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1951년 4월
삼거리 근처 창고 앞에는
이미 해산된 방위군 출신들이 모여 있었다.
각자 저마다 고향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어디로 어드러캐 가기로 했어요?”
수호가 말을 붙였다.
“옹진 쪽.”
상대가 짧게 답하였다.
“그럼… 어쨌든 북쪽으로 가야겠네요?”
수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청년이 피식 웃었다.
“김해는 거의 남쪽인데
어디를 가던 북쪽 아니겠어요.
문제는 거기까지
어떻게 가느냐 하는 거죠.”
옆에서 현식이 거들었다.
“뭐 산길로 북쪽을 향해 가면 안 되겠어?”
“그랬다간 산에서 똑 굶어 죽는다.”
청년은 단호했다.
“우릴 이끌 사람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돈도 없잖아.
장정 둘이 산속으로 들어가면, 그냥 끝이야.”
청년의 경고를 뒤로 하고
수호와 현식은 산으로 들어섰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는 일은,
처음 떠날 때보다 더 막막하였다.
수호와 현식은 북쪽으로 걸었다.
김해를 떠날 때만 해도,
남하하던 길을 거꾸로 되짚으면
될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였다.
하지만 되짚어가는 길은
기억처럼 곧지 않았다.
남한의 지리를 알지 못한 채,
지도 하나 없이 산길로 들어섰다가
몇 번이고 방향을 잃었다.
나무 사이로 이어지던 오솔길은
어느새 끊어졌고,
다시 큰길로 빠져나오기까지
반나절이 훌쩍 지나버리기 일쑤였다.
“아까 그 고개에서,
그냥 옆으로 빠지는 거였는데!”
현식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을 잃어 시간을 허비한 것보다
지친 발을 기계적으로 옮기는 것 만으로 힘에 겨웠다.
산길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내려올수록 힘이 빠진 발에
오히려 속도가 붙어
온 정신을 발에 집중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국민방위군이 해산되며
젊은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산속에서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함께 걷던 사람들의 발자국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였다.
“산으로만 가다간… 큰일 나겠다.”
현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깨달았다.
남하할 때는
앞에서 누군가 길을 인도하였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길을 찾아가야 하였고,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하였고,
잠잘 곳도
스스로 찾아야 했다.
긴장된 마음에
정신을 밝았지만
제대로 먹을 수 없어
체력은 바닥이 난 지
오래되었다.
결국 둘은 도로로 나왔다.
군용 트럭이 오가는 길은
위험하였지만,
사람이 사는 곳과 이어져 있다는 점이
그나마 길을 찾아갈 방향이 되었고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살 길이었다.
수호는 그제야 실감했다.
이제는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다는 걸.
“도로로 가자.”
수호가 말했다.
“사람 사는 데를 따라가면…
어디선가 밥 한 끼는
얻어먹을 수 있겠지.”
현식은 잠시 고개를 숙이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해산된 방위군은
이제 민간인이었다.
그냥 손을 내밀어
밥을 달라 할 수는 없었다.
둘은 농가를 찾아다니며
나무를 해주고,
밭일을 도와주고,
그렇게 하루 끼니를 해결하였다.
대전 근처 한 농가에서는
고추와 옥수수를 심는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일을 마치자,
주인은 밥뿐만 아니라
몸을 씻을 수 있도록
뜨거운 물을 데워 주었다.
“이 꼴로 계속 다닐 순 없잖아.”
신세를 지는 김에 수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어르신, 혹시 가세가 있을까요?”
얼마 후, 수호는 웃옷을 벗어던지고
바위에 앉아 있었다.
가위를 든 현식은
수호 뒤에서
수호의 더벅머리를
깎기 시작하였다.
“야, 너무 짧게 깎지 마라.”
“너도 거울 좀 보고 말해라.”
서툰 손놀림으로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며,
둘은 오랜만에 웃었다.
길어진 머리라 한들
그리 무겁지는 않을 테지만
짧게 깎아내고 나니,
깃털처럼 가벼워
날아갈 듯하였다.
청주에 접어들자,
날씨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길가에는 파란 잎보다
성질 급한 개나리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었고,
산비탈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남녘이라 그런가.”
현식이 말했다.
“진달래가 벌써 폈네.”
“봄이 왔다는 건데…
우린 아직 집에 못 갔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허기는 여전했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꽃은 피었지만,
발걸음을
붙잡지는
못하였다.
두 사람은
보리밭에서 수확을 하던
송 씨를 만났다.
이틀 동안 보리를 수확해 주고
얻어먹은 밥은 조촐했지만 따뜻하였다.
덕산댁이 수줍게
달걀찜을 상에 얹으며
아쉬움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일꾼은 든든하게 먹여야 하는데
차릴 것도 없어서름에…”
“아닙니다. 너무 푸짐합니다.”
이틀 뒤 두 사람이 길을 나서자,
송 씨는 보리쌀 자루를 내밀었다.
“진천장 서는 날이여.
이거 가져가서
옷도 한 벌씩 장만해서름에
고향에 가야지.”
수호와 현식은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조심들 혀. 잘 가.”
송 씨의 짧은 한마디가
오래도록 온기로 남았다.
며칠을 더 걷던 어느 날,
수호가 입을 열었다.
“현식아. 서울을 들렀다 가자.”
“서울을?”
“서울역이나 창경원은
찾아갈 수 있겠지.
어떻게든 길을 찾아서
정보라도 좀 얻어보자.”
서울은 함락과 수복이 반복되던 도시였다.
두 사람은 결국 상경하는 길에 몸을 실었다.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던 두 사람이
경기도 공도에 이르러서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몇 살이지?”
“스무 살입니다.”
병사는 둘을 훑어보며 말했다.
“2사단에서 공병대를 모집 중이다.
자원할 생각이 있나?”
“저희는 국민방위군에서 해산돼서
고향으로 가는 중입니다.”
현식이 입을 열었다.
“고향이 어딘가?”
“황해도 연백입니다.”
“황해도 연백은 아직
국군이 수복하지 못한 지역인데.”
“아, 그렇습니까?”
“자원하여 인민군을 몰아내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겠구먼.
어떤가 자원하겠나?”
수호는 한나와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또다시 군복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여 왔다.
“어떡하지.”
현식의 눈이 흔들렸다.
“수복되지 않으면…
어차피 돌아갈 수가 없는 곳인데.”
수호가 낮즈막이 혼잣말인 듯 내뱉었다.
“연합군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조만간 고향땅도 밟을 수 있을게다.”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