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던 세계의 그녀들을 지켜보는 일
'여군에 지원하는 사람들 자체가 아무래도 조금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중략)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비교적 자아가 강하다는 점이다. 조금 더 풀어 말하면 개척 정신, 독립심, 인생에 대한 가치관 같은 것들이 남들보다 뚜렷했다. 생각해 보라. 다른 길도 많은데 굳이 남성들만의 무대랄 수 있는 군대를 지원하는 여성이라면, 구체적인 동기야 저마다 다를지라도 삶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성은 분명히 세운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피우진,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입대 전에 여자 군인 관련한 책을 한 권 읽었다. 전설적인 피우진 예비역 중령님의 책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유독 한 문장만은 기억에 남았다. 30년간 군 생활하신 그분의 '여자 군인'에 관한 통찰이 담긴 부분. '여자 군인'. 내가 소속되어 있지만 그들은 내게도 흥미로운 집단임은 분명하다.
여자 군인을 지켜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들과의 만남은 내게 흥미롭다. 다만 나는 그 집단에서 '나'를 예외로 친다. 나는 어쩌다 잠시 이 집단에 섞였을 뿐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자 군인'과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고, 멀어야 하기에. 선을 그으려는 게 아니라 훌륭한 그들(물론 모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은 내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나는 그들의 멋짐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여자 군인'의 특별함을 생각해 본 계기는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여군 사관을 지원했을 때가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여군 사관 면접 당시 실물로 처음 마주한 여자 군인이셨던 면접관님(중령)은 여자 군인 집단에 자부심이 강했다. 당시에는 군인도 아니었던, 단지 면접 대상으로 만난 일반인에게까지 지적을 하셨던 그분. 이 집단은 예쁜 여자를 뽑는 게 아니라 바른 여자, 바르게 생긴 여자를 뽑는 거라며 집단의 정체성을 말씀하시던 그분.(바르다: 겉으로 보기에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다, 말이나 행동 따위가 사회적인 규범이나 사리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들어맞다.) 내면의 단단함이 온몸으로 발산되던 그분. 예사롭지 않던 그분은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도 인상 깊었다. 어쩌면 그때 은연중 알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그분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면접관이시던 그분의 지적 덕분에 당시 나는 말할 때 고개를 까딱거리는 습관이 있음을 알았고, 의식해서 차츰 그 행동을 지워나갔다.
그 후 뜻밖에도 여자 군인 집단에 받아들여진 나는 정신없이 끌려다니던 후보생 시절을 지나 장교가 되었고, 임관 후 참석한 병과 선배들과의 모임에서 새로운 여자 군인들을 만났다. 겨우 임관해 갓 군인이 된 나에게 선배들은 다른 세계의 종족 같아서, 어쩌다 내가 그 모임의 일원이 된 사실이 조금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멋졌다. 당시 선배들에게 느꼈던 멋짐은 어떤 것이었을까.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강인함을 기반으로 한, 자기 자신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멋짐이었다. 강인하고 주체적인 멋짐. 씩씩하고 당당한 멋짐. 스스럼없는 태도가 빚어내는 멋짐. 내가 생각하던 미(美)의 기준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가졌던 그들은 그래서 특별했다. 그곳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세계였다.
자대에 온 뒤 본격 군인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 후 파견을 통해, 업무를 통해, 행사를 통해, 소개를 통해 종종 여자 군인들을 만났다. 피우진 중령님과 같은 통찰력은 없는 내가 만난 여자 군인들 모두를 아우르는 특징이나 키워드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그릇으로는 모든 사람이 좋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너그럽지 못한 내 눈에는 사람 모이는 곳이 의례 그러하듯 시기, 질투, 험담, 뒷공론, 견제, 가벼움, 뺀질거림 등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들도 보였으니깐. (어쩌면 나는 타인을 통해 고치고 싶던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선호하고 한구석이라도 닮고 싶던 유형의 군상(群像)은 분명히 있었다. 다양한 유형의 그녀들 중 나는 불을 품은 그녀들을 사랑했고 그녀들에게 매료되었다. 꺾이지 않는 심지와 단단한 한끝을 가졌던 그들. 결코 독단적이지 않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끌려다니지도 않았던 외유내강의 그들. 무엇보다 감복했던 것은 그녀들의 계산하지 않는 태도였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자신을 온전히 갈아 넣었던 그녀들. 온전히 헌신하던 그녀들. 온전히 현재에 머물던 그녀들.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여자들. 뜨거웠던 그녀들. 스스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놓을 수 있던 불같은 그녀들.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연출하지 않아도 자신 자체로 감동을 주었던 그녀들.
내가 선호하던 유형의 여자들은 마침내 내가 닮고 싶은 유형의 성정을 품은 여자들일 것이었다. 타버릴 것 같은 불이 아닌 온화하지만 강렬하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나는 그런 그녀들이 좋았고, 그 한끝이라도 닮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그토록 뜨겁게 불사르던 그녀들의 다음 행보가. 끝내 확인해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예감한다. 이들을 끝내 짝사랑할 뿐일 것을. 이들이 뜨겁게 머물던 그 세계에 나는 결코 닿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들이 자신을 갈아 넣었던 그 세계에 결국 동화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그와 동일한 뜨거움을 결코 겪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한때 그녀들과 같은 세계에 몸담았던 것을 의미 깊게 여기고, 나는 나의 뜨거움을 품고 그녀들과 다르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그래서 닿을 수 없던 그녀들이 더욱 특별하고 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예감한다. 그래서 그녀들을 응원한다. 훌륭한 그녀들이 남아서 오래오래 이 조직을 지켜주기를. 그녀들로 인해 이 조직이 더욱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의 중대장님이 내린다. 밝은 기운을 품은 그녀가. 건강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내뿜는 그녀가. 나의 첫 여군 상관이.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녀 역시 가슴에 불을 품은 사람임을. 첫눈에 확신한다. 그녀를 좋아하게 될 것을. 어쩌면 이미 좋아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녀도 나를 좋아할 것을 느낌은 알려준다. 나는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경례한다. 예감했던 밝은 웃음을 띠고 그녀가 내게 악수를 청한다. 그 손을 힘차게 맞잡는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