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이전에 무사히 데려다주는 일

2025년 5월 25일

by 양동생

이상하게도, 오늘은 아무 일 없이 술을 마시게 됐다. 계획된 약속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어딘가 자연스러운 타이밍 속에서 하루가 흘렀고, 흘러간 끝에 술을 마시는 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점심 무렵부터 조심스럽게 그 말을 꺼냈다. 오늘은 술을 같이 마실 수 있냐고, 그동안 미뤄둔 약속이기도 하다고. 대답은 늦지 않았고, 누나는 의외로 담백하게 "갈래"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어쩐지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무엇이든 억지로 되지 않아서 다행이고, 또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술은 성균관대역 근처의 작은 횟집에서 시작됐다. 누나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누나는 웃음이 많았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리듬감 있는 사람이었다. 대화 중간에 리액션이 끊기지 않고 돌아오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가끔, 자기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건 흔한 능력이 아니다. 횟집을 나와 걷던 길에, 우리는 갑자기 사주를 봤다. 자리에 앉아 있었던 노점 철제 천막 안, 말이 많은 사주쟁이가 있었다. 누나는 자리에 앉았고, 나는 옆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웃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재미있었다기보단, 누나가 재미있어하는 걸 지켜보는 일이 좋았다. 누나에겐 그런 구석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걸로 공기를 바꾸는 힘.


사주쟁이는 누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본래 어른인데, 겉으로는 어린아이처럼 굴며 세상을 버텨낸다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누나를 바라봤다. 어른이라는 말이 이렇게 다양한 층위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생각했다. 누나는 그 말에 웃었고, 또 틀린 것도 있다고 했다. 모든 말이 정답일 수는 없고, 가끔은 정답이 아니라도 괜찮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2차는 와인바였다. 조용했고, 음악이 흘렀고, 붉은 조명이 있었고,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병의 와인을 스무 분 만에 비워냈다. 빨리 마셨다는 데에는 아무 목적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흘러간 시간이 빠르게 감겼을 뿐이었다. 술에 취한 건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아니면 사람에 취한 건지는 확실치 않았다. 나는 그냥 천천히 누나를 바라보았다. 적당히 느슨하고,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 거리감이 오히려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차를 주차했던 외부 주차장을 찾지 못해 우리는 30분 가까이 거리를 헤맸다. 어두운 골목, 낯선 빌딩, 반쯤 지워진 골목 간판들. 나는 지도를 들여다보았고, 누나는 무심하게 옆을 따라 걸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가끔 나는 누나를 안기도 했고, 눈에 띄지 않게 지키기도 했다. 특별히 뭔가를 해준 건 없지만,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는 마음만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약속을 지켜야 했다. 누나가 남자친구와 정해둔 12시라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 조금 서두르듯 누나를 집에 데려다줬다. 집 문이 닫히는 걸 조용히 지켜봤고, 현관 불까지 확인한 후에야 나는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금은 이상한 감정 상태에 놓였다. 어떤 밤은 안심할 수 없고, 어떤 밤은 괜히 복잡해진다. 하지만 오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단순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고, 누나는 무사히 집에 들어갔다.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한 밤이었다.


안심이라는 건, 결국 누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지켜줄 거라는 확신이 있으면, 사람은 스스로를 조금 덜 힘들게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오늘 밤 나는 누나가 남자친구와 약속을 지킨다는 이유 하나로 안심할 수 있었다.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있는 상상은 늘 뭔가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 사람일 땐 묘하게 받아들여진다. 아마도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역할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고, 동시에 더 이상은 요구할 수 없다는 명백한 선이기도 했다.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특별하지 않았고, 어쩌면 더없이 평범했으며, 조용한 와인 한 병과 잃어버린 주차장과 안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런 하루야말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그 안엔 마음이 있었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들이 잔잔하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12시 전에 무사히 데려다주는 일. 그건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방식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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