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예민 영어강사의 수업 일지 6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하다 보면 그 사실이 피부에 와닿는 경우도 많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컨디션에 상관 없이, 여러 사람 앞에서 항상 기운찬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 이왕이면 모두 다 나에게 호감을 느끼면 참 좋으련만, 세상사 다 내 맘 같지 않은 건 불변의 진리이니 어쩔 도리는 없다.
앞에 앉은 사람의 표정에서 간혹 무언의 의사를 읽어낼 땐 '그럼 그렇지. 역시 그럴 것 같았어' 하며 첫인상에서 느꼈던 나의 판단이 맞았다는 일종의 희열감(?)이 들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물론 기운이 쭉-빠져버린다. '이 수업 나랑 별로 안 맞는 것 같은데?' 하는 메세지가 얼굴에서 느껴질 때에도, '그런 표정을 짓는 당신이 나도 맘에 들지 않아요!' 라는 반격의 표정을 지을 수는 없으니, 못 본 척, 이곳은 온탕인 척, 나 자신을 속이며 평정심을 유지해 본다.
어찌 보면 이렇게 표정으로 확실히 감정을 드러내 주는 사람들이 더 편하기도 하다. 이 수업에 대한 그들의 호감도나 감정 상태를 알 수 있으니, 그에 따라서 수업의 강약도 조절하고 이왕이면 그들의 스위치를 호감으로 돌려보려고 더 노력을 하면 되니까. 정말 문제인 경우는 도통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때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도 꽤 있었다. 이 곳이 냉탕인지 온탕인지 판단을 할 수 없다.
오래 전 저녁반 수업을 할 때였다. 2시간 내내 수업도 잘 참여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마치 쏘아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강생이 있었다. 1주일 동안 바뀌지 않는 표정, 곧 수업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수업시간에 누군가가 웃긴 질문을 해도, 내가 마이크 줄에 걸려서 살짝 삐끗해서 다같이 킥킥 거리거나 "선생님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도 전혀 동요하거나 입모양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팀을 짜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매번 본인은 괜찮으니 혼자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뒷자리로 옮겨 교재를 읽거나 "혹시 어려운 것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라고 다가가도 대꾸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업을 시작한 지 2주 정도 지났을 때였나?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자리에서 나가는데 혼자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뭘까? 뭔가 불만사항을 이야기 하려나?' 표정이 매번 좋지 않아서 마음이 불편해도 말을 걸었을 때 답이 없으니 반 포기 상태였는데, 이번엔 상황이 역전되어 이렇게 나에게 다가오니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나 하고 그 찰나의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고보니 첫 날 출석을 불렀을 때 손 들고 대답했던 이후로는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어떤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할 지 두근두근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저번 시간부터 목이 아프신 것 같더라구요."
"아..."
그 수강생은 나에게 용각산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너무 뜻밖이라 당황한 채로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수업은 어떤지, 혹시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물으려 하는데 그 수강생은 다시 바로 휙-돌아 나가버렸다. 편하게 서로 부를 수 있도록 영어이름을 지어보자고 했을 때에도 끝까지 이름을 정하지 않아서 본명을 부르기도 뭔가 어색한 찰나, 성큼성큼 걸어나간 그 수강생의 속도에 잰 걸음으로 쫓아가서 말을 붙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선물로 주신 약을 먹었더니 목 상태가 좀 나아진거 같은데 어때요?"라며 내일 다시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차가운 냉탕에서 온탕으로 옮겨진 듯한 감정. '표정만 보고 괜히 오해한 것인가?'라는 약간의 자책을 하며 강사실로 내려갔다. 기분이 좋아보였는지 옆자리의 친한 동료 강사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저번에 내가 말했던 8시반 수강생있잖아. 물어봐도 대답없고 항상 기분 안좋아보인다고 했던 그 수강생말야. 기억나?"
"어 기억나. 설마 이거 그 수강생이 준거야? 왜?"
"모르겠어. 그냥 목이 안좋아보인다면서 끝날 때 주고 갔어. 별 말 없이. 아무래도 내가 오해를 한 건지 아님 그 수강생 원래 표정만 그런 건지 모르겠어."
