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부탁해요. 천천히 또박또박.

by 리엘리

“레이첼! 투 라떼 포 레이첼-. 레이첼-.”


동네 카페 카운터에서 카페 직원이 레이첼 이름을 큰 소리로 몇 번 부르자, 어디선가 레이첼이 나타나 커피를 가져간다. 스타벅스가 아니더라도 뉴질랜드에서는 진동벨 대신 이름을 불러서 음료를 내어주는 경우가 흔하다. 카페뿐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장소와 관계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본적인 문화인 것 같다.




약국에서 일할 때였다. 처방 약은 커피와는 달라 잘못 나가면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약을 내어주기 전에 반드시 풀 네임(성과 이름)을 확인해야 한다. 내가 일하던 약국은 약이 잘못된 주인을 찾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중 보호 장치로 이름과 함께 주소까지 확인했다. 문제는 사람 이름과 거리 이름과 같은 고유 명사들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이다.


하루는 ‘카이버 파스 로드(Khyber pass Road)에 사는 제프 반 더 잔트(Geoff van der Zandt)’라는 손님이 왔다. 카이버 파스 로드는 내가 일하던 약국 근처에 있는 길 이름이다. 약국에서 처음 일할 때, 우리 집 주소 말고는 거리 이름을 거의 모르던 때였다. 손님의 주소가 ‘카이버 파스 로드’라는데, 들어본 적이 없는 거리 이름이다. C로 시작할까? K로 시작하려나? 그도 아니면 Q?? 주소를 입력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주소는 일단 공란으로 비워두고 이름을 입력해보기로 한다. 손님 이름은 ‘제프’라고 했다. 내가 아는 제프의 철자는 Jeff이지만, 손님의 이름은 ‘Geoff(제프)’이다. 당연히 검색 시스템에 아무리 Jeff를 입력해보아도 손님이 검색이 안 된다. 그럼, 성(last name)으로 검색을 해보자 싶었다. 이름의 ‘반 더(van der)’가, 성인 것인지 미들 네임인 것인지를 모르겠다. 마지막에 말한 것을 성으로 추정하고, 잔트(Zandt)를 입력하려 했다. 분명 ‘ㅈ’으로 들리는데 J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카이버 파스 로드에 사는 제프 반 더 잔트’씨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경우는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약국에서 일할 때, 주소나 이름 철자 하나의 덫에 걸려 부드러운 서비스를 못 한 경우는 매우 많았다. 손님이 앞에 있어 메모지를 들이밀고 적어달라고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화기를 붙들고 헤매기 시작하면,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A for Alpha, B for Bravo, C for Charlie와 같이,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먹던 음성 문자 역시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더 어려움을 가중한다. 옆에 있는 매니저의 눈치가 보이고, 알파벳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다는 자괴감은 커져만 간다. 나는 점점 더 쪼그라들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할 참이다.




약국을 떠나, 모텔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름 때문에 곤란한 경우는 없어질 줄로만 알았다. 이제 뉴질랜드의 어려운 지명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손님의 주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더욱이 요즘은 숙소 예약을 거의 온라인에서 ‘부킹닷컴’ 같은 예약 전문 업체를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전화 예약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전화 예약 비율이 30%가 넘고, 전화 문의도 상당히 많다. 그리고 모든 예약에는 기본적으로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입력한다. 다행히 약국에서 일할 때처럼 모든 것이 정확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과 이메일 주소 입력은 중요하다. 이름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지 우리나라에 살 때는 맹세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해마다 새 아이들을 만날 때 누구보다도 이름을 빨리 외워 불러주던 나였다.


뉴질랜드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이다. 사람들의 이름은 그야말로 다채롭다. 외국 사람들의 이름은 들어도, 들어도 새로운 이름이 등장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데이비드 스미스, 제임스 조단, 새라 파커, 제니퍼 톰슨과 같은 앵글로-색슨 계열의 이름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설령, 이름이 익숙하다 해도 같은 이름에 철자가 다양한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애슐리’라는 이름은 Ashley, Ashleigh, Ashlee, Ashlie, Ashlea 등등 사람마다 다르게 쓴다. 마오리족이나 동유럽 사람들, 중남미 사람들, 인디언, 아시안, 수많은 다양한 출신 국가와 민족의 이름들은 들어도 철자를 알 길이 없는 이름이 천지다. 이진숙, 정찬혁, 김은주, 윤태형 이렇게 들으면 단번에 알아듣고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세 음절 우리나라 이름이 정말 그립다.


학창 시절 좋아했던 시 ‘꽃’에서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했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 모진 바람을 견디고 차가운 흙에 뿌리를 내리고 뜨거운 햇빛을 품어야 하는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 제대로 부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게 맞다’라고 위로를 한다. 뉴질랜드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과 지명에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조금 더 살고, 조금 더 견디어야 한다고 다독인다.


전화가 온다. 새로운 손님이 모텔 예약을 하고 싶단다. 땡큐다. 예약을 원하는 날짜와 인원, 원하는 객실 형태를 확인하고 예약을 진행한다.


“손님,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What is your first name)?”

“캐서린, K 아니고 C로 시작해요 (Catherine, start with C not K).”

“네. 알겠어요. (OK. Got it.) 그럼 성은 어떻게 되십니까(What is your last name)?

“마하라즈-부스(Maharaj-booth).”


아, 이런! 길다. 너무 길다. 한 번에 받아 적기는 이미 글렀다. 손님 이름이 뭐라고요??

부디 손님의 이름을 잘 부를 수 있도록, “천천히, 플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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