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재난: 1.4 후퇴
1950년 9월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남한을 지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유엔군이 참전하였음에도 인민군의 양면 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맥아더 장군이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략상 또한 정치적 의미가 큰 서울을 탈환하여 전세를 역전하고자 인천에 상륙하는 작전을 세웠다.
드디어 9월 15일에 인민군의 주력부대가 남쪽에 있는 동안 허를 찔러 인천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13일에 걸친 진격으로 결국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였다. 그 이후로도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평양을 수복하고 12월 즈음에는 압록강 한만 국경 부근까지 계속 인민군을 몰아내며 전선을 북쪽으로 확장하였다.
연안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하였지만 여름 내내 농사에 집중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된 가뭄으로 예년에 훨씬 못 미치는 수확이었다.
한가위가 되어 풍성한 마음으로 들뜨기보다, 마을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국군과 연합군이 되돌아와 이번에는 인민군에 협력한 사람들이 처단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연안이 인민군에 속하면 국군이나 경찰이 처단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들어오면 공산당원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도저도 아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중도를 지켰다.
세상과 담을 쌓고 모든 풍파도 비껴가던 맹현봉에서는 뒤늦게 전해오는 세상사에 유유자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안에서는 전쟁을 통한 좌우간의 대립을 걸러지지 않은 날것의 모습 그대로를 지켜보아야 했다.
아무리 최전선에 내버려져도 전장의 상황을 안다면, 공포와 같은 불안은 덜할 것이다. 인민군이 쳐들어와 국군이 밀려나도, 혹은 국군이 되돌아와 인민군이 내 쫓겨도 적어도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불안을 없애려고 집착하듯 라디오 너머로 들려오는 세상소식에 귀 기울였다.
1951년 1월
연안에는 4일과 9일에 오일장이 들어섰다. 1월 14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수호는 돈 사야 할 일이 있어서 쌀을 지고 장으로 향하였다. 장에 도착하니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하였다. 짐을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볍게 지게를 진 수호는 해산물을 파는 어물포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갑자기 땅을 뒤집을 것 같은 ‘쿵’하는 소리에 소달구지를 끌고 가던 이들이나 자리를 깔고 앉은 이들도 모두 멈추어 서서 한동안 무슨 일인가 싶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울리는 소리인지 둘러보는데 갑자기 위에서
‘따다다 다, 따다다 다’ 하는 소리가 들리며 땅에서 불이 나면서 흙먼지가 여기저기 피어 올라왔다.
어는 곳으로 피해야 하는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혼비백산이 되어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수호도 정신없이 대바구니 가게에 뛰어들었다. 가게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장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트럭에 탄 미군들이 지나가면서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향해 쏘아 대고 있었다. 그 총탄 세례를 맞고 또 일련의 사람들이 주저앉듯이 피식피식 쓰러져 갔다.
장터는 일시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호는 죽은 듯이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주변이 조용해진 듯하여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미군은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수호는 서둘러 달려오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 한나, 그리고 완석이가 모두 집에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안심하였다.
“벌써 장에 다녀온 거예요?” 한나가 수호의 손을 살펴보면서 물었다. 건어물을 사 온다고 나간 사람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더군다나 빈 손으로 돌아온 수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한나는 불안을 감추고 물었다.
“장바닥이 난리가 났어. 미군이 사람들에게 마구 총을 쏘아댔다구.”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 테니, 할머니 하고 완석이 데리고 집에 있으라.” 수호는 한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집을 나서서 정하네 집으로 향하였다.
정하할아버지 사랑방에 모여서 소식을 모아보니, 중공군이 1월 4일에 참전하면서, 미군들에게 후퇴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연백은 이미 이북 점령지라고 규정한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민간인을 상대로 과잉으로 사격을 퍼부은 것이었다. 지난 6월에도 그러했지만, 동네 공무원도 중공군이 참전한 것이나 미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수호는 ‘아차!’ 싶었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난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가족들과 함께 간단히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육로로는 나올 수가 없을 것 같고, 남포리로 향하였다. 예성강을 건널 배를 구해야 한다.