"그래? 설마 그 약에 뭐 다른 거 들어있는거 아니야?"
"뭐야~~~~! 왜 또 사람 성의를 그렇게 몰고 가고 그래?"
"농담이야. 농담~"
"나 지금 먹어본다?!"
약 뚜껑을 열고, 곱게 갈린 하얀 가루를 딱 한 숟갈 떠 본다. 괜히 겉에 보이는 표정만 가지고, 내가 가진 기준만 가지고 사람을 재고 판단한 게 미안해졌다. 곱디 고운 하얀 가루들을 보면서, '그 동안의 내 마음이 이렇게 하얗지 못하고 먼지가 껴있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목에 넣고 물을 마셨다. 딱 작은 한숟갈일 뿐인데, 뭐 플라시보 효과도 아니고 목이 금세 부드러워진 것 같은 착각 마저 든다. 그 동안 계속 신경쓰였던 얼룩이 지워지고 주름이 펴진 느낌이었다. 묵은 빨래를 다 해치운 느낌이었다. 모두 다 나를 좋아할 수 없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의 욕심과 예민함 때문에 그렇게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이런 따뜻한 온탕속에서 오래토록 머물고 싶었다. 내일의 수업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그 다음날. 난 바로 냉탕으로 옮겨졌다. 수업이 시작될 무렵 하나 둘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고, 그 수강생도 조금 늦게 들어와 인사 없이 뒷쪽의 자리에 앉았다. 2시간 중 1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쉬는 시간에 그 수강생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어제 제대로 묻지 못한 질문들을 하려는데, 갑자기 가방을 들고 그 수강생이 나갔다. 따라나가려는데 앞에 앉은 R이 그 시간에 배운 표현에 대한 질문을 한 상황. 어쩔 수 없이 질문에 먼저 답을 해주는 사이,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갔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자리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복도에 나가서, 아직 자리에 들어오지 않은 수강생들을 챙기고, 그 수강생도 찾아보는데 아무리 봐도 없다. 수업을 하면서도 결국 돌아오지 않은 그 수강생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다른 수강생들과도 전혀 대화가 없는 사람이라서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나?'하는 걱정까지 들었지만 그 날 수업이 마무리 될 때까지 그 수강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강의실을 나와 데스크에 가서도 혹시 우리반 수강생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봤는지 물어봤지만 알지 못했다. 그 후로도 계속 그 수강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출석부에 있는 전화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도대체 뭘까? 온탕에 있는줄 알았는데 그 수강생의 마음은 여전히 냉탕이었나? 나의 착각이었나? 아니면 그만큼 본인이 친절을 베풀었는데 내가 제대로 화답을 하지 않아서 기분이 상한것인가?' 이해가지 않는 상황에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 날의 상황을 옆자리 동료강사에게 다시 이야기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혹시 메이가 너~~무 싫어서 약에 뭔가 넣었는데, 오늘 봤을 때 컨디션 더 좋아보여서 실망하고 간거 아냐? 하하하하하하핳"
"뭐야~정말~왜 또 이야기를 스릴러로 만들어?"
"왜에~그 이야기 몰라? 어떤 선생님 반에 평소에 엄청 차갑게 굴고, 수업시간에 당황스러운 행동까지 했던 한 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학생이 웬일로 요구르트를 먹으라면서 주고 갔대. 선생님은 별 생각 없이 바로 마셨는데, 그 날 그거 먹고 배탈이 났대. 그런데 그 날 이후로 그 학생은 학원에 나타나지 않았대. 아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거구, 이 이야기는 진짜야."
설마. 정말 설마. 그런 상상은 절대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약은 효과도 좋았다. '용각산을 줄 때는 정말 걱정되는 표정이었다고. 진심인 표정이었는데...' 아무튼 그 수강생 때문에 난 며칠 간 냉탕과 온탕을 오고갔다. 나름 사람을 금세 잘 파악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날 이후로는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아직도 궁금하다.
그 날 당신은 왜 갑자기 사라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