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예민 영어강사의 수업일지 4
물건을 구경하러 갔을 뿐인데, 고객님이라고 불러준다. 병원에 검사받으러 갔을 뿐 인데도 oo님이라고 호명하며 나를 찾는다. 대우해주고 존중해 주는 것이지만 어떨 땐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고, 누군가는 날 oo님이라고 부르면서도 표정에서 전혀 날 '님'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드러낼 때도 꽤 있다. '님'이라는 호칭이 정말 '님'으로 대우받는 것인가, 진정 '님'으로 보이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난 일할 때 늘 '님'이라고 불린다. 선생님. 뭔가 '님'자가 붙었으니 그에 걸맞게 모범적이고 바르게 행동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스러운 호칭이다. 호칭에 원래 '님'이 붙어있는 직업이 선생님 말고 또 있을까? 예를 들어 직업을 조사한다고 했을 때, 직업 란에 '간호사, 교수, 회사원, 화가, 변호사, 디자이너' 이렇게 '님'자를 빼고 적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 직업이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느낌이 전혀 없다. 하지만 직업 란에 '선생'은 좀 그렇다. '님'자를 빼니 괜히 얕잡아 일컫는 느낌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항상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걸까? 물론 나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기에 '강사'라는 말로도 직업을 표현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니 이 호칭이 더 익숙할 수밖에.
'선생님' 이라는 세 글자의 의미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해봤던 건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였던 것 같다. 조금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서 실습을 했고, 실습 활동은 수업 참관, 학생 상담, 연구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담당 과목 선생님들의 잔심부름도 포함되었다.) 기간은 5월 말에서 6월 중순까지였는데, 지금과는 달리 교실에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었고 아무리 더워도 옷차림은 단정하게 유지해야만 했기에 아침마다 별 거 없는 옷장 앞에서 고민을 하기 일쑤였다. 교생실습 마지막 주, 이른 더위가 맹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민소매와 반팔의 중간쯤 되는 짧은 반팔에 긴 정장 바지를 입고 등교했다.
그런데 교무실에 들어갔을 때, 같은 반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날 불렀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오라는 거였다. 이유인즉슨, 소매가 너무 짧다는 것. 민소매도 아니고, 목 라인이 많이 파인 것도 아닌 데다 몸에 딱 붙어 체형이 드러나는 옷도 아니었다. 그냥 하얀색 니트 재질의 블라우스였다. 소매 길이가 짧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와야 하다니. 어이없고 황당해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뒤를 돌아 나가려는데 내 뒤통수로 던져진 말 한마디. "선생님이 되려면 선생님답게 옷을 입어야지."
집까지는 거리가 꽤 멀어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생각해봤다. 네? 선생님답게 입는 건 뭔가요? 차라리 유니폼을 입는 게 속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짧은 반팔도 입을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옷 말고 다른 것들은? 말투는? 행동은?
도착해서 다시 열어본 옷장. 잘 어울리고 뭐고 상관없이 얇으면서도 제일 소매가 긴 옷을 입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이제 소매가 길어졌으니 선생님다운 옷차림이 된 것인가? '님' 소리 안 듣고 그냥 '선생'이면 신경 쓸 부분이 줄어들 수 있으려나? 아니면 정말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직업인데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어려웠다.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난 어쨌든 조금은 더 자유로울 수 있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만들어내는 선생님 다움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어강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길도 어쨌든 '선생님'이라고 불리기에 신경 쓸 일은 많다. 2000년대 초에서 벌써 20년이 넘게 세월이 지났으니 지금은 그때와 같은 잣대로 잴필요가 없을 텐데, 난 의외로 보수적인지 내 자신에게 그 시절과 비슷한 잣대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서서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자주 허기가 진다. 그래서 일을 다 끝내면 곧바로 공허한 뱃속을 달래고만 싶다. 배도 고프고 발도 아프고 이럴 땐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식당이 딱 좋다. 그중 한 우동집을 참 좋아했는데, 하루는 김치 뚝배기 우동을 한 사발 들이키고 있었다. 후루룩-후루룩-. 아-좋다. 이제 버스 타면 앉아서 한 숨 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테이블 옆 창문에서 누가 똑똑-노크를 한다. 내 수강생이다. 이럴 땐 마주치고 싶진 않은데. 그냥 지나가도 좋은데 굳이 땀 흘리며 후루룩-대는 모습을 지켜보다 인사를 한담. 창밖에서 "선생님!" 하고 부르며 반갑게 손을 흔든다. 나도 먹다 말고 손을 흔들어 인사에 답을 한다. 그 순간 일 끝내고 혼자 허름한 식당에서 무아지경으로 우동을 먹는 내 모습이 그녀에겐 어떻게 보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이 드는 거다. 실제론 별별 모습이 다 있으면서 앞에서 선생님으로 불릴 때에는 내가 마주하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거다. 이런 욕심이 선생님이라는 이름 위에 올라타고 나를 무겁게 누를 때가 많다.
매일 사람들로 붐비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 하면서, 포장마차에서 혼자 서서 오뎅꼬치를 먹으면서, 길가다 구두 굽이 껴서 넘어지면서 혹시 주변에 내가 가르치는 수강생들이 있을까 두리번 두리번 한 적도 많다. 뭔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항상 당당하고 반듯하고 멋있어 보이고 싶지만, 항상 완벽하게 선생님 다움을 장착하고 다니기는 쉽지가 않다.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이렇게 매일 존중받고 높임 받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늘 그 호칭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늘도 귀여운 초등학생 제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선생님~!"하고 나를 향해 뛰어오는 걸 보면서, 선생님이라는 옷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보려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래, 선생질을 하는 사람이 아닌 진짜 선생님이 되어보자. 선생님다운 사람으로 남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