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사준 스테이크

2025년 5월 23일

by 양동생

오늘 금요일 하루는 지갑에서 시작됐다. 누나는 전날 밤 자신의 지갑을 땅에 두고 갔다. 실수였지만, 나는 그걸 기꺼운 우연처럼 받아들였다. 다시 만날 수 있는, 명분이 분명한 이유. 세상엔 그런 우연이 생각보다 많고, 그중 일부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나는 지갑을 들고 누나를 만나러 갔다. 그것만으로 끝낼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함께 어딘가로 향했다. 누나가 가는 행사를 따라갔고, 나는 차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기다림은 조금도 낭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의 시간이 잠깐 멈춰 있는 그 순간조차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행사가 끝나고 우리는 분당 율동공원에 들렀다. 늦은 오후였다. 공원은 조용했고, 바람은 낮게 흘렀다. 우리는 호수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도, 특별히 무슨 감정을 나눈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야말로 가장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대화를 기억하긴 어렵지만, 걸었던 속도나, 그날의 햇빛, 발끝에 밟히던 자잘한 자갈의 감촉 같은 건 이상하게도 또렷이 남는다.


그날 누나는 부모님 이야기를 했다. 결혼까지 3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이상 어떤 생각도 겉으로 꺼내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 시간의 짧음과 단호함을 오래 곱씹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망설임 없이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결정이 평생을 끌고 간다는 것.


산책이 끝나고, 우리는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 원래 누나가 사주기로 한 약속이었다. 언젠가 스테이크를 사겠다고 말했고, 오늘 그 약속을 기어코 지켰다. 누나는 그렇게까지 말을 많이 하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해야 할 일은 결국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는 받아들였고, 누나는 조용히 계산을 마쳤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그냥 스테이크 한 끼였지만, 어떤 약속은 그 자체로 작은 위안이 된다.


식사는 조용했고, 마무리는 젤라토였다.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떠먹으며 나는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감기처럼 되새겼다. 젤라토는 금방 녹지 않았고, 입안에 오래 남았다. 어떤 감정은 그런 식으로 기억된다. 뚜렷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오래 녹아드는 여운 같은 것으로.


저녁이 되어, 우리는 내 집 앞 주차장에 잠시 멈췄다. 누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열고 기사 작업을 했다. 대선 후보 토론 정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고, 가끔 누나의 타자 소리를 들었다. 무슨 내용을 쓰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나는 그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작업이 끝난 뒤 나는 누나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회사 주차장에 세워둔 누나의 차를 내가 대신 몰고 갔다. 누나는 피곤해 보였고, 나는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하고 싶었다. 이유 없는 배려는, 마음의 가장 조용한 표현이 된다.


집에 돌아오니 밤은 이미 깊었다. 지갑에서 시작된 하루가, 스테이크로 이어지고, 젤라토와 조용한 기사 작업을 지나, 어두운 주차장에서 끝났다.


별일 없던 하루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기어코 사준 스테이크처럼, 어떤 약속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는 걸.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굳이’ 하는 모든 행동은 말보다 진하다.


그 하루는 조용히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젤라토처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5화파운데이션과 실종신고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