1951년 1월: 예성강에서 개성으로
항구에 모인 일행은 정하네 식구들을 포함하여 십여 명이 되었다. 선착장에 딱 하나 남은 배의 꽁무니에 붙은 불을 사람들이 들러붙어서 간신히 껐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태우려고 하였으나, 일행 중에는 정하할아버지, 정하할머니와 우태 세 명만을 태워서 예성강을 건너가는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나머지 일행은 하릴없이 다시 밤길을 도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더 이상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후퇴명령이 떨어졌지만, 인민군이나 중공군이 아직 연안에 도착하지 않았으니까 일단 젊은 남자들만이라도 걸어서 남쪽으로 가서 피신해 있다가 다시 수복되면 돌아오자고 하였다. 언중공민학교 학생 오상훈, 최현식, 황주하, 남도헌과 함께 수호는 다음 날 새벽 출발하기로 하였다.
새벽녘에 한나는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 놓은 찬합에서 주먹밥 두 덩이와 부엌 가마솥에서 삶은 감자 세 알을 꺼내어 보자기에 한번 싸서 양쪽 끝은 돌돌 말았다. 이 정도면 두 끼니의 허기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오니 교복을 입은 수호는 이미 마루에 걸터앉아 짚으로 운동화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논밭도 이미 텅 빈 허허벌판이라 숨을 곳도 없고, 중공군이 물밀 듯 들어오면 그 수는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지난여름과 달리 추위를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아녀자 둘과 고작 젖먹이 완석이를 중공군인들 해코지하겠냐마는 젊은 청년은 한번 잡혀가면 전쟁통에 그 생사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신발 묶는 걸 마치며 일어선 수호에게 한나가 보퉁이를 건네주었다.
“어드렇게든 상황 좋아지믄 얼른 올 테니까 그동안 할머님하고 완석이 데리고 잘 있으라.”
수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보퉁이를 허리춤에서 덜렁거리지 않게 꽉 조여 묶고 있었다.
“여기 염려랑 말고 몸조심해요.” 쌀쌀한 새벽바람 때문인지 한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마치 추위에 떨리는소리인지 울음을 참는 소리인지 한나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수호는 한나를 꼭 안아주었다. 수호의 품 속에서도 한나는 떨고 있었다.
“아무리 늦어도 봄 농사 전에는 돌아와야지. 그때까지 만이야, 꼭 돌아올게.” 한나를 안심시키면서도 수호 자신에게 되뇌는 다짐과도 같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둠 속으로 더 검은 그림자가 들어가는 것을 한나는 지켜보고 서 있었다.
사실은 막막했다. 아니, 두려웠다.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훤히 다 볼 수 있는 논바닥에 숨어 있던 수호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걱정이 되어도 내다볼 수도 없어 좌불안석인 것보다는 차라리 수호가 남쪽으로 잠시 안전하게 피신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른다.
가능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낮에는 돌아다니지 말아야겠다. 어차피 엄동설한이라 논이고 밭에 나갈 일은 없다. 수호가 돌아올 때까지 할머님과 완석이랑 무사히 겨울을 넘기기만 하면 된다.
1951년 1월: 임진강
새벽에 다섯 청년들이 예성강을 건너기로 하고 백석포로 향했다. 예성강은 강폭도 넓고 바다로 연결되는 크고 긴 강이어서 배 없이는 건널 수 없었다. 정기적으로 떠나는 연락선은 이미 기대할 수 없었다. 간혹 배가 있어도 배를 타고 떠나가면 돌아오지 않았다. 무작정 기다렸다가 혹시 들어오는 배가 있으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바다와 연결된 강 하구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3일 만에 간신히 다섯 명 모두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수호와 일행은 쉬지 않고 북쪽으로 걸어서 개성에 도착하였다. 개성에도 대부분 집들이 비어 있었다. 개성역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대로 기차는 없었다.
