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할아버지가 어찌 엄마 아빠를 대신할 수 있을까?
‘분리불안 증세가 대개 8개월부터 시작된다는데, 로아도 곧 출근하는 엄마를 붙들고 떼를 쓰기 시작하지 않을까?’
출근하는 현아에게 말을 건넨다.
‘아버님,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로아에게 주양육자는 이미 정해졌으니까요.‘
현아가 웃으면서 던진 쿨한 대답이었지만, 내 마음은 왠지 ‘쿨’하지만은 않았다.
사연은 이렇다.
‘아버님, 엊그제 로아가 아버님과 영상 통화하면서 흐느끼며 서럽게 울었던 적 있잖아요. 그 장면을 아기 키우는 친구들하고 공유하면서 로아가 우는 이유를 얘기해봤어요. 하나같이 로아가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서라는 의견이었어요. 수현이와 저도 같은 생각이고요,’
지난 토요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지방에서 가족 모임을 하고 귀가하는 중에 수현으로부터 영상 통화가 왔다. 로아가 연결되었다. 5시간째 운전 중이어서 피곤하던 참에 영상 속 로아의 모습, 갑자기 온몸에 생기가 돋는다. 운전대를 잡고 로아 모습을 곁눈질해 보는데도 말이다.
운전 중인 나를 대신해서 아내는 로아에게 한참이나 애교도 부리고 말도 걸고 율동까지 열심이다. 함께 있으면서 아내에게 나의 존재를 지우게 만드는 것은 커피였다. 아내와 내가 함께 차로 이동할 땐, 로스팅해 둔 커피를 정성 껏 드립해 커다란 텀블러에 담아 함께 마신다. 그런데, 아내 손에 들리기만 하면 나는 투명인간으로 한참이나 마른침만 삼킨다. 이제는 로아와의 영상 통화가 커피 자리를 대신한다.
아내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서야 선심 쓰듯, 운전대 앞으로 로아 모습을 옮겨준다. 전방을 주시하며 눈으로는 로아 모습을 흘끗흘끗 훔쳐보지만, 입은 부지런히 로아의 이름을 부르고 로아에게 말을 건넨다.
나와의 이 짧은 영상 통화 중,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영 상 속 이 할아버지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로아는 흐느끼면서도 시선은 영상 속 할아버지에게 집중하고 있다. 울면서 잠깐 방 안을 둘러보고는 곧바로 영상 속 할아버지에게로 시선을 고정한다. 운전 중이어서 영상 통화는 길지 않았다.
‘로아가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우는 것은 아닐까요? 내겐 꼭 그렇게 보여요.’
‘그건 아니겠지요. 나를 보기 전에 당신 모습 보고서도 좀 칭얼거리던데.’
로아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아내의 말에,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오히려 로아가 영상 속 할아버지를 낯선 사람으로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들어 낯을 가리기 시작하면서 영상 속 할머니 모습을 보고서도 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로아는 영상으로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으니, 영상 속의 할아버지는 로아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와 매칭 하기 어려웠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번 상황은 그저 일회성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이 할아버지를 그리워해서 울었다면, 일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피곤한 상태에서 잠투정이 시작되는 시점과 영상 통화 시점이 우연히 겹쳤을 수도 있다. 요즈음 로아의 잠투정은 보통이 아니다. 그것도 아니면, 영상으로는 처음 본 할아버지였던 만큼 어느 낯선 ‘할아버지’ 모습에 겁을 먹었을 수도 있겠다. 조명이 정리되지 않은 운전대에 앉은 할아버지 모습이 낯설게 보였을 수 도 있다.
그런데 아내의 말대로 로아가 할아버지 모습을 보고 갑자기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편으로는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두어 주 전 수현이의 해외출장으로 로아는 엄마와 둘이서만 주말을 보내면서 ‘이유 없이’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그것도 10여 차례나. 현아가 올린 동영상에서 로아의 울음은 짜증이 아닌 진한 서러움이 담겨있었다.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짠할 정도였다.
