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볼 때도 트럭 모는 여자
과수원을 하셨던 외삼촌 댁에는 자동차가 두 대였다. 한 대는 가정용 세단 승용차, 다른 한 대는 업무용 1톤 트럭이다. 과수원의 복숭아 수확 철에는 가끔 외삼촌 댁에 가서 일을 도왔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봄여름 정성 들여 가꾼 복숭아를 따서 마당으로 옮겨온다. 과수원의 대장은 외삼촌이지만 마당에서는 외삼촌의 큰 딸인 사촌 동생이 대장이다. 사촌 동생의 지휘 아래 다른 일꾼들은 각자의 할 일을 한다. 동생은 저울에 복숭아 바구니를 올리고 한 개씩 크기와 무게에 따라 복숭아를 선별한다. 선별된 복숭아는 끼리끼리 같은 상자로 들어가야 한다. 엄마와 나는 복숭아가 다치지 않게 충전재로 감싼 후 상자에 넣고 포장한다. 복숭아의 등급에 따라 포장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이를테면, ‘꽃’이라 부르는 조금 두툼하고 폭신한 충전재로 감싸는 아기 엉덩이처럼 뽀얗고 포동포동한 최상품 복숭아가 있고, 얇은 종이로만 감싸 상자에 담는 어린 소녀의 발그레한 볼 같은 조금 작은 크기의 딱딱한 복숭아도 있다. 포장이 끝나면, 등급별 종류별로 나눠진 복숭아 상자를 차곡차곡 트럭에 싣는다. 복숭아 상자 생산자 칸에는 외삼촌의 이름이 찍혀있다. 복숭아 상자로 트럭 짐칸이 가득 차면, 복숭아를 실은 트럭이 읍내로 떠난다. 내게 추억의 1톤 트럭은 이런 용도이다. 시골에서 농기구도 싣고, 농산물도 실어 나르는 업무용 자동차 말이다.
트럭을 몰아도 되는 1종 보통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줄곧 세단 승용차만 운전했다. 오클랜드에 살 때 역시 세단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주로 출퇴근용이고, 쇼핑할 때나 가끔 교외로 나들이를 가도 사리씨와 나 두 명뿐인 단출한 식구에는 세단이면 충분했다. 휘티앙가로 오고 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모텔을 운영하는데 은근히 작은 가구나, 가전제품을 옮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객실이 16개이니 같은 물건을 한 번에 여러 개 사서 옮겨야 한다. 고가의 부피가 큰 물건, 이를테면, 냉장고나 세탁기, 침대나 소파를 산다고 다르지는 않다. 당연히 배달해주고 설치까지 마무리해주는 훌륭한 서비스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처럼 화물 운송이나 작은 짐을 옮겨주는 서비스를 받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모든 배달에는 머니(money)가 추가되고, 설치에는 더 큰 머니가 따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지간한 짐은 스스로 옮겨야 한다. 우리의 세단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도 업무용 트럭이 필요한 시점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흔한 1톤 트럭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승용차 뒤에 트레일러라고 부르는 짐을 실을 수 있는 장치를 연결하고 운행을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보트를 연결할 수 있는 보트 전용 트레일러도 많다. 트레일러 자체도 상당히 비싸고 자동차처럼 등록해서 번호판을 받아야 개인이 트레일러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렌터카처럼 트레일러만 대여해주는 업체도 있다. 우리는 트레일러를 사서 승용차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방식 대신, 세단 승용차를 팔고 거기에 조금 더 보태 유트(UTE)를 사기로 했다.
SUV(Sports Utility Vehicle)는 알아도 유트는 무엇일까?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나는 픽업트럭(Pick-up truck)을 뉴질랜드에서는 유트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차를 사면서 알게 되었다. 유틸리티 비이클(Utility Vehicle)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유트는 우리네 시골에서 사용하는 1톤 트럭처럼 전천후도 아니고 그보다 적재능력도 부족하지만, 이곳에서는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자동차다. 뉴질랜드 사람들도 유트라고 부르는 대신 “트럭”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을 차를 사고 나니 귀에 들린다.
우리가 사기로 한 유트는 뉴질랜드 남섬에 있다가 뉴질랜드 북섬 오클랜드로 넘어왔다. 캐노피(짐칸의 덮개)를 옵션으로 함께 주문했는데, 캐노피는 자동차 제조사가 있는 독일에서 뉴질랜드로 왔다. 오클랜드 자동차 서비스센터에서 유트에 캐노피를 장착하고 나서야 엄청난 크기의 자동차 전용 트레일러에 실려 우리 모텔 앞으로 배달이 되었다. 기존의 세단을 넘겨주고 유트와 자동차 키를 받았다. 주문부터 수령까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업무용으로 산 유트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보다는 사리씨가 주로 자동차를 사용한다. 모텔 살림을 실어 나르는 데 안성맞춤이다. 어지간한 크기의 물건들은 모두 실린다. 동네 페이스북 장터에서 중고로 사는 냉장고나 세탁기도 들어가고, 의자나 카우치도 척척 실을 수 있다. 비포장 오프로드가 존재하는 코로만델 산길도 잘 달린다. 모텔 운영에 필수품이다.
세단 승용차만 몰아본 나에게 유트는 무척 거대하고 무겁다. 운전할 때도 굉장히 묵직하다. 빈 곳이라고는 없이 차선 하나를 가득 채운 채 달리는 느낌이다. 자동차 문을 닫을 때 느끼는 문의 무게마저도 육중한, 유트를 몰고 계란이랑 양파 사러 마트에 가는 것은 부담스럽다. 더군다나 뒷 주차로 빈칸에 딱 맞게 요리조리 주차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뉴질랜드는 앞 주차를 주로 한다. 자동차의 앞과 꽁지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감이 오지 않아 자동차를 비춰주는 실내 카메라가 없다면 선을 맞춰 주차하는 데 한 세월 걸릴 것 같다.
세단을 몰다가 유트를 모는 느낌은 마치 월급쟁이로 살다가 갑자기 자영업을 하는 것만큼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그 옛날 복숭아 상자를 가득 싣고 시골길을 달리던 외삼촌의 트럭도 식구들의 생계가 실린 무게였을까? 복숭아에 일 년 치의 땀과 정성이 켜켜이 담겨 트럭에 실렸다고 생각하니, 새삼 그때의 짙은 파란색 1톤 트럭이 대단하다. 우리의 유트도 우리가 모텔을 운영하는 동안 우리의 삶과 모텔의 운명을 싣고 무겁게 달릴 것이다. 어찌 소중하지 않을까? 오! 유트!! 우리 소중한 유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