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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흩어진 사람들

경계를 넘어

by Peregrine

1951년 2월


신묘년을 맞은 설날은 입춘과 하루차이로 2월 6일인데 전에 없이 고요하였다.

마을의 청년들뿐 아니라 가족 단위로 피난한 이들이 많아,

두서너 집 건너 한 집꼴로 빈집이 되어 있었다.

남아 있는 집들도 세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우내 문을 굳게 닫고 숨죽인 채 살아가는 나날이었다.


한나는 평산댁과 함께 조촐한 차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친정어머니 함안댁을 도와 만들던 만두와 재료는 크게 다르지 않으나,

황해도 만두는 유독 큼직했다.

으깬 두부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져 심심하게 간을 한 속을 가득 채워 빚어 올리면,

하나만 먹어도 금세 배가 불렀다.


이제는 서너 개씩 뚝딱 먹어치우던 수호도 없건만,

평산댁과 한나는 예전처럼 두고두고 먹어도 충분한 만두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완석아범도 없는데, 너무 많이 만들었나 봐요?”
한나가 속을 꽉 채워도 충분할 만큼 넓게 만두피를 밀어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혹시나 오면, 먹여야지. 만둣국 한 그릇 못 해 주면 어쩌냐.”
평산댁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정성껏 빚어두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음을 담고 있었다.


차례를 마친 뒤, 평산댁은 통통해진 완석의 입에 만두 속을 조금씩 떠 넣었다. 완석은 아기새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으면서도 손에 쥔 나무수저를 밥상에 탁탁 두드렸다. 입술에 묻은 국물이 턱 아래로 흐르자, 평산댁은 그 국물을 다시 수저로 받아 완석의 입으로 가져갔다.


“에구, 먹는 거 반, 흘리는 거 반이네.”
평산댁의 얼굴에 미소가 하나 가득 번졌다.


한나는 부엌에서 숭늉을 받아 들고 나오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는 두식이를 보았다.

한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두식이는 한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걸어왔다.

마치 한나에게서 두려움과 반항을 동시에 읽어내려는 눈빛 같았다.


“새해 다복하시고, 다들 건강하시길 빕니다.”
두식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위원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두식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앙당의 ‘정신교육’과 ‘인민군 징집’,

그리고 ‘토지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말은 조용해도 눈빛은 나무라는 듯 날카로웠고,

전하는 내용은 한나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레, 다들 자봉이 읍사무소 공터로 나오기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레… 몇 시까지 나갑니까?”
한나는 추궁하는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눌렀다.




정오가 되기 전,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읍사무소 공터로 모였다.

인민군 예닐곱 명이 장총을 차고 주변을 지키고 서 있어,

추위보다 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서로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그 속삭임조차 조심스러웠다.


두식이가 앞에 나서서 정신교육을 진행하였다.

전에 없던 것이라 모두들 집중하여 들었다.

그러나 무슨 내용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방된 동지 여러분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추적인 계급으로서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농사를 지어

인민혁명을 이루는데 이바지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토지조사를 한다.’


‘한반도 전역을 해방시키기 위한 혁명전쟁에

젊은이들은 참전한다.’

도대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위협인지 모를 말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나는 들은 내용을 곱씹어 보았지만,

머릿속은 도리어 흐릿해졌다.


‘완석아버지가 남하했다는 이유로

우리 집 땅까지 빼앗아 가면 어쩌지.’

가진 재산을 지키려면 수호가 돌아와야 한다.

가진 논을 빼앗기면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어진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서

누군가 마음 터놓고 얘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날 밤, 한나는 아랫목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완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루빨리 완석아버지가 돌아오면, 이런 일도 다 지나가겠지…’


그 순간, 바깥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한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누… 누구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정하엄마! 얼른 문 좀 열어봐!”

정애의 목소리였다.


정애는 초췌한 몰골로 방 안에 들어왔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입성은 비렁뱅이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집에 돌아온 안도감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한밤중에 마련한 따끈한 만둣국 앞에서

정애는 허겁지겁 음식을 넘겼다.

평산댁은 체할까 걱정이 되어 말도 붙이지 못한 채 지켜보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 했는데… 어드러캐 지냈을꼬…”
자신도 모르게 평산댁은 한숨을 흘렸다.


정애가 숨을 골랐다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방 안의 공기가 서서히 무거워졌다.


“아버님이랑 기태도련님은 인천에서 만났어요.

황해도에서 피난한 사람들은 다 거기 모였더라고요.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어서… 남의 집 담벼락 밑에서 자고,

먹을 것을 살 돈이 없어 남자들은 부두에서 지게로 짐을 나르는데

짐꾼이 손님보다 더 많아 허탕 치기 일쑤고….”

말을 잇던 정애의 목소리는 점점 떨렸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거칠어지고,

말끝은 울음으로 매듭을 짓지 못하였다.


“정하는… 어린것이 무슨 죄예요… 그래서 내가 왔어요.

이불도 좀 가져가고, 먹을 것도… 뱃삯은 쌀로 치르기로 하고…”

그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흐느낌이 먼저 새어 나와 버렸다.


정애가 한참을 울고 난 뒤에야 한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완석아버지는 못 보셨어요?”

정애는 한나를 한동안 바라보다,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한테 물어도…

수호랑 피난 간 이들은 아무도 못 봤다 하더라고.”

그 말이 방 안에 뿌려지는 순간,

그 서늘함에 한나는 소름이 돋아 진저리를 쳤다.




정애는 다음날 한낮까지 깊게 잠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밤에 떠나기로 하였다.

토굴에 저장해 둔 만두와 며칠 먹을 쌀을 허리에 감싸고,

이불을 머리에 이고 나니 마음은 비장해졌다.


떠나기 전, 한나는 정애와 단둘이 있게 되자

정신교육에서 들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조만간 토지조사를 한다는데…

월남한 집안 땅은 모두 나라에 귀속될 거라고 하니,

꼭 정하할아버님이랑 상의해 보세요.”

정애는 짐을 지고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작은 체구로 버거운 짐을 이고 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나는 문득 부럽기도 하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떠내려가도

가족이 모두 함께 있으니

마음은 든든하지 않겠는가!


한나의 끊어진 생각조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천으로 안 갔으면, 이녁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이 추위에 배는 골지 않는지….’


‘토지조사도 곧 닥친다는데…

봄까지 전쟁이 끝나서, 다 돌아올 수 있을까?’

‘맹현봉은… 어머니와 한동이에게 소식은 닿았는지…

그곳은 아직 무사하겠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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