그때도 아내는 로아가 엄마와만 지내면서 매일 보던 아빠나, 매주 규칙적으로 보던 외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다고 했다. 이 할아버지보다 외할머니에게 더한 애착을 갖는지도 모른다. 우리 DNA가 그렇지 않을까? 현아에 따르면, 현아와 수현, 외할머니가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 로아는 엄마 아빠보다는 할머니를 더 많이 쳐다본다고 한다. 로아는 엄마 아빠와 함께 있으면서도 때때로 이 할아버지에게도 더한 애착을 보이곤 했다
사람에 대한 판단에서 아내의 느낌은 나의 이성적 판단보다 대체로 정확했던 적이 많았다. 이번에도 아내의 느낌이 맞는다면, 로아에게 소위 분리불안 증세가 시작된 것은 아닌지 싶다. 아기들은 대개 8개월부터 분리불안 증세가 시작된다고 한다. 주양육자가 자리를 비우면 아기들이 양육자와의 분리되는 데서 생기는 불안이다. 이번 일을 보면서 만 6개월 하고도 일주일을 넘긴 로아에게 혹시나 그 전조가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말대로 로아가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서 울었다면, 로아를 끔찍이 사랑하는 이 할아버지는 기쁜 마음이 들어야 할 것이다. 이제 로아와 애착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쁜 마음도 기쁜 마음이지만, 오히려 조심스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주양육자는 여전히 엄마 아빠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로아에게는 규칙적으로 만나는 주양육자가 여럿이다. 엄마와 아빠, 외할머니, 친할아버지다. 주말과 밤에는 엄마와 아빠가, 주중에는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교대로 로아의 양육을 맡는다. 아기의 안정적 발달을 위해서는 엄마와 같은 한 명의 주양육자와 강한 애착 관계를 맺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기존의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한 양육자에게 강한 애착 관계가 만들어지면 다른 양육자들과의 애착 관계 형성은 어려울 수도 있으며, 여러 명의 양육자가 있다는 것은 애착 관계 형성에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한다.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를 해소해 줄 반가운 또 다른 이론을 접했다. 최근 연구에서 기존의 이론과는 달리 아기는 여러 명의 양육자에게 동시에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임상실험을 통해 밝혀졌다고 한다. 다만, 기존 양육자가 새로운 양육자로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주양육자는 엄마 아빠이어야 하지 않을까? 엄마 아빠와 가장 많은 시간을 가장 오랜 기간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주양육자인 엄마 아빠를 대체할 양육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손주를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 아빠란 존재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보조 양육자일 뿐이다.
보조 양육자라 해서 손주에 대한 사랑이 엄마 아빠보다 적다거나 관심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손주 사랑과 육아에서 엄마 아빠를 제외하고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체할 양육자 역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 양육에서 엄마 아빠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다. 엄마 아빠가 여러 상황으로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해 주는 존재다. ‘보조 양육자’라기보다는 ‘보완 양육자’라는 용어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엄마 아빠 외에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기의 육아에 참여할 때 아기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이유이자 참여와 수고의 보람이다.
“아기가 생후 초기에 맺게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애착 관계는 매우 강력하고, 오랫동안 꾸준히 지속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떤 이유에서건 보모처럼 교체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격대 육아법의 비밀>에 인용된 아동임상심리학자인 샤론 라이언 몽고메리의 말을 인용해 본다.
어제 로아와 두 번의 영상 통화를 했다. 한 번은 수현이가 나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먼저 통화를 한 뒤, 로아를 바꿔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를 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또 울음을 터뜨린다. 로아의 마음을 헤아리자니 내 마음이 헤집어진다.
오후에 수현이가 다시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로아를 보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았지만 로아 마음을 생각하니 사실 받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했다. 이번에는 수현이가 로아의 반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걸었던 것이다. 반전 드라마라는 것은 이런 것일까? 로아는 새로운 장난감을 갖고 열심히 놀고 있던 참이었다. 영상 속 할아버지를 보더니 이번에는 즉각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로아 특유의 웃음을 짓더니, 할아버지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다시 놀던 장난감으로 관심을 옮긴다.
브라바, 우리 로아!
수현이가 자신 있게 이 할아버지와 로아의 영상통화를 다시 주선한 이유를 알겠다. 현아와 수현이가 주말에 로아에게 새로운 장난감도 마련해주고 더욱 관심을 갖고 함께 놀아주고 돌봐주어 주양육자의 타이틀을 이 할아버지로부터 회수해 갔다.
브라비, 현아 수현!
그런데... 정작 이 할아버지 마음은 왜 썰물과 밀물이 교차할까?
브라보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