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새해 첫날은 신년 벽두부터 게임을 하는 남편과 싸웠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올해 첫날에는 남편에게 들어가서 게임을 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남편은 새해 선물이 너무 멋지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선물을 한 것이었다. 더 이상 남편의 게임이 나의 스트레스가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는 선물이었고 일 년 동안 내가 얼마나 변화했는지 스스로 가늠해 보는 시간이었다.
남편은 게임만 안 하면 정말 완벽한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남편의 게임 때문에 나는 자주 신경질을 부렸고 화를 냈고 그런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남편은 까치발을 들고 사는 사람처럼 언제나 나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 그리고 나는 또 그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정당하다고 믿었다. 게임은 당연히 나쁜 것이고 중독이 되면 몸과 가족을 망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이 실제로 게임을 하는 시간보다 내 머릿속에서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정작 게임을 그만둬야 하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게임을 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머릿속에서 같은 악몽을 계속 재생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언제나 생각이라는 환영에 붙들려 사느라 녹초가 되어 있었고 다르게 사는 법을 몰랐다. 남편은 현실 속에서 그냥 게임을 할 뿐이었지만 나는 그 현실 속에 '중독된 남편', '일상과 가족을 망치는 남편', '나쁜 게임' 등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존재하지도 않는 환영들을 붙들고 괴로워하며 나 자신과 남편을 괴롭혔다. 결국 게임(게임에 대한 나의 이야기)에 중독된 것도 나. 일상과 가족을 망치는 것도 나(나의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나였다.
그리고 그 해결법은 단지 환영을 놓아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현실 속에는 그냥 게임을 즐겁게 하고 있는 사랑하는 나의 남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냥 놓아주는 것. 그 쉬운 방법을 두고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을 바꿔보려고 갖은 애를 쓰며 많은 날들을 스트레스와 괴로움에 빠져 살았다. 그냥 나의 내면이 바뀌면, 머릿속의 이야기들을 놓아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 다는 것을 모른 채 외부 환경(남편)을 바꿔 보려고 어렵게 먼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남편이 게임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게임 덕분에 나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환영은 환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살면서 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나를 돕기 위해 온다는 것도, 모든 괴로움들이 나를 생각과 이야기들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생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게임을 하는 남편'이라는 설정을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시 태어나도 남편은 언제나 나를 위해 게임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