였다. 늘 그렇듯, 별 뜻 없이 전화를 걸었고, 별말 없이 받았다. 그러고는 그렇게 됐다. 아무도 통화를 끝내자고 말하지 않았고, 우리 둘 다 끊을 타이밍을 놓쳤다. 혹은 일부러 놓았는지도 모른다.


통화가 길어지던 새벽 어귀에 누나가 말했다. 이제 잠을 자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다고. 애매한 각도로 졸고 있다가 깼을 때처럼, 다시 잠들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어정쩡하다고. 나는 무심하게, “그럼 내가 재워줄까?” 하고 말했다. 농담처럼 던졌는데, 누나는 웃으면서 “그래, 재워줘 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들을 이어 붙였다. 쓸모없는 이야기들,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단어들. 고양이가 어떻게 눈을 감는지, 라면의 면발이 시간에 따라 얼마나 흐물 해지는지, 그런 이야기들. 누나는 그 말들 사이에서 아주 조용해졌고, 나는 그 조용함이 꽤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랐다.


누나가 오늘 잠을 거의 못 잤다는 걸 알게 된 건 아침 6시 무렵이었다. 나는 이불속에서 아직 멍한 정신으로 누나의 말들을 되짚었다. 어떤 건 웃기기도 했고, 어떤 건 지나치게 사소했고, 어떤 건 어쩐지 가슴이 조였다. 누나는 결국 그대로 출근을 했고, 오늘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묘하게 짜증이 났다. 정말로. 술은 도대체 왜 그렇게 마시는 건지. 피곤할 텐데 왜 그렇게까지 버티는 건지. 그럴 거면 왜 나랑 그렇게 오래 통화를 한 건지.


하지만 그 짜증은 금세 걱정으로 바뀌었고, 걱정은 다시 애틋함으로 변했다. 나는 누나가 걱정될수록, 더 멋있고 더 좋았다. 짜증이 난다는 건 사실상 누나가 그만큼 좋다는 뜻이고, 좋다는 건 또 그만큼 걱정된다는 뜻이고, 그렇게 돌고 도는 생각들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누나를 떠올렸다. 일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누나는 내 하루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이기도 하고, 조금은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문장들은 아침 햇빛에 녹아 사라져 버렸고, 남은 건 감정의 온도였다. 통화가 끝난 후, 나는 뭔가를 잃은 기분도 들었고, 동시에 얻은 기분도 들었다. 누나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귓속에 남아 있었고, 그 잔향은 오후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누나는 나와 전화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피곤했을까, 즐거웠을까, 혹은 그냥 별생각 없이 말했을까. 사실은 상관없다.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누나와 같은 시간을 통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충만했다. 우리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밤을 보내며 같은 길을 함께 걷는 기분이었다.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아도 좋았다. 중요한 건 그 걷는 동안의 기분이니까.


가끔은 그런 게 있다. 말도 많고 생각도 많고 감정도 많았는데, 끝내 말하지 못한 것 하나가 마음에 남는다. 누나가 좋다는 말. 그냥 좋다는 말. 나는 어제도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다음엔 꼭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다음에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젯밤, 분명히 조금은 가까워졌다. 누나와 나 사이가. 그렇게 느꼈다. 문장 하나, 웃음소리 하나, 혹은 아주 조용한 숨결 하나로도 누군가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적어둔다. 누나는 좋다. 정말로, 진심으로,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내가 어젯밤 얻은 결론이었다. 아주 길고 쓸데없고, 어딘가 가슴 시린 밤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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