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덕질 자리를 내어주는 일

2025년 6월 1일

by 양동생

오늘은 긴 하루였다. 긴장과 웃음이 엇갈렸고, 다정한 말투와 장난기, 그 속에 숨은 애틋함이 교차했다. 하루의 시작은 “밥을 사줄래?”라는, 어쩌면 아무렇지 않은 말로 시작됐지만, 내게는 작은 용기의 표현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제안 안에는 ‘오늘 하루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사게 해 줘도 좋아”라는 말은, 어쩌면 기회를 달라는 부탁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이 있어도 되는, 그런 기회.


누나는 “왜 가”라고 했다. 장난스레 던진 말투였지만, 나는 그 안에서 ‘와줘서 고마워’라는 숨은 뜻을 들은 것 같았다. “차 버릴 거면 종민 택시 해도 돼”라는 말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얹었고, 누나는 단호하게 “차 안 버려”라고 답했다. 말은 짧았지만, 그조차 귀여웠다.


현장에서는 서로를 찾지 못했다. 나는 누나를 보지 못했지만, 누나는 이미 거기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햇빛, 비슷한 시간과 목적 속에서 우리는 엇갈렸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맸고, 멀리서 보면 다 비슷해 보인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아프게 다가왔다. 오늘 누나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그렇게 엇갈린 시간 끝에, 우리는 마침내 마주 앉았다. 점심으로 누나와 함께 따뜻한 쌀국수를 먹었다. 국물은 속을 달래기에 좋았고, 무엇보다 누나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식사 후엔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나른한 햇살 아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진지한 말도, 아무 쓸모없는 말도 다 좋았다. 말이 오가는 사이, 나는 순간순간 누나를 바라보았고, 마음이 고요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웃으며 수다를 떨다가,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짧지만 선명한 시간이었다.


저녁이 가까워졌을 무렵, 우리는 다시 말을 주고받았다. 누나는 내게 “술 좀 그만 마셔”라며 핀잔을 주었고, 나는 “와인을 마시고 싶다”라고 중얼거렸다. 누나는 “선거 끝나고 마시자”라고 했다. 거절도 허락도 아닌 그 말은 내게 ‘조금만 기다려줘’라는 뜻처럼 들렸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놓였고, 나는 “앗싸”를 외쳤다. 어른스러운 말장난이었다.


쇼핑 이야기도 오갔다. 나는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라고 했고, “찍어서 보내” 같은 말도 좋아했다. 누나의 ‘갑질’은 내겐 특권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엄청 잘생겼다, 누나야.” 고된 하루를 통과한 사람만이 갖는, 그 묵직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은 결국, 튀어나오는 말의 습관이다.


밤이 되고 누나는 차장님과 술을 마신다는 말을 했다. 나는 걱정 반 장난 반으로 “멋진 공주, 안전하게 마시고, 명예소방관은 대기 중이야”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건, 이 관계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작은 증거였다.


그 후로 나는 기다렸다. 누나가 귀가했는지, 오늘을 잘 마무리했는지. 몇 번이나 물었고, 확인하고 싶었다. 끝내 답은 오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오늘도 나는 누나의 하루 어딘가에 있었다. 중심은 아니지만 가장자리라도, 같은 페이지에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런 하루의 끝에서 나는 생각한다. 짝사랑은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자꾸 바꾸게 만든다. 그 사람을 향해 더 좋은 말투를 쓰게 되고, 더 예의 바른 내가 되고 싶어지고,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덕이란 결국, 누군가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마음 아닐까.


오늘 나는 누나를 기다렸다. 또 한 번. 그리고 괜찮았다. 기다릴 수 있다는 건, 여전히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 나는 누나를 조금 더 알고 싶었고,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었고, 결국은 그냥, 누나가 웃어주는 하루였기를 바랐다. 그거면 된다. 정말,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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