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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Nov 13. 2024

버티는 용기에 관하여

'진급'의 의미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다. 06:00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고 07:40쯤 부대 도착해서, 중대 상황 회의를 마치고 08:30에 중대원을 소집해 일과를 배치하고 09:00시에 2.5톤 카고 트럭을 타고 탄약고 지역으로 이동해 일하는 날. 탄약 관리(타 기관 수급 및 재고관리)와 탄약고 관리(제초작업 및 건초 수거)를 병행하다 점심시간에 다시 숙영지로 복귀했다가 13:00시에 다시 집합해 탄약고로 이동하는 날. 오전과 동일한 작업을 16:30까지 반복하다 17:00시에 다시 주둔지로 돌아오는 날. 분대장들과 상향식 일일 결산을 마치고 17:30에 중대 행정반에서 간부 회의를 진행하는 날. 18:00시를 전후해 회의를 마치고 초과근무를 시작해 21:00시 전후로 퇴근하는 날. 매일 반복되는 평시(平時) 탄약 부대의 하루이다.  

 오늘도 그렇게 이미 아는 날이 펼쳐지고 있다. 어제도 겪었고, 내일도 겪을 매일의 크고 작은 차이만 있는 일상. 일련의 과정을 따라 그런 날을 보내고 평소보다 일이 일찍 끝나 16:00시에 숙영지에 돌아왔다. 예상되는 다음 일정을 생각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앞 중대 후배가 나에게 온다.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뭐지? 이 예상 밖의 시나리오는? 이어지는 소식. "선배님께서 대위 진급 예정자로 확정되셨다고 발표 났습니다. " 응? 순간 멍해진다. 방금 들었던 말을 다시 곱씹어 본다. '... 나? 나? 내가 대... 위?' 얼결에 일단 고맙다고 답한 뒤, 잠시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이 부대에는 나의 아지트가 한 곳 있다. 혼자 있을 곳이 없는 부대에서 지휘 실습 때 이미 답답함을 느낀 나는 약간의 사각지대를 한 곳 찾아냈다. 연병장 한쪽 구석에 사열대로 이어지는 계단 끝자락. 여기는 웬만해서 누구의 눈에 잘 띄지 않고, 누가 잘 오지 않는다. 마음이 진정이 안 돼 그곳에서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한다. 방금 들은 소식은 내가 대위 진급 대상자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대위(진)의 신분일 뿐 중위 계급장을 달고 지내며 실질적으로 대위가 되는 것은 10개월 뒤의 일이 되겠지만... 어쨌든 진급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위가 되고, 중위가 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진급 누락이 거의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급이 되는 중소위와 달리 대위는 연차가 되었다는 이유로 모두 진급을 하는 것은 아니고 진급이 늦어질 수 있다. 물론 내게 특별히 부적합 사유(음주운전, 복무 중 과실, 사건사고 및 기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진급 발표는 내게 지나치게 뜻밖이다. 아마 입대 후 너무 오랫동안 심적으로 불안정한 시간을 보내서 그런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안정되지 않았다. 군에 계속 몸담고 있다면 언젠가는 대위가 되겠다고 막연히 생각한 적은 있지만, 당장의 나를 보면 그것은 현실감이 없었다. 다들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날들 나는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는 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 내게, 안정되어 보이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선배들이 나의 미래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안정된(혹은 안정되어 보이는) 군인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 그런 날이 올까. 현재의 나와 괴리감이 너무 커 막연하고 현실감 없는 미래였다. 어찌 됐던 부모님께도 진급 발표 사실을 알리고 마음을 차분히 가지려 하는데 잘 진정되지 않는다. 

