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팔레트 Aug 28. 2022

[사려니숲길] 공감 능력이 고장 나다.

타도배려심: 이번엔 너보다 내가 먼저.

 내가 너무 좋아요봇 같았나요?


무엇이든 상대방이 좋은 건 나도 좋은 것이고,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준다는 성향. 나는 프로 공감러이자 남을 도와주기 위해 태어났다고 자부하는 철저한 헬퍼이다. 좋은 것이 뭔지 잘 모르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 대신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실제로 나는 나보다 네가 먼저인 순간이 많았다. 부모님, 친구, 아이가 나에게 모두 ‘너’였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신경 쓰느라 안테나가 서 있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라고 답을 내리는 것이 가장 쉬웠다. 심하게는 나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도 어떻게든 면죄부를 주고 싶었다. 어릴 때 상처라든지,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이해했다. 온통 검은 마음으로 만들어버린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나는 내가 아니라 너였다. 아이가 제일 신경 쓰였고, 남편, 시아버지, 시누이, 엄마 아빠까지 걱정했다.    

  

제주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자기소개서를 썼다. 내 장점을 스스로 써내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져 친구들에게 물었다. 친구들은 내 장점과 단점 모두 ‘배려를 잘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배려를 잘하기 때문에 타인을 잘 챙기지만, 때로는 나를 희생하면서 하기에 되려 타인이 불편할 수 있다. 나는 처음부터 배려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굉장히 이기적이고, 눈치가 빠르며, 이해타산적인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반성하고, 배려가 가장 좋은 덕목이라 여기며 무작정 따랐던 것 같다. 한동안 상대방에게 공감하고 배려하는 일은 나의 주된 업무였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으면 뿌듯하고 기뻤다. 내가 한층 성장한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공감 능력이 고장 난 것 같다.


“어제 독박 육아를 했는데, 아이가 너무 힘들게 해서 죽는 줄 알았어.”

“얼마나 힘들었을까, 네가 수고 많았네.”라고 버릇처럼 답했지만, 육아와 관련된 모든 일에 예전처럼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다며 투정 부리는 말에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지.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고 답했지만, 속내는 이렇다. ‘그건 힘든 축에도 못 끼는 일이야.’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혐오한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매 순간이 그렇다. 그들 스스로 충분히 힘들 수 있는 일을 내 마음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화가 난다. 그 후에는 화가 난 자신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진다. 괜히 화풀이를 했다며 죄책감도 느낀다.


상담가는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배려할 때라고 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하필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가족에게서 전화가 왔고 양해를 구해 받았다. 내용은 힘든 일을 상의하는 것이었다. 꽤 급한 일이긴 했다. 상담가는 가족들이 나를 온실 속 화초처럼 가만히 두어야 하는데, 왜 가만히 두질 않냐며 화를 냈다. 나는 상담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장녀이고, 부모님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것이 중요한 일인데 화를 낼 일인가? 그리고 지금 나에겐 가족들의 안위가 가장 급한 일인데, 나랑 가치가 맞지 않는 분이네.’

글을 쓰기 위해 8월에 다시 숲길을 걸으며 찍은 사진입니다.

당황한 기색으로 상담실을 나왔다. 마음이 답답해서 상담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숲길을 걸었다. 걷다가 초록색 나무들 사이 의자에 앉았다. 눈앞에는 소원 비는 돌탑들이 여러 개, 나무토막이 펼쳐져 있다. 나무들이 높아 해가 가리고, 바람이 불면 꽤 선선하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시누이에게 전화했다. 원래 시누이와 사이가 좋았지만, 요즘은 더 각별하다. 만나는 사람들과 일, 그때 느끼는 감정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눈다. 상담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는 요즘 배려 없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한다고 한다. 안 괜찮으니까 괜찮냐고 묻지 말라고. 별 시답잖은 일로 힘들다고 말하지 말라고. 우리 가족 안 그래도 힘드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그 답은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에 한해서였지만, 그래도 조금은 충격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할 수도 없는 배려를 버리는 일이 아닐까. 정도의 문제가 걸리지만, 버린다고 생각해야 덜어낼 수 있다. 회복을 위해서 그동안 좇아온 가치를 멈춰야만 한다. 내가 지금 배려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 너를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타도 배려심’을 외친 숲길을 그리려고 보니, 솔직함이라는 물감이 필요하다. 나이 들어 성숙하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해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것은 내 회복을 위한 일이라는 거대한 섭리를 깨달은 현자처럼 굴 수 있는 세련된 색 말이다. 솔직함을 가진다면, 숲길을 벗어나도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엄마, 나도 지금 많이 힘들어.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러니 기다려주면 좋겠어.”
“저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요. 힘들다 하는 일에 공감하기 어려워요.”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아닌 것 같아요.
당분간은 저를 배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그 일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관계가 깨질까 두렵지만, 그 일을 떠올리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에요.”
“괜찮을 일 없으니까 더 이상 괜찮냐고 묻지 말아 주세요.”


솔직한 물감을 글이라도 쓰고 나니 더운 날 시원한 물을 마신 것처럼, 내가 걷고 있는 이 숲길에 부는 바람처럼 마음이 시원해진다.

이전 03화 [조수리] 외로움을 바라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