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가을 Aug 28. 2022

사주팔자를 거슬러보다

초예민 영어강사의 수업일지 8



한겨울에 이른 새벽 공기를 뚫고 집을 나서면서, 일이 다 끝나고 강사실로 내려와 퉁퉁 부은 발을 하이힐에서 해방시켜 보면서, 여름과 겨울에 1주일 정도 멀리 휴가를 떠나곤 하는 주변 지인들을 보면서, 나는 순간순간 다른 일을 꿈꿔봤다.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하는 나는 또 어떨까 라는 상상.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는 영락없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회사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으니 이른바 사회생활 속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재테크나 부동산 같은 것은 더더욱 몰랐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 외에는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나이만 들어가는 미혼 여성 영어강사였다.


때론 이 일이 개인주의적 성향인 나와 딱 맞는다 생각했고,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나만 잘하면 되는 일이니 편하다 싶었다. 하지만 익숙한 곳에 계속 머물면서 그게 편하다고 안주하는 순간 우물 안의 개구리가 탄생한다. 그게 바로 나였다.


원장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식당에서 잠깐 앉아 기다리면서, 그동안 일탈(?)을 꿈꿔왔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계속 같은 일만 하면서, 그렇다고 내가 이것을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이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다른 길을 가보자는 충동적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쏟아짐과 동시에 워-워-잠깐 진정하고 더 고민해보자는 쫄보스러운 생각들이 아우성치는 상황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머릿속에서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음에도 놀랍게 내 입에서는 그만두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원장님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고, 난 회사 생활을 해 보거나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데?! 충분히 고민해 본 것 맞아요?"

"자주 들었던 생각이긴 해요.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다른 걸 해보면서 배워야 할 때 인 것 같아서요."

"그럼 일주일 동안 좀 더 고민해 보고 확실히 결론이 난 다음에 다시 얘기하는 건 어때요? 단순히 회사 생활을 해 보고 싶은 거라면 우리 회사에 다른 부서로 가서 일해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 좀 더 생각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충동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사실 그것도 맞다. 생각을 한 다고 한 것이지만 좀 더 고민하고 알아본 후에 확실한 결정을 내려 만났어야 했다. 그 와중에 먹고 있는 오므라이스가 참 맛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웃음이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다가, 귀가 참 얇게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입으로는 음식의 맛을 느끼고 있다니. 심각하게 고민해 본 것이 아니었던 걸까? 오락가락 내가 나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난 크리스천이지만 길가다 '사주'라고 쓰여 있는 곳을 발견하면 재미 삼아 가끔 들르기도 한다. 해 주는 이야기를 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꽤 신통하다고 믿고 싶어지는 곳이다. 그때도 고민이 있던 때라 걸어가다가 사주를 보는 작은 가게가 눈에 띄었다. 좁은 공간을 여러 역술인들이 나눠 쓰고 있었다.


난 직업을 바꾸려고 하는데 어떤 일이 맞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태어난 일시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넘긴 후 곧 듣게 된 말은 "어차피 다시 이 일을 하겠네. 아무리 다른 데 가려고 해도 갔다가 다시 와" 라는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순간 기분이 나빴다. 난 새로운 도전을 해 보고 싶은데 마치 "넌 해봤자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제가 무슨 일을 하는데요?"

"말하는 직업 아니야? 가르치는 일."

"괜히 말투 보고 짚으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내 얘기를 들을 필요도 없지."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그 역술인에게 난 꽤 무례한 손님이었다. 뭔가 새로운 길이 있다는 말이 듣고 싶어 돈을 내고 들어갔던 게 잘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그 역술인 용(?)한 사람이었다. 난 그 사람 말대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이곳저곳 여러 곳을 돌고 돌아 다시 금방 이 자리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사주팔자가 정말이라면 그 사주팔자를 거슬러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다시 돌아온 것도 내 선택이었다. 혹시라도 아직 시티극장 뒤에 그곳이 있다면 가서 당신 말이 맞았다고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이전 07화 대선배님의 출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