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고, 살아남아, 피우다

-워킹맘 강사이야기 14

by 꿈데이즈




살고 싶은
끈질긴 의지를
한 줌 흙에 묻고
뿌리를 내린다
줄기를 세운다

- 잡초 시 中-





초등학생 1학년때까지 건물로 빽빽한 도시에 살다가, 2학년 때 외할머니가 사시는 한적한 작은 지방으로 내려왔다. 마치 소나기의 소녀처럼 건강상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질병으로 바람 잘날 없던 나는 그 후, 자연이 함께하는 공기 좋은 지방에서 그렇게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


그곳은 그동안 내가 보지 못한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늘 호기심 많은 아이는 주변의 것들에 잔뜩 신기해하며, 이것저것을 쳐다보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다. 무릎에 피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또 넘어질 날이 많아, 두 무릎에는 늘 흉터로 가득했다. 그래도 늘 재미난 것이 많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세상 속을 걸어 들어갔다. 만약 넘어져 피가 나는 것이 두려웠다면 호기심을 갖기보다 길을 똑바로 걷는 것에 더 집중했을 텐데, 난 넘어지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고 관심 갖는 세상것들이 더 좋았다. 까이는 무릎이야 시간이 지나 아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내 별명은 '노력파'였다. 선생님이 시를 암기해오라고 하면, 제일 먼저 외워 검사 맡는 아이, 쉬는 시간에도 궁금한 것은 담당 선생님께 찾아가 질문하는 아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고 싶은 것은 꼭 하고 마는 아이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를 노력파라고 불렀다. '노력파'라...... 좀 씁쓸한 별명이다. 실력은 안되는데 마치 억지로 노력하는 그런 모습이었을까? 하지만 측은하면서도 왠지 정감이 간다. 난 그 별명이 싫진 않았다. 왜냐면 정말 그게 나인 것 같았으니 말이다. 뭐든 쉽게 물러서지 않는 나. 나는 그런 내가 좋았다. 세상을 쉽게 살고 싶지 않았나 보다.


어른이 되고 보니, 세상은 어렸을 적 세상보다 훨씬 더 크고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 쉽게 포기하며 살아온 나는 아니었기에 언제든 맞서 걸어갈 준비가 되었다. 순간순간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었지만, 힘들어도 내 인생이기에 그렇게 보듬고, 끝까지 걸어가 보고 싶었다. 아마도 나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그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그저 나를 믿고 싶어서였을까.


나를 위해 쓴 자작시





코로나 이후, 나는 세상의 시련 앞에 많이 무너져가는 것들을 보았다. 나와 같은 직종의 강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들 경제적인 시련 앞에서 강사이길 포기하고 다른 직업 노선으로 변경했다. 나 또한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이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단 얼마라도 마음 편하게 월급 받는 월급쟁이가 제일로 부러웠다. 단순 노동직 알바라도 해야 할까? 물류센터에 가서 일용직이라도 해야 할까? 물론 지금은 코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 시절엔 정말 갖가지 고민이 많았다.



그래, 강사이길 포기하지 말자.


나는 다른 강사에 비해 꽤 다양한 폭의 분야를 하고 있었기에, 코로나 시절에도 금방 큰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긴급 돌봄 인력으로 위기에 빠진 강사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었고, 또한 기초학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는 두드림 강사를 모집하기도 했다. 나는 그 두 개를 모두 지원하여 일반 월급쟁이 정도는 벌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원래 영어 개인지도도 해왔던 지라, 넓은 지역으로 확장해 가기 위해 관두었던 영어 개인지도 강사를 다시 시작했다. 다행히 두 세명의 학생을 맡아 영어지도도 하게 되었다. 줌을 이용해 중학교 영어 수업도 했다. 아무래도 코로나로 인한 학생들의 학력 차이가 점점 심해지다 보니, 학교에서는 보다 시급한 학력 부분에 강사를 고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전 성인 수업 기관 담당자에게 수업을 동영상 수업으로 진행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고민 끝에 무작정 수업을 휴강하기는 그러니, 동영상 수업으로 한번 진행해보자고 하셨다. 그래서 근근이 배운 동영상 편집기술로 수업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진행하였다. 반응이 좋았다.


줌으로 강의하는 곳이 점점 늘어났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도서관에서 큰 수요가 있었다. 공예와 미술도 줌으로 강의해보면 좋을 것 같아 수업자료를 diy형태로 제공해 수업 진행하는 것을 제안했다. 다행히 강사로 채용되어, 도서관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고 그 후 좋은 강사로 인정받게 되어 점점 더 도서관 수업을 확장해 진행하게 되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내 아이 공부를 더 많이 봐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다들 아이들 교육이 가장 문제였는데, 나는 오히려 그 기간에 아이의 학습을 더 체크해줄 수 있었다. 덕분에 아이는 자신의 공부량을 점점 더 늘려가며 더 많은 엉덩이 힘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했다.


그동안 공예, 미술, 영어, 독서, 국어 등 다양한 방면으로 경력을 쌓아왔던 나는 코로나 시절에도 큰 어려움 없이 그렇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특히나 위기라고 생각했던 순간, 새롭게 부각된 기술들을 다시 발빠르게 배움으로써 빠르게 변화해가는 시대를 쫓아갈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챙기지 못했던 나의 집 경제시스템도 챙길 수 있게 되면서 자산도 더 늘릴 수 있었다. 나는 더 다양한 방면에서 강사로 인정받게 되었고, 아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학습에 더 우수한 성적을 내면서 아이 나름대로 더 인정받는 학생이 되었다.


결국은 위기는 누구나에게 주어졌지만, 쓰러지지 않고 잘 견디어냈으며, 더 예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더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작은 성취들이 쌓여 언젠간 더 큰 성취를 거머쥐게 될 나를 안다. 아니 믿는다. 그런 자신감과 신뢰가 이렇게 쌓여가면 사람은 더 성장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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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바람에 잘 견디어 낸 꽃이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