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이 일어나는 공간, 휘티앙가
지난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연애의 행방’이란 책을 읽었다. 스키장에서 펼쳐지는 연애 소설인지라 ‘겔란데(gelände, 독일어; 스키장) 마법’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스키장에서는 사랑에 빠지기 쉽다는 법칙이라고 한다. 새하얀 설원의 분위기가 단점은 가려주고 장점을 부각해 주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도 있다.
나는 연애 초기에, 타고난 운동 신경의 소유자 사리씨에게 스노보드 타는 법을 배웠다. 겨울에 스키장이 개장하면 이른 아침부터 내복에 보드복을 두툼하게 껴입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따뜻한 모자를 챙겨 칼바람과 추위에 맞설 준비를 단단히 한 뒤 강원도 횡성이나 평창으로 향했다. 초급자 코스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법부터 배웠다. 그다음에 기본 동작만 익힌 후 보드 위에 서서 초급자 코스를 지그재그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보드가 익숙해질 만할 때, 리프트를 타고 난이도 중하 정도의 코스 위로 올라갔다. 초심자에게는 무서운 그 경사면에서 눈물 한번 쏙 빼면서 내려오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 스노보드를 타고 있다. 그 뒤로 수도 없이 사리씨와 스키장에 가서 설원을 누볐다. 리프트를 타고 슬로프를 올라갈 때, 코끝 찡하게 쌀쌀한 기운을 느끼며 발아래의 온통 새하얀 눈밭을 사리씨의 어깨에 기대어 보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더 선명히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이다. 그때 나에게도, 겔란데 마법이 제대로 일어난 것 같다. 지금도 사리씨와 함께 살고 있는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뉴질랜드 북섬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겨울에도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연히 눈도 오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코로만델 반도의 휘티앙가 타운 역시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기는 하지만 뉴질랜드의 휴양지답게 대체로 따뜻하고 온화한 편이다. 겔란데 마법이 일어나는 새하얀 설원의 스키장이 있을 리 만무하다. 대신 ‘하늘의 마법’이나 ‘노을의 마법’이라는 말이 생겨도 될 만큼, 바다와 하늘이 아주 일품이다. 쭉쭉 뻗어있는 야자수 산책로를 따라, 예쁜 소라와 조개껍데기가 숨어 있는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변, 햇볕을 받아 윤슬이 반짝이는 쪽빛 바다, 쏟아질 듯 많은 별이 반짝이는 은하수 밤하늘, 가볍게 나풀거리는 깃털 모양 흰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보이는 일출과 일몰, 그 어떤 마법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다.
뉴질랜드에 오고 나서 사리씨와 나는 더 이상 스노보드를 타지 않는다. 스노보드 대신에 종종 한가한 초저녁에 전동 스쿠터(킥보드)를 탄다. 최근에는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나의 스쿠터 선생님과 골프 선생님은 한 때 나의 스노보드 선생님이었던 사리씨이다.
얼마 전에 스쿠터를 타고 이웃 해변, 쿡스 비치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쿡스 비치로 가려면 바닷길을 건너가는 것이 빠르다. 우리나라라면 벌써 다리를 놓고도 남을 얕은 수심과 가까운 거리의 해로인데, 이곳 휘티앙가에서는 대중교통인 페리가 수시로 왕복 운행을 한다. 시내버스도 없는 작은 타운에, 페리가 대중교통이라는 것이 재미있다. 페리에 스쿠터를 같이 싣고 30초 정도 걸려 바다를 건넌다. 페리 위에서 보는 바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페리에서 내려, 목적지인 레스토랑까지 3km 정도의 거리를 스쿠터를 타고 오르막 내리막을 달린다. 지나가는 자동차는 어지간하면 볼 수 없는 오지의 시골길을 신나게 질주한다. 스노보드 타고 스키장 슬로프를 신나게 내려오는 기분이다. 나를 앞질러 내려가는 사리씨의 뒷모습이 스노보드 타던 시절의 모습과 영락없이 똑같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간조 시간이 되어 물이 빠진 해변에는 새들이 앉아서 쉬고 파도도 잔잔하기만 하다. 도착한 페리 선착장의 건너편에 우리 마을 휘티 타운의 불빛이 별처럼 깜박인다. 잠시 후 페리에 올라타니 이번에는 달이 휘영청 밝았다. 거울에 비친 듯 하늘에도, 바다 위에도 달이 하나씩 떠 있으니 그 모습이 고즈넉이 아름답다.
골프를 시작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다. 라운딩을 온전히 돌 실력이 되려면 갈 길이 멀다. 지금은 사리씨와 함께 골프장을 걷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휘티앙가 골프장에는 뉴질랜드답게 새가 많다. 잔디밭을 걷고 있으면, 멀리에서 짝을 부르는 듯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부산스러운 꼬맹이 같은 팬테일이 꼬리를 부채처럼 펼치며 꽁지를 올렸다 내렸다 날아올랐다 내려앉았다 하며 춤을 추듯 우리의 그림자를 따라다니기도 한다. 빼곡하게 머리를 내민 폭신폭신한 초록색 잔디밭을 산들산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걸으면, 그 풍경이 참 아름다워 골프 실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스쿠터를 접어들거나, 골프채를 들고 쫄래쫄래 선생님 사리씨를 따라 걷는다. 끝도 없이 깨끗한 맑은 하늘이 펼쳐진 날, 바람을 느끼며 새파란 잔디밭 위를 걷는 날도 있고, 멋진 석양을 배경으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해변을 걷는 날도 있다. 앞서 걷는 사리씨의 뒷모습을 한 발짝 뒤에서 보면, 불편하고 딱딱한 스노보드 부츠를 신고 무거운 스노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낑낑대며 철퍼덕철퍼덕 눈밭을 걸었던 때가 생각난다. 이내, 갈란데 마법이 일어났던 스키장과 이 아름다운 휘티앙가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에 가 닿는다. 그때에나 지금이나 하루하루 사랑이 깊어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