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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주 Jun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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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19.2024

잠.


‘잠’은 평생의 숙제와도 같았다.


10대에는 미술 입시를 병행하던 학업 또는 만화책 읽기... 에 치여 잠을 안 자기도 하고 못 자기도 했다. 다행히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0교시가 폐지되었지만, 0교시 보다 10분 늦은 1교시가 시작되어 조삼모사였다.

 우리나라 전국의 고3이 그렇듯, 나의 고3도 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해 내야 했는데, 6시 반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오후 4시 반에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좀 거리가 있던 미술 학원으로 이동했다, 때로는 초코바 때로는 삼각김밥이었던 저녁을 급히 먹고 6시부터 다시 미술 수업을, 학원이 10시에 끝나면 근처 상가에서 모자란 과목에 대한 수업을 듣고 독서실에서 두세 시간 정도 공부를 하다 집으로 오면 서너 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평일에는 평균 세 시간에서 네 시간을 자면서 학교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고단한 고삼을 견디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일 년은 노느라 못 자는 시간이 늘었다. 졸업반에 가까워질수록 작업과 사업을 병행하며 잠을 두세 시간 정도만 자거나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고 그럴 때면 이틀에 한 번꼴로 자기도 했다. 잘 수 있는 상황에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체력이 남아돌던 20대 초반은 불면을 우습게 여기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스물여덟아홉이 되자 불면이 더 이상 우습지 않아 졌다. 결국 병원에서 처방한 약의 도움을 받아 일정하게 잠자리에 들고 깨기를 시작했고, 그마저도 약이 없으면 도루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가 이렇게 잠들기가 어려운 줄 알았던 나는 대부분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는 어쩐지 억울하고 심기가 불편해졌다.

한 번이라도 7시간 통잠을 자보고 싶었다. 통잠은 무슨 기분일까.

 서른이 넘어가자 이마저도 포기가 되었고 못 자면 못 자는 데로 인정하고 잘 수 있는 만큼만 자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은 체념에 가까웠다. 평균 네 시간 정도를 자며 나라는 사람이 원래 잠이 없는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만성피로에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 시간에 뭐라도 하자 싶어 책을 읽거나 나름의 여가를 보냈지만, 피곤하다 보니 머리에도 가슴에도 남는 것은 없었다. 늘 피곤함이 친구처럼 함께 했다.

 삼십 대 후반으로 진입하며 경제적인 수입을 내던 일을 잠정적으로 멈췄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매일 나갈 일터가 없어졌고 전처럼 무언가 새로이 해 보려 했지만, 자꾸 힘이 빠졌다.

그러고는 십대, 이십대, 삼십대 중반까지 못 잔 잠을 보상이라도 받듯 시시때때로 잠에 들었다. 물론 함께 살고 있는 나이 든 고양이의 간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새벽녘 잠에 들 수 없으니 낮에 잠을 청하게 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고양이가 잠든 시간에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시간만큼 원 없이 잘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스스로를 한심해하고, 아직 밝은 햇빛과 아직 젊은 나의 시간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꾸역꾸역 잠을 잤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견딜 수 없어 회피하듯 잠들 때도 있었지만, 삶이 지루하고 시시하게 느껴져 미친 듯이 잠이 쏟아져 내렸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무게의 잠이었다.

 밤을 밥 먹듯 새우던 시절에 그때 내 나이쯤 되던 선배들이

‘지금 잠 안 자는 거 다 미래에서 빌려오는 거야 언젠가 갚아야 해’

라고 했던 말이 이제는 뭔지 알겠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또 밤을 새워 가며 그것에 또한 카타르시스 마저 느끼며 일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더 들면 잠이 또 없어지겠지,

그때가 되면 이렇게 미치도록 잠에서 방황했던 시절도 그리워지게 될까.

정수리까지 차오르는 답답함과 무한한 무료함이 잠에 들 때마다 조금씩 해갈되었으면 하는 절실하고도 흐릿한 기도를  한다.  오늘도 이런 나를 잘 견디었다. 잠에 푹 들고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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