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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우 Sep 04. 2023

미역국의 맛

엄마 손맛, 그게 뭐라고

얼마 전 둘째 생일이었다. 생일을 잘 챙기지 않는 집안에서 자란 나는, 매번 어떻게 적당히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고 머릿속에서 꼼수가 인다.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생일도 아닌 첫째가 3일 전부터 설레발을 친다. "며칠 후면 오랜만에 미역국 먹겠네, 고기 좀 많이 넣어주면 좋겠는데" 라나.

덕분에 월요일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미역을 불리고 마늘을 까기 시작한다. 한국식 국거리 소고기는 팔지 않는 로컬 슈퍼마켓에서 사 온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적당히 국거리 비스무레하게 썬다. 그래도 이거 비싸고 맛있는 고기라고, 괜찮다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참기름을 두른다. 미역국은 끓일 때마다 조금 긴장하게 되는 메뉴 중의 하나인데 왜일까 생각해 보니 친정엄마가 끓이는 방식과 시어머니가 끓이는 방식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게 미역국뿐이었겠냐마는. 




반대하는 결혼을 한 탓에 나는 '애 낳고 친정엄마 미역국 한 숟갈 못 얻어먹은' 애처로운 젊은 엄마가 되었다. 그게 그리 큰 일인가 싶었는데, 친정엄마랑 위아래층에 살며 매일 아침저녁밥을 얻어먹는 형님이 나를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에휴, 애 낳고 친정엄마 미역국도 한 숟갈 못 얻어먹은 불쌍한 우리 동서, 안쓰러워서 어떡하니" 하고 얘기하는 바람에 혼자서 말문이 막혔다가, 나중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얘기를 친하게 지내던 동네 애기엄마 언니들에게 했더니 다 같이 고개를 주억주억하며 "에휴, 우리 불쌍한 막내, 이거라도 한 입 더 먹어라" 하며 내 숟가락에 고기를 얹어 주는걸 보고서야 알았다. 아, 그렇지, 보통 딸애가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와서 미역국을 끓여주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상식을 따지고 있으면 괜히 서운해질 뿐이니, 그런 건 애초에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 

대신 어린 며느리를 예뻐하셨던 시어머니가 소고기를 덩이채로 오래 삶아 육수를 내고서 삶아진 고기를 일일이 손으로 찢어 정성스러운 미역국을 끓여주셨는데, 미역국이 원래 이런 맛이었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성 들여 끓인 미역국은 이런 맛이구나 하고 감탄하며 먹었지만, 같은 음식 두 끼 먹는 것도 싫어하는 입이 짧은 나는 딱 3일째 되던 날에 '산모는 한 달 내내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현기증이 났다. 맙소사, 산후조리가 끝나면 다시는 미역국은 못 먹게 되겠군, 하고 앞이 막막했다. 


둘째를 낳고서도 한참 지나 어쩌다 보니 (라고밖에는 말하지 못하겠다) 친정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게 되었는데, 첫 숟가락을 뜨는 순간 "아, 맞다, 미역국은 원래 이런 맛이었지!"하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먹던 맛은 몸이 기억하는 법이니까. 엄마에게 미역국 끓이는 비법을 묻자, "비법? 그런 거 없는데. 그냥 질 좋은 미역을 사다가 너무 오래 불리지 말고 참기름에 달달 볶는 거지. 그러다 끓는 물을 부어 바글바글 끓이면 금방인데 비결이랄 게 뭐 있니?" 하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그 '별거 아닌' 비법을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서 그 맛이 날 리가 없다. 정작 첫 아이 낳고서 못 먹은 미역국에는 느끼지 않았던 박탈감 같은 것을 그때 느꼈다. 바로 저 미역국이 내가 좋아하는 미역국 맛인데.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엄마한테서밖에 먹을 수 없고, 그나마도 언젠가 엄마가 안 계시게 되면, 아무리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는 얘기다. 외할머니가 끓여주시던 호박범벅(나는 호박죽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강원도 스타일의 호박범벅이라는 요리라는 것을 아주 나중에 알았다)을 첫째 입덧이 심할 때 그렇게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 없어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며 벌써 마음이 아파온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기도 마늘도 미역도 '달달달' 볶는다. 이제 다 볶아졌다 싶었는데... 아차, 끓인 물을 넣으랬는데 미처 물을 끓여놓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냄비를 하나 더 꺼내 물을 가득 받아 불을 최대로 켜고, 미역이 든 냄비는 불을 줄여 계속 볶는다. 너무 많이 볶았나 싶어 마음을 졸이며 미처 끓지도 않은 물을 급하게 붓는다. 싱겁다고 국간장을 계속 때려 부을 것이 아니라 소금으로 간을 맞추랬던가, 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스테이크 구울 때 항상 쓰는 말돈 소금을 적당히 가늠해 넣는다. 

대충 간을 보고, 불을 약불로 줄이고, 손을 닦고 부엌을 나가 아이들을 깨우고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가마도상에 갓 지은 밥을 담아내고, 아직 보글보글 약하게 끓고 있는 미역국을 국그릇에 덜어, 밑반찬이랄 것도 없는 장아찌를 곁들여 낸다. 자, 얼른 와, 얼른 먹고 늦지 않게 학교 가야지, 재촉하며 식탁에 앉는다. 


항상 엄마밥에 프리미엄을 붙여주는 첫째의 "음- 진짜 맛있어!"와, 형의 리액션에 마지못해 "음, 맛있네"하는 둘째의 반응을 보고서야 나도 숟가락을 든다. 미역국을 한 숟갈 입에 넣고, 잠시 멈추었다. 


한 입 더, 한 입 더. 어라, 뭐지? 이거, 꼭 엄마가 끓이던 그 맛인데.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내 미역국에서 엄마의 미역국 맛이 나는 걸까, 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어째서-냐니, 어쩌면 대한민국 엄마들은 다 똑같이 알려줬을 "참기름에 달달 볶으라"는 그 비법들이 정말 통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20년 동안 달달 볶아도 안 나던 맛이 갑자기?), 아니면 그냥 오늘 평소보다 미역을 더 오래 볶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건 가능성이 있다, 다음에 꼭 또 해봐야지), 아니면 오늘 아침에 쓴 미역이 더 맛있는 미역이었을 수도 있고 스테이크용 고기를 쓴 것이 차이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지금의 내가 그때의 엄마만큼, 미역국을 여러 번 끓여본 엄마가 되었다는 단순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끓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엄마의 맛을 찾아가게 되는 건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미역국을 뜨는 아침에 막간의 평화가 찾아온다. 물론, 미역국은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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