이정표를 삼아 철길을 따라서 남쪽방향으로 걸어서 일행은 임진강에 다다랐다. 배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강은 얼어 있었다. 한 중년 남자가 소를 끌고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일행도 남자가 건너는 쪽으로 함께 강을 건너가려고 뒤따르고 있었다. 남자가 강을 반 정도 건넜을까 ‘빠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깨지면서 소의 하반신이 강물에 빠졌다. 당황한 남자는 소의 고삐를 잡고 소를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뒤따르던 수호 일행도 달려들어서 남자를 도와 소를 물에서 건져내려고 하였다. 소의 등에 진 짐을 고정하는 줄을 잡으려다 차가운 물에 닿자 전신이 전기를 맞은 듯 아찔하였다.
남자가 고삐를 잡아당기고 다섯 남정네가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소를 끌어올리자 소도 “음매에” 하며 발버둥을 쳐서 뒷다리가 얼음물에서 헤어 나왔다. 기진맥진해진 남자는 울면서 소의 고삐를 놓아주면서 소를 얼싸안았다. 얼음이 더 깨질 수 있어서, 서둘러 다시 강바닥을 걸어서 빠져나왔다.
일행은 온몸이 젖어서 추위에 벌벌 떨면서 임진강 근처에 있는 빈집에 들어갔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온돌을 데워서 뜨끈뜨끈한 방바닥이 식지 않도록 이불을 깔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불에 파고들어 몸을 녹이고 젖은 옷을 벗어 말렸다.
몸의 한기가 풀리자 방 벽걸이에 걸린 옷을 주워 입고 부엌과 헛간을 둘러보았다. 주인은 쌀이나 김치도 그대로 두고 떠났다. 아마도 집을 오랫동안 비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아궁이에 있는 솥에 밥을 짓고 김치를 덜어 일행은 끼니를 때웠다.
이틀이 지난 새벽에는 수호와 도헌이 강가에 나와서 강이 얼었는지 살펴보았다. 밤이고 낮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총소리가 들려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강폭이 좁아서 충분히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지점을 확인하곤 숙소로 돌아왔다.
일행은 서둘러 이른 아침을 해 먹고, 각자 빈집들의 대문을 뜯어서 널빤지를 마련하였다. 널빤지를 하나씩 들고 얼어붙은 강 표면에 널빤지를 깔고 배를 대고 엎드려 썰매를 타듯이 배밀이로 천천히 임진강을 건너갔다. 언 강 표면을 밀고 가려니 손은 빨개지고 퉁퉁 붓는 것도 같았지만 초조한 마음에 추위도 아픈 줄도 몰랐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돌아볼 수가 없었다. 아직 어두울 때 빨리 눈에 띄지 않게 강을 건너야만 했다.
정신없이 강을 다 건너와서 널빤지에서 옆으로 몸을 일으켜 강 표면에 발을 딛으려는데,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흑인 병사 두 명이 일행을 향해 M-1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일행은 널빤지에서 내리다가 혹은 널빤지 위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미국 놈들은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건 봤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뭐라고 샬라샬라 말을 하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대답할 길이 막막하였다.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미군 중 한 병사가 두 손을 들고 있는 일행의 몸을 뒤져서 학생증을 찾아냈다. 그 병사가 철조망 너머에 있는 초소로 갔다가 한국사람 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다행히 통역을 하는 사람이었다.
“연안에서 언중공민학교 다니는 학생들인데, 개성으로 해서리 피난 나와,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가 건너온 거라요.”
현식이가 통역관에게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통역관은 연안이며, 개성과 임진강 건너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고는 흑인 병사에게 영어로 한참을 실랑이인 듯 설득인 듯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오랜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수호는 두 사람 뒤편을 슬쩍슬쩍 살펴보았다. 강둑 너머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이들이 수호 일행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저 철조망은 어떻게 넘었을까 하는 생각을 시선과 함께 거두어 다시 통역관과 흑인 병사 두 명에게 향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통역관이 일행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다들 손 내리고 널빤지 챙겨서 이쪽으로 따라오시오.”
일행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서로 눈을 마주치며 쭈뼛쭈뼛 일어섰다. 널빤지를 집어 들어서 세로로 세워 옆구리에 나란히 끼워 끌면서 통역관 뒤를 따랐다.
강둑에 올라서서 흙을 밟으며 비로소 수호는 뒤를 돌아 방금 건너온 임진강 건너편 강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