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1951년 1월
날씨는 매서운데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겨울 교복이 전부라서 추위를 막지 못하였다. 미군부대에는 수호 일행 말고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황해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해가 중천에 높이 떠있는 것으로 보아 시간은 정오 즈음인 것 같았다. 미군이 트럭에 사람들을 태워줘서 가까운 기차역에 데려다주었다. 일행이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렸는데, 검은 교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함께 걸어가자 군복을 입은 두 명이 다가와 멈춰 세웠다.
“너희들 어디서 오는 길이야?” 한 명이 물었다.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나왔습니다.” 주하가 대답하였다.
“지금 방위군 소집하고 있는데, 나이들이 어떻게 되지?”
“저는 올해 열아홉입니다.” 수호가 대답하였다. 각자의 나이를 확인하더니 따라오라고 하였다. 모두를 트럭에 태워 어딘가로 이동하였다.
잠시 후 일행이 도착한 곳은 창경원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수호 일행은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함께 붙어있었다. 군인으로 보이는 제복을 입은 사람의 지시에 따라 두 명씩 나란히 줄을 서서 길게 늘어섰다. 결국 2열 종대가 이루어졌다.
또 다른 군복을 입은 한 사내가 무리 앞에 나서며 말하였다.
“나는 국민방위군 기간병 이태겸이다. 제군들을 인솔하여 대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각 목표지까지 가야 하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라. 지금부터 여기에 이름과 나이를 기록한다.”
이태겸은 종이와 연필을 맨 앞줄의 청년에게 주었다. 청년들은 기다렸다가 종이와 연필이 앞에서 전달되면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적어 넣고 다시 뒷사람들에게 종이와 연필을 넘겨주었다.
“여러분은 제12 교육대로 편입되었다. 나는 제군들을 인솔해서 대구로 집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총 인원 50명! 다음 보고지까지 정해진 날짜에 도착해야만 일정에 차질이 없다. 낙오하는 자 없이 모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행군한다. 일동 행군!”
그날 바로 오십 명의 인원이 채워지면, 교육대를 결성하여 행군이 시작되었다. 길이 잘 닦인 도로는 군용 도로로 엄격히 제한이 되어 있어서, 한겨울의 추위에도 목적지까지 국도를 낀 샛길로 돌아가거나 산을 타고 행군해야 하였다. 최종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배당된 당일 목적지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샛길을 찾아 돌아가거나 산길을 따라 가느라 육체적으로도 힘들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으며, 물이나 허기를 채울 식량이 배급되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그다음 교육대가 뒤를 따라 행군하여 따라오기 때문에 일정은 빠듯하였다. 남쪽으로 넘어와서 긴장이 풀어졌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하니 수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청년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행군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양평을 지나서였다. 앞서 가던 일행 중에 누군가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갔다. 다들 놀라 어리둥절하였는데, 날아간 사람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하반신은 이미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인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고 심어놓은 지뢰를 밟은 것인데, 대열에서 앞뒤로 연락하여 인명피해를 알려 이태겸 상병이 다친 교육대원에게로 다가왔다. 개성에서 온 23세 강인철임을 확인하고는 제대로 지혈을 하거나 수습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겨두고 행군 중에 민가를 만나면 사람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남은 대원들을 이끌고 행군을 계속하였다.
밤이 되어, 다행히 당일 목적지에 도착하면, 민가에 각자 나눠 들어가고 민가에서 형편대로 식사를 준비하여 주는 대로 먹고 잠을 청하였다. 하루는 문경에 도착하여 마을의 집집에 배정되어 집주인이 차려주는 먹거리로 요기하고 다음날 행군을 대비하여 잠을 푹 자려고 누워있는데 바깥이 시끌벅적하였다. 다른 교육대가 일정이 늦어져서 한 마을에 두 교육대가 동시에 머물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마을 주민들도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먹을 것을 조금씩 내어주어 식사는 했지만 100여 명 정도의 교육대원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늦게 도착한 교육대원은 부득이 노상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
한겨울이라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밤새 동사자가 발생하였다. 동사자를 묻는 것은 마을사람들에게 맡기고 교육대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각자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목적지까지 제 때에 도달하지 못하고 노상에서 잠을 자다가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강행군에 발에 물집이 생기고 허물어 벗겨져 절뚝거리면서도 악착같이 걸음을 재촉하였다. 강행군임에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는 없고 거의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한낮이 되어서는 육체적 고통이 임계점에 이르러 영혼이 가출할 지경이었지만 발이 저절로 움직여 행군에서 뒤처지지 않는 게 신기하면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앞서 가던 한 교육생이 피식 쓰러졌다. 대열이 잠시 멈추고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웅성웅성하였는데 정작 쓰러진 사람은 피곤하고 졸려서 잠시 정신줄은 놓은 상태에서 졸다가 앞으로 고꾸라진 모양이었다. 넘어지면서 잠에서 깨어 다시 행군은 이어졌다.
최종 목적지인 대구에 도착하자, 모두들 휴식을 취하고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이태겸 상병이 이끄는 12 교육대는 대구에서 이틀을 머물면서 다른 교육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낙오하거나 사망자로 인해 줄어든 인원을 보충하여 다시 50명을 채운 12 교육대는 다시 김해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전쟁의 공포와도 같은 죽음의 행군은 과연 끝이 있는 것인가? 12 교육대가 양평, 문경새재, 대구와 구미를 거쳐서, 마침내 김해에 도착한 것은 1월 28일이었다.
