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 사람을 그냥 좀 내버려 두는 거라는 것을 남편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하기 전까지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그저 가는 시간 속에 버거운 몸뚱이 얹혀 놓고 살아가는 벌레 같은 존재였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반대편 멕시코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문화도 언어도 사는 방식도 전혀 다른 남편을 만나 미국에 살게 되면서 무언가 번뜩 정신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과 갑자기 살아간다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갑자기 놓이는 듯한, 마치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살다가 문득문득,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이 불현듯 찾아오곤 했다.
사사건건 별거 아닌 일에도 무조건 농담을 섞어야 하고 우울이나 분노 같은 것은 모르는 즐겁고 유쾌하고 이상한 남편은 나와는 완전히 반대점에 서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바람이 불었다고 우울하고 바람이 불지 않았다고 슬픈, 감정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에게 자주 화를 자주 냈다. 남편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갑갑했고 언제나 마냥 즐겁기만 한 남편이 괜스레 밉고 그런 남편을 진지하고 점잖은 사람으로 바꿔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행복한 남편과 혼자서 끊임없는 감정싸움을 계속하다 보니 마치 내가 귀신에 홀려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남편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는 읽어 봤어도 카프카의 소설은 읽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카프카 정도는 한 번쯤 읽어봐야 한다는 허영심에 얼마 전 '카프카 단편선'을 읽었다.
여러 편의 단편 소설이 엮여있는 책 속에는 카프카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변신'이 있었는데 갑자기 벌레로 변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정말 괴상하고 이상했던 것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벌레가 된 주인공의 마음을 내가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 후반부에 실려있던 '작품 해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카프카는 초현실적인 세계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게 만드는 글을 쓴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극적인 초현실 세계를 창조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나라는 존재를 알기 위해 나와는 전혀 다른 남편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듯이 말이다.
다르다는 이유로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화가 났고 답답함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카프카의 책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남편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에게 이해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비추는 초현실 세계였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그를 절대 바꾸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남편을 바꾼다는 것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초현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인데 사실 초현실 세계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남편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현실 세계인 나를 바꾸는 것이었다. 남편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바꿈으로써 현실 세계도 초현실 세계도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카프카는 매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프라하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헤르만은 자신과는 너무 다른 병약하고 감성적인 카프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자주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어쩌면 그래서 카프카는 문학을 통해 초현실 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자신과는 너무 다른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보듯, 벌레로 변한 남자를 통해 자신 안의 고통을 보기 위해서. 그렇게 드러난 고통을 사랑으로 안아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