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와 캐시드럴 코브

아주 작은 우주 먼지 둘이 만나

by 리엘리

“사리*씨, 고사리나물은 언제 따는 거야?”

“고사리가 양지바른 무덤가에 주로 많이 있어. 어릴 적 고사리 딸 때 풍경이랑 기온을 생각해 보면 따뜻한 봄, 5월 초일 것 같은데. 한 자루 가득 고사리 따고 나면, 꽤 더웠거든.”


모텔에서 멀지 않은 캐시드럴 코브 하이킹 코스를 사리씨와 함께 걸을 때였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양과 종류의 고사리이기는 하지만 고사리의 나라 뉴질랜드답게 하이킹 코스 내내 거대한 고사리 군락이 이쪽저쪽에 많다. 우산 모양의 거대한 고사리 잎 부분이 풍덩 떨어져 대만 남아있는 것부터, 이제 막 고개를 내밀어 갓 부화한 새 마냥 축축한 갈색 털이 또르르 말려있는 어린 고사리까지 다양하다. 신기한 생장 모습을 보여주는 길가의 고사리를 보고, 궁금한 마음에 사리씨에게 고사리나물 수확 시기를 물어봤다.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는데, 사리씨가 찰떡같이 언제 고사리를 따는 것인지 알려준다. 그리고는 말을 잇는다.


“어렸을 때는 고사리 따는 것도 싫고, 엄마가 고사리나물 반찬 해주는 것도 싫었어. 실컷 놀고 싶은데 고사리 따서 한 자루 채우려면 오래 걸리니까. 게다가 고사리는 독특한 향이 있어 어린 입맛에는 맛이 없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고사리나물에 고추장이랑 참기름 넣어 밥 비벼 먹는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네. 엄청 맛있겠지?”


컨트리 보이로 자란 사리씨는 어렸을 때부터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 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집에 사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나랑 동시대에 나고 자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몇 년의 시간차와 시골과 도시라는 공간의 차가 엄청나게 다른 삶의 경험을 갖게 한 것이다.


사리씨와는 달리, 나는 전형적인 시티 걸로 자랐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이 시골에 있어 방학이면 시골에 가서 며칠씩 놀곤 했어도, 나물 반찬이 아니라 어린이 입맛에 맞춘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나 돈가스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던 도시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밥상 위에 숟가락도 놓고 설거지 정도의 심부름은 했지만, 내가 직접 요리의 주체가 되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며 자라지는 않았다. 성인이 되고 10년이 훌쩍 넘게 직장 생활할 때조차 남이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먼 외딴 섬나라 뉴질랜드, 그중에서도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어 한인 마트가 있는 대도시 오클랜드와는 멀리 떨어진 인구 6천 명의 작은 타운 휘티앙가에 살고 있다. 삶에 진취적이고 개척 정신이 강한 컨트리 보이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휘티앙가에는 한식을 먹을 만한 곳도 없고, 한식을 요리할 수 있는 재료도 부족하다. 이상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있으면 먹고 아니면 말고의 그다지 귀하지 않았던, 이를테면 무말랭이 고춧잎 무침, 애호박볶음, 깻잎지, 냉이된장국, 우렁쌈밥, 곤드레밥, 김밥 같은 평범한 음식들을 너무나 먹고 싶다.


결국, 지난해부터 애호박과 고추, 깻잎을 심기 시작했다. 농사지을 공간이 협소한 우리 모텔에 사리씨가 열심히 공간을 만들고 흙을 사다가 어렵게 구한 모종을 심었다. 컨트리 보이답게 사리씨가 알아서 때맞춰 물과 거름을 주고, 태풍 불면 바람도 막아주고, 순지르기도 해주며 정성을 쏟아 길렀다. 호박잎과 고춧잎을 솎아 호박잎은 쪄먹고 고춧잎은 데친 뒤 무쳐 먹었다. 귀한 깻잎은 식탁의 화룡점정이다. 쌈도 싸 먹고, 찌개나 볶음밥에도 넣고, 양념 깻잎찜으로도 해 먹는다. 어쩌다 오클랜드의 한인 마트에 가면 건조된 고사리, 곤드레, 무말랭이, 호박고지를 종류별로 사서, 삶고 물에 불려서 야들야들해지면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쳐낸다. 게다가 요령이 늘어, 한식 재료와 유사 재료를 이용해 엄마가 해준 반찬 맛을 그럴싸하게 흉내 내기도 한다. 청경채를 가지고 봄동 무침 부럽지 않게 청경채 된장무침을 버무려낸다. 다이콘(일본 무)을 가지고 매콤하고 시원한 섞박지도 담근다. 고구마 썰어 넣은 닭갈비도 해 먹고, 소고기 안심으로 불고기도 한다.


뉴질랜드로 오기 전에, 나는 내가 이런 다양한 종류의 전형적인 한식 반찬들을 직접 해 먹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시티 걸로, 계속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의 길을 걸었다면, 수많은 점심, 저녁을 학교 급식소에서 해결하고 밥 먹듯이 야근하며 살았을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은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고를 수가 없다. 그저 삶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답하겠다. 이미 나는 컨트리 보이를 택했고, 그로 인해 이제 컨트리 보이와 시티 걸이 함께 외딴 섬나라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도란도란 고사리 이야기이며 각종 반찬 이야기를 하며 숲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드넓은 바다가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몇 번 반복한 후에 희고 고운 모래사장과 파도가 철썩철썩 치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마치 지구상의 공간이 아닌 것 같은 커다란 아치 모양의 흰 바위와, 아치 사이로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컴퓨터 윈도 배경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바로 그 사진과 같은 모습이다. 이미 내가 서있는 곳이 외딴섬이든, 도시이든 시골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황홀한 광경에 모든 것을 초월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캐시드럴 코브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에 함께 서 있는 사리씨와 나도 그저 우주의 작은 먼지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마어마한 확률의 인연으로 만난 그저 작은 먼지 말이다.




* 뉴질랜드의 은빛 고사리(Silver Fern)는 뉴질랜드의 토착 식물이자 뉴질랜드에서만 자라는 고사리 종이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뉴질랜드 전역에서 자생하는 은빛 고사리를 국가의 상징으로 여긴다.

고사리를 상징으로 삼는 나라 뉴질랜드를 삶의 터전으로 고르고,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며, 고사리나물을 그리워하는 나의 반려자의 애칭이 그래서 ‘고사리’, ‘사리’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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