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시간들의 기억
인원이 많은 곳에서 조직생활을 하면, 누군가의 생일을 일일이 챙겨주기에는 무리가 있어 생일날은 축하 인사만 건넨다. 물론 나의 생일도 알리지 않는다. 바라는 것도 없거니와 혹시 모를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아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그날을 언제나처럼 흘려보낸다. 당연히 소대원들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평소처럼 일과를 마치고, 평소처럼 끝나지 않는 업무로 저녁까지 부대에 남았다. 행정반에 있는데 분대장이 찾아왔다. 잠깐만 오시라고 해서 따라갔다. 생활관으로 갔더니... 서프라이즈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 초코파이 케이크와 조촐한 다과 그리고 선물(편지 모음)이. 진심 놀라서 가만히 있는데, 축하 노래가 이어진다. 와... 대박. 너네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애들이었어? 예상 못 한 이벤트에 기분이 특별했다. 서프라이즈 생활관 생일파티를 살면서 몇 번이나 겪을 수 있을까. 특히 감동은 손 편지다. 어디서 구했는지 내 사진이 붙여진 상자에 편지들이 담겨있다. 잘 간직해야지... 마침 지나가시던 중대장님이 파티의 현장을 보시고 부러워하신다. 군 생활 오래(?) 하고 볼일이다.
작은 것들이 나를 살게 만든다. 군 생활 간 가끔 주어지는 빛나는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이 주는 힘을 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힘은 강력해 한동안의 일상을 견인한다. 견뎌야 하는 시간에 맞설만한 힘으로 마음을 지탱해 주기도 한다. 애정이란 무엇일까.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상대를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 아닐까. 애정의 강력함은 진심에 있을 것이다. 받는 사람의 마음은 물론 주는 사람의 마음도 채워주는 온기. 설명할 수 없지만, 아는 사람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기운. 그 기운에 힘입어 나는 한동안 너그러움을 장착할 것 같다. 너희의 장구류 정리가 조금 미흡해도 괜찮고, 정신교육 성적이 부족해도 괜찮으니 전역 전까지 사이좋게 지내다가 몸 건강히 전역하렴 정도만을 바라는 너그러움. 부족한 소대장이라는 생각이 종종 나를 괴롭혀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이렇게 지내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희미한 확신.
한때는 소대원들과의 관계를 밀당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런 시간 찾아오는 마음을 보며 느낀다. 어쩌면 밀당은 확신 없는 관계 속에 성립하는 개념일 거라고. 적어도 우리의 관계가 밀당의 관계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겠지만(그게 밀당일까?), 애정적인 측면만 놓고 본다면 애초에 이 관계는 내가 질 수밖에 없도록 기울어진 관계 같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기쁠 수는 없을 테니... 아니다. '진다'라는 표현도 적당하지 않다. 될 수 있는 한 진심을 표현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관계라 하자. 이 시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퇴근 후 옆방 동기를 기다리며 받은 편지를 찬찬히 읽어본다. 손글씨로 써진 마음들을. 편지를 읽으며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힘인 '애정'을 다시 떠올려 본다. 문득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곳에서 어떤 시간 종종 나를 견인했던 힘의 정체를. 이곳에서 아주 가끔 나는 마음에 이끌려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시간이 있었다. 이런 아이들이었다. 휴가 미복귀로 모두를 걱정 속에 밀어 넣고 마침내 복귀한 아이, 입대 후 지속적으로 괴롭힘에 시달리던 아이, 제대 후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틈틈이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아이, 군 간부가 되고 싶은데 길을 모른다며 넌지시 나를 찾아온 아이, 이유는 모르지만 징계를 받고 있던 아이... 중대도 소속도 달랐던 그들을 굳이 찾아가 만났던 것은, 냉정하게 따지면 나의 일이 아니지만 어떠한 끌림 때문이었다. 내가 착하거나 정의로워서 그들을 찾아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 스스로가 약했고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알아봤으리라 생각한다. 표현되는 모습은 달라도 나만큼 조직에 부적응하는 그들을, 나만큼 방황하는 그들을, 나만큼 괴로워하는 그들을. 어쩌면 그들도 나만큼 마음으로 간절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을 것 같아서. 소대원들 중에서도 제일 속 썩이는 소대원에게 마음이 쓰였다. 자신의 뾰족함이 감당 안 되어 힘들어하는 모습에서 내가 보여서... 맥락 없이 그들을 찾아가 당직 근무 시간이나 일과를 마친 시간 연병장 구석에서 잠깐의 대화를 나누고 작은 격려로 마무리 짓던 그 시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닐 때가 있었다. 전역 후 전해오던 안부, 떠나던 날 주고 가던 선물,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 오가며 마주칠 때 나 소대장님 안다는 따뜻한 표정까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나는 그들을 견인했고, 그들 또한 나를 견인했음을. 그것이 나의 군 생활을 지탱하던 힘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분명 얼마간 그 힘으로 버티던 시간들이 있었음을. 문득 그 시간들의 온기도 떠오르며 조금 더 특별해지는 오늘이다. 내가 비록 보이는 힘은 미흡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힘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다행이다.
잘 지내? 생일 축하해
잊고 있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그 친구에게 축하 문자가 온다. 입대 후 생일마다 나타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매년 생일 축하 문자를 보내는 사람이. 교육기관 동기인데 본인이랑 생일이 같아서 나를 기억하나 보다. 그게 그렇게 큰 우연인가? 나는 나랑 생일 같은 사람 많이 봤는데. 아무튼 그 친구도 오늘 생일이니 나도 축하 인사를 건넨다. '고마워 너도 생일 축하해. 잘 지내.' 군 생활하며 만날 일은 없겠지만, 내년에도 아마 축하 문자를 주고받겠지. 축하 인사는 다다익선이니 나쁘지는 않다.
근데 역시 생일은 평소와 다름없다고 여기면서도 내심 평소와 다르길 바라나 보다. 생각도 많아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고, 잠시 후 동기와의 시간도 기대하게 된다. 내일이면 다시 반복되는 일상이 이어지고 또다시 힘들겠지만 오늘이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