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더라구.

Didn't lift a finger.


"원래 사람은 설득이 되는 게 아니야. 누군가를 바꿔보려고 하지 마."

정말 맞다. 예전에 한 토크쇼를 보다가 저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뭔가 세상의 이치를 좀 깨닫게 된 느낌이랄까? 아니 어찌 보면 너무 절망적인 것 같지만 40대 중반이 다 되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말이라는 결론이 난다. 사람은 기본값을 향해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관성의 법칙이란 게 있는 걸까?


난 멀지 않은 과거에 어떤 사람에게 새로운 모습을 기대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합당한 노력도 해보았으나 몇 개월 지나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에게 인간적이 관심이 있다거나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는 절대 아니었다. 함께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뿐이었다. '일'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본질적인 '일'을 잘 해내는 것 만큼이나, 부수적인 '일'에도 굉장한 시간과 에너지를 요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부수적인 '일'에는 불편한 사람, 아무래도 싫은 사람과도 잘 지내며 주어진 '일'을 함께 해 내야 하는 고난도 미션이 꼭 끼어있기 마련이다. 내가 바꿔 놓고 싶지만 쉽사리 바뀌지 않는 그 사람의 행동(?)과 성향은 마치 치아와 치아 사이에 껴 있는 상당히 거슬리는 그것과 같다고 표현하면 적절할지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는 엄청난 재주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급박한 상황과 그 상황에 맞게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감을 못 본 척하는 재주였다. 다 함께 엄청난 양의 파일을 정리해야 한다거나, 이 자리에 있는 (자리에 딱 3명 있었다) 누군가는 야근을 해야만 한다거나, 또는 누가 봐도 지금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그 사람과 내 앞에 떨어진 경우, 그 사람은 그 상황과 눈앞에 분명히 떨어진 일감을 매번 못 본 척했다.


아니 그 정도면 초능력에 가깝다고 살짝 비꼬아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

솔선수범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1/N은 담당해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렇게 하셔야 합당하지 않냐고 말도 해 보았지만 당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분명 나는 다른 나라 말이 아닌 우리말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리고 분명 우리말로 답을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하자면 별도의 통역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나는 결론을 냈다. 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 사람은 또 한 가지 독보적인 스킬마저 보유하고 있었다.

모두 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순간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스킬말이다! 어쩌다 한 번 팀 내 서가를 정리해야 하거나, 많은 양의 서류를 여러 곳에 일일이 등기로 발송해야 하는 경우에 당연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분명 다 보이고 다 들릴 터인데 '나는 몰라요. 나는 안 보여요.' 초능력으로 정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많은 분량을 처리하는 건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그 정도 모션이라도 보여줬다면 그렇게까지 얄밉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지금도 얄미운 감정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이렇게 거울 치료가 되는 것인가.

과거에 몇 년간 함께 했던 초능력자를 이제 와서 추억(?)하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된다. 엄마가 밥을 준비하는 동안 편하게 누워있다가 다 차려진 밥상을 편하게 받고, 또 엄마가 설거지를 하면 난 TV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던 철없던 시절의 나를 이제 와서 반성한다. 나이 먹어 이제라도 반성하니 다행이다. 누군가가 옆에서 힘들게 무언가를 하면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보고만 있는 밉상이 되진 말아야겠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다.


"We were all working hard, but you didn't lift A FINGER!"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다.'라는 말은 영어에도 있다.

영어로는 not lift a finger 이라고 표현한다. 직역하면 '손가락 하나도 들어 올리지 않다'로, 우리말 표현과 아주 흡사하다. 워낙 양태를 잘 묘사하는 우리말에서는 '까딱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만 영어에서는 '들어 올리다'라는 의미의 'lift'를 사용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다. 역사와 문화가 다르지만 이렇게 굉장히 비슷한 표현을 지금까지 사용해 왔다는 것이 재미있다. 사람 사는 곳은 달라도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인가?! 이런 점에서 역시 언어는 흥미롭다.


[한 모금 더]

lift

동사와 명사로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다. 동사로는 주로 '(위로/ 다른 위치로 옮기기 위해) 들어 올리다'의 의미로 쓰이고, '승강기, 엘리베이터'를 뜻하는 명사로 쓰이는 것도 아마 익숙할 것이다. 영국 영어에서는 give A a liftgive A a ride(A를 차에 태워주다, A를 차로 데려다주다)의 표현을 대신하기도 한다. 즉, lift는 위쪽 또는 다른 방향으로 무언가를 들어 올리거나 옮기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체크 체크]

not lift a finger: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다

= not raise a finger


[이렇게 활용]

* 해석은 자연스럽게 번역한 것으로, 직역이 아니므로 주의!


You didn’t lift a finger on the project, did you?

너는 프로젝트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했잖아, 맞지?


While I was doing all the chores, he didn't lift a finger.

내가 모든 집안일을 하는 동안,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했어.


On weekends, she never lifts a finger and just stays on the couch watching TV.

그녀는 주말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계속 소파에 앉아 TV만 봐.


Why didn't you even lift a finger at that time? Huh?

왜 넌 그때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한 거야?


None of the guys lifted a finger during Chuseok!

(그) 남자들 중 어느 누구도 추석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했어!


He expects everyone to work hard while he doesn’t lift a finger himself.

그는 모두가 열심히 일하길 바라면서 정작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








"넌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마. 내가 (다)할게!"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직접 들으면 정말 감동이겠죠? 우리 가끔은 아끼는 사람에게 저렇게 멋있는 말도 하며 살아봅시다.

"You don't have to lift a finger. I'm o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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