1951년 2월: 군인도 아닌 핫바지
교육대원들은 목적지가 배급도 주고 군사훈련도 받을 수 있는 시설이리라 생각하였다. 수호가 속한 12 교육대는 최종목적지인 김해 창고에 도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수확한 곡식을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곳이었다. 창고가 그리 큰 장소는 아니었는데 교육대원 200명 이상을 수용하였다. 교육대원들은 대부분 십 대였고 간혹 마흔을 넘긴 사람도 있었다. 곡식을 보관하던 곳이라 단열이 중요하지 않아 함석으로 된 창고벽은 바람은 막아줄지언정 추위는 고스란히 스며들어왔다. 난방으로 김해 창고 중간에 불을 지펴 놓은 근처로 지친 교육대원들이 두 사람당 배당된 볏짚으로 역은 가마 두 개를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고 서로의 체온을 온기 삼아 잠이 들었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는데 볏짚이 하나 둘 풀어져 사람들 머리와 이미 넝마가 된 옷에 붙어서 너 나 할 것 없이 거지꼴이 되었다. 한겨울이어도 오랫동안 씻을 수도 없어서 모두들 이가 수두룩하였다. 햇빛이 비교적 따뜻하게 내리쬐는 낮에는 대원들도 창고밖으로 나와 몸을 긁으며 이를 잡았다.
식사는 하루 두 번 주먹밥을 궤짝에 수북이 담아서 나왔고, 소금을 찍어서 먹을 수 있도록 한 옆에 놓았다. 국은 주로 묽은 된장국을 창고 한가운데 놓으면, 개별 국그릇은 없고, 바가지 하나가 옆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배식을 해주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아비귀환으로 싸우듯이 국을 퍼서 먹었다. 기운이 세고 재빠르게 바가지를 낚아채서 국물을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나이가 40세 이상 되어 기력이 약하거나 동작이 느린 사람들은 차례가 가기 전에 국이 모두 동이 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긴 강행군으로 인한 노독에 충분한 식사를 배급받지 못한 교육대원들이 건강할 리 없었다. 대부분의 교육대원들은 군사훈련을 받을 체력이 되지 못하였다. 군사훈련은 소총분해와 제식훈련을 받는데 그쳤으며 주된 훈련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 일이었다.
정식으로 훈련을 받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주로 나무를 하러 다니면서 마을을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은 교육대원을 ‘핫바지’라고 불렀다. 산에서 나무를 하는 이유는 하루 두 끼 장작을 지펴 교육대원 200여 명이 먹을 밥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호와 현식이는 2인 1조가 되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창고에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나무를 하러 가는 것이 내심 반가웠다. 원래는 민가에 구걸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하도 배가 고파서 농가가 보이면 염치 불고하고 먹을 것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농가에서도 먹을 것이 넉넉할 리 없지만, 당신 자식을 생각해서 밥이나, 김치라도 있으면 서슴없이 내왔다. 마루에 걸터앉아 허기진 배를 채우는 수호와 현식에게 난생처음 듣는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에고, 니도 못할 짓이고 내도 못할 짓이고 마는! 우리 아도 니 모냥캉 군대 갔다 아니가.”
1951년 3월
김해창고에서 지낸 지 두어 달이 되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도 아닌데, 먹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대부분 교육대원들은 청결을 유지할 수 없어서 벼룩과 이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이질이 발병하였지만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누구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격리할 공간도 없고 처방받을 약도 여의치 않아서 금방 전염이 되었다. 전쟁 중에 중요한 병력이 될 무수한 젊은 청년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하나 둘 죽어 나갈 때에는 그나마 거적으로 덮어 얕으나마 얼어붙은 땅을 파서 묻어주었다. 점점 늘어나는 시체를 일일이 땅을 파서 묻을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체력이 있는 장정이 필요하였다. 창고 안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씻지 못해 나는 꼬린 내가 났다면, 이제는 끙끙 앓는 이들이 뿜어내는 죽음의 구린 내가 났다.
수호는 같이 피난을 나온 동무들과는 항상 붙어 다니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서로 독려하였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무사히 하루를 마치면 밤에는 바닥에서부터 도사리고 있다가 피어오르는 추위와 맞서야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도헌이를 살펴보니, 도헌이의 왼쪽 눈에 고름이 고여있고 고름 주변에 이가 잔뜩 끼어 있었다. 눈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불편해 보이는데도 도헌이는 고름을 닦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닦아낼 힘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기운도 없는데 어서 자자.”
수호가 가마를 덮어주려고 도헌이가 눕기를 기다렸다. 아무런 댓구없이 도헌이가 자리에 눕자, 수호는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도헌이 몸 밑으로 가마를 끼워 넣고,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려 도헌이를 등지고 옆에 꼭 붙어서 누운 다음에 가마를 자신의 몸 밑으로 꼼꼼하게 밀어 넣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것보다 잠을 청하는 것이 나았다.
아침에 눈을 뜬 수호는 자신의 몸에 엄청난 양의 이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마를 들쳐보니, 도헌이 몸에서 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도헌이의 몸은 소름 끼치도록 냉랭하였다. 수호는 놀라서 도헌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헌은 마치 미소를 띤 듯 평온해 보였다.
3월 말에 국민방위군이 해산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여기가 어디인데, 집으로 간단 말인가? 상훈과 주하는 일단 군대에 지원하기로 하였다. 수호와 현식이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기회가 되면 도헌이 집에도 소식을 알려야 할 터였다. 돈도 없고, 식량도 없고, 1월에 집을 나올 때 입고 왔던 넝마가 된 교복과 운동화가 전부였다. 수호와 현식은 국도를 따라 인접한 샛길을 따라 북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