 전화가 온다. 창장님 방이다. 진급 확정자(나, 군의관) 들과 차 한잔 하시고 싶다는 호출이다. 혼자 있고 싶지만,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창장님 방으로 갔다. 창장님과 군의관과 앉아 덕담을 주고받으며 차를 마시려는데... 와... 큰일 났다... 하필.... 이 순간 터져 나온다. 꾹 누르고 누르고 참았던 그 감정이 하필 이 시간 터져 나온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나는 원래 잘 우는 사람도 아닐뿐더러 부대에서 우는 건 더더군다나 말도 안 된다. 군의관은 몇 번 보지도 않아서 어색하고, 심지어 이 축하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다. 심플하게 덕담만 주고받고 떠나면 되니 다른 생각하자. 다른 생각... 제발.. 필사적으로 생각을 돌리려고 했지만 늦었다. 이미 의지의 영역 밖으로 가버렸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아무리 애를 써도 멈출 수가 없다. 난 원래 잘 울지 않는다. 마음은 여린 편이지만 눈물 쪽 감정은 심히 메말랐다. 더구나 부대에서 울지 않겠다는 것은 나의 철칙과도 같다. 우는 캐릭터가 될 수 없다. 근데 쓰나미같이 터지는 감정을 사력을 다해도 막을 수가 없다. 누르고 있던 모든 감정이 밀려온다... 하필 지금..

 수도 없이 그만두고 싶었던 시간들,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들,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막막했던 날들,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잠들기 싫었던 날들, 아침에 눈을 뜨며 절망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날들, 이 길을 택한 것을 수없이 후회했던 시간들... 그 많은 시간들은 단순 '고생'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견디고 또 견디고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나에게 대위 진급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신분 변화가 아닌, 무언가를 견디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필사적으로 버텼기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을 절감해서. 대위는 내게 '대위'이상의 의미를 지닌 계급임이 느껴져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던 날들을 이어갔던 이유가 버티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군대는 기업이나 다른 기관들처럼 그만둔다는 의지를 밝힌다 해서 바로 전역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정해진 복무 기간을 채우지 않는 한, 개인의 변심이나 적성에 맞지 않는 등의 이유로 당장 그만둘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잠깐의 판단으로 복무연장을 택했다 마음이 바뀌어도 번복할 수 없고 정해진 복무 기간을 반드시 채워야 하는 조직이기에. 물론 원한다면 도망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의무복무 대상자가 아닌 내가 포기해도 어떠한 법적 불이익이 따르는 건 아니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함께하던 분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버티는 것이 포기보다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다. '버팀'을 유지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출근하고, 하루를 보내고, 주어진 일을 하는 시간 동안 수없이 자신을 거스르며 스스로를 다잡을 용기가 필요했다. '진득함'이라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어쩌면 내 안에 없었을 그것을 어떻게든 끌어내 결국 이제까지의 시간을 견뎠고, 이겨낸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냈다. 그 시간들이 자꾸 생각났다. 

"군의관은 나가있게." 결국 군의관은 내보냄을 당한다. 아... 군의관님 죄송해요. 이 자리는 군의관님도 축하받으셔야 하는 자리인데... 차 한잔 제대로 못 드시고.. 나중에 사과드리고 축하 문자도 드려야겠다. 그렇게 군의관이 퇴장한 뒤에도 한참을 더 울고 나자 비로소... 이성이 돌아온다. 

 찾아오는 고요함... 그리고 민망함. 이제 어떡하지? 계속 이러고 있을 수 없으니 이제는 고개를 들어야겠지?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고 창장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눈을 보니.. 이분은 이미 알고 계신다. 정확히.. 아주 정확히 아시는 표정이다. 아무런 설명도 양해도 필요치 않을 표정... 수없이 긴 시간을 견디고 중령의 자리에 가셨을 창장님의 보이지 않는 시간을 생각하며 갑자기 나는 몹시 겸허해진다. 

 그렇게 창장님과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모자를 눌러쓰고 빠르게 화장실로 이동해 울었던 흔적을 한동안 지운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중대로 간다. 아무도 무슨 일 있었냐고 묻지 않는 걸 보면 멀쩡해 보이나 보다. 다행이다. 이어지는 중대 간부들의 축하 인사. 비로소 웃으며 답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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