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예민 영어강사의 수업일지 7
연초가 되면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형형색색 다양한 사람들로 붐비는 강의실이 더욱 알록달록 해지는 때가 1월이다.
엄마 손 잡고 공부하러 온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 주부, 운동선수, 화가, 유학생 등 한 자리에 모이는 게 신기할 정도로 다양한 수강생들이 한 클래스에 모인 경우도 있었다. 각기 다른 곳에 있을 사람들이 '영어 말하기, 영어공부'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이러한 1월이라 어느 누가와도 신기할 것이 없는 때인데도, 어느 날 한 수강생이 나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누가 봐도 연세 지긋하신 할머님이다. 할머니라고 하기에도 뭔가 모자란 듯하여 할머님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앞에 선 나뿐 아니라, 다른 수강생들도 할머님(?) 수강생을 신기한 듯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물론, 배움에 나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클래스는 새벽 6시 20분에 시작하는 새벽반이라, 이 시간에 영어를 배우러 온 할머님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매달 첫날이면 나는 모든 수강생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그 종이에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와 원하는 목표를 적도록 한다. 각 수강생들이 원하는 바와 목표를 미리 알고 수업에 반영하기 위함도 있지만, 수강생들이 이렇게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써 봄으로써 한 번 더 영어공부에 대한 각오를 되새기는 계기도 된다.
수강신청 전에 거의 컨설팅을 받고 클래스가 배정되기 때문에 수강생들의 실력이 거의 비슷해서 적는 내용도 비슷할 거라 예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각자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도 목표도 다 다르고, 특히나 새벽 6시 반이나 저녁 8시 반은 잘 시간, 일할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어서, 그들의 글을 읽다 보면 나도 수업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다져보게 된다.
그날도 첫 수업이 끝나고 수강생들이 제출한 종이를 읽어보았다. 하나하나 솔직한 이야기들, 때론 너무 귀여운 글들까지. 첫인상에서는 숨겨 놓았던 다정함과 영어공부에 대한 열정을 그들의 글 속에서 미리 맛본다. 이런 와중에 눈에 띄는 이름. Grace. 이름이 그 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가르쳤던 영어를 다시 제대로 배워오려고 합니다. 미국에 있는 손주들과 영어로 잘 대화하는 게 목표입니다.' 또박또박 힘 있게 눌러쓴 글씨에서 진심과 각오가 느껴졌다.
그런데 잠깐. 다시 읽어보니 뭐라구? 예전에 가르쳤던 영어를? 그렇다면 영어 선생님이셨던걸까? 완전 대.선.배.님 이잖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너무 놀라웠다. 전에 영어를 가르쳤던 분이 기초회화를 왜?
다음 날 수업 시작 10분 전. Grace가 가장 먼저 등장했다. 허리까지 굽혀 인사하시는 바람에 내가 괜히 더 허리를 숙여 보았다. 수강생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해 본 건 아마도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인사를 하는 사이 Grace는 가방에서 책을 꺼낸 뒤 주섬주섬 무언가를 또 꺼내기 시작했다.
"선생님 새벽에 식사는 하고 오세요?"
"네~아주 많이 먹고 왔어요~~. 안 먹으면 힘들어서 일 못해요~~. Grace는요? 이렇게 영어 이름으로 부르는 건 괜찮으세요?"
"그럼요 선생님~.난 새벽이라 밥을 못 먹고 나와서 고구마를 싸왔는데 선생님도 드실래요?"
"전 많이 먹고 와서 배불러서요~혹시 괜찮으시면 커피랑 같이 드세요."
강사실에서 잔뜩 내려온 커피를 Grace에게 내밀었다. 사실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열심히 영어를 배우겠다고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서 온 분에게 예전에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왜 다시 배우냐고 묻는 것이 어쩌면 무례한 질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Grace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수강생들도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그녀가 다른 수강생들을 따뜻하게 아우르고 있었다. 전에 영어를 가르쳤다는 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다른 수강생들과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귀 기울여 설명을 듣고, 여러 액티비티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나중에 저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과거의 나에 얽매이지 않고 꾸준히 발전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답이 나온다. 아니.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의 나는, 어디에 가서 누군가의 설명을 듣거나 할 때 '저렇게 설명을 하면 듣는 사람이 복잡하게 느끼지...' 또 어떨 땐, '아니 왜 저렇게 수업을 하지? 좀 더 정확하게 요약해줘야 하지 않나? 가르치는 태도는 또 왜 저래?' 하면서 어딜 가나 누가 붙여주지도 않은 선생님이라는 명찰을 달고선, 내 앞에 선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느라 정작 들어야 할 내용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정말 오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이다.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Grace에게서 예쁜 카드와 함께 작은 선물을 받았다. "선생님과 수업해 보니, 영어가 이렇게 재미있네요. 옛날에 나도 이렇게 수업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카드에 적힌 이야기가 날 부끄럽게 했다.
가르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프라이드를 어깨에 얹고 다닌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겸손한 자세로 그녀가 나에게 전해준 과찬이, 오만덩어리였던 내 자신을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카드에 적힌 칭찬에 취할 때가 아니었다. 나에겐 날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난 언젠가라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사실, 그 당시의 나는 스스로가 비누 같다고 생각했었다. 열심히 거품을 내서 남을 깨끗하게 해주고 나면 점점 작아지는 비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매 시간마다 최대한 다 나눠주고 나면 조금씩 조금씩 내 안에 쌓인 것들이 고갈되어 가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나를 더 채워나갈 틈 없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가진 것을 다 풀어내다가 난 그자리에 그냥 텅 빈 상태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또한 나 때문이지 않은가. 나란 사람은 매일 피곤하다는 이유로, 휴가가 따로 없다는 핑계로, 또 시간이 없다는 말로 뭔가 나를 새롭게 채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뭔가를 배우는 입장이 된다는 것이 어색했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새롭게 채우지도 못한 채 그냥 그 자리에서 매일매일 계속 깎여 나가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의 나는 괜찮은걸까?
그 다음 날 미리 약속을 잡고, 원장님을 찾아갔다.
똑! 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