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강,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는 후기를 전해준 사람에게 이 책을 빌렸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앉은 채로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은 굉장히 귀하기 때문에 이 책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 소설이나, 외설적 표현이 넘치는 치기 어린 연애 소설, 풍부한 상상력이 뒷받침된 SF 소설 같은 것은 누구나 금세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분류에 속하지 않는 책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책에만 몰두하게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강의 책을 한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는 그의 소설이 독자를 매혹하는 흡입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믿고 있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신이 드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어느 날 내 블로그를 열심히 보고 있다는 선배가 내게 영향을 준 작가들이 누군지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애독가나 다독가나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게 최선이었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의 답을 주고 싶었다. 시인 중에선 기형도를 제일 좋아했고, 철학자면 비트겐슈타인이었고, 평론이면 신형철을 자주 읽었습니다, 라고 답했다. 소설은? 소설은 답할 게 없어 머뭇거렸다. 흥미롭게 본 소설은 꽤나 있었지만, 뭔가 경외감이 느껴질 만한 작품은 없었다고 늘 생각했으니까.
앞에 말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기형도의 시를 읽고 나면 내 현실이 그의 것만큼 그로테스크하지는 않아 역설적인 희망을 느낄 수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사상은 내가 철학 전공을 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형철의 평론을 읽곤 그의 위트 넘치는 표현들을 보며 평론은 문학에 기대 그 자체로 다른 형태의 문학이 되는 것이구나 감탄하곤 했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게 없었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러고 한참을 고민했다. 답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며칠 뒤 선배에게 답을 보냈다. 소설 부문에서 굳이 따지자면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인 것 같다고. 그 뒤에 받은 답장. "연애관이 너 스타일이랑 가깝겠군." 그랬던가요?
그리고 오늘 사강의 데뷔작인 <슬픔이여 안녕>을 읽었다. 더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앉은 채로 다 읽었고, 다 읽은 뒤에 책을 덮으며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진심 어린 경외감이었다. 그 이상으로 어느 감탄사도 덧붙일 수 없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명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사강이라는 작가에 대해 묘한 확신이 든다. 그는 천재다. 이것 이상의 수식어가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의 책을 두 권밖에 읽지 못한 내가 붙여도 되는 수식어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사강이 사람을 투명도 50%로 그려내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등장인물을 온전히 이해했다 생각하면 사실 인물에겐 더 깊은 심연이 있고, 내가 이 등장인물의 심연을 다 보았다 생각하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밝음이 있다. 독자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설계 안에선 등장인물의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소설가였다면 이런 인물을 그려내길 갈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이 작가에 의해 드러나는 사실적 묘사가 아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 엄청난 매력이다. 추측은 작가에 의해 수행되는 수동적 작업이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에 덧붙여 하게 되는 적극적 추체험의 작업이다. 추측의 과정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힘을 얻고, 돌아본 나의 삶 속에서 내 언어로 그동안 설명해 내지 못한 묘한 잔여감을 되찾게 된다. 슬픔과 기쁨도 아닌 정체 모를 감정, 무엇인지 명백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내 것임이 확실한 감정. 요컨대 다른 글이 아닌 문학만이 수행할 수 있는 이 감정 발굴 작업을 사강은 자신만의 대단한 묘사력으로 해내고 있다. 언어화되지 않은 마음의 세계를 낚아채 현실로 가져와 언어로서 투명히 보여주는 것, 이것이 천재의 문장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 수 있을까.
<슬픔이여 안녕>은 그가 18살 때 발표한 데뷔작이다. 18살의 나를 되돌아본다. 나도 소설을 써보겠다고 교내 문예상에 응모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굉장히 빠져 있었고, <상실의 시대> - 이제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번역되는 - 를 몇 번씩 반복해서 읽곤 하는 고등학생이었다. 김영하의 초기작이나 김승옥의 책들도 그때쯤 읽었던 듯싶다. 이 셋의 공통점은 성적 묘사가 노골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때 내가 응모한 소설도 앞의 세 작가랑 비슷한 점이 굉장히 많았고, 나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수상 발표가 나고 며칠 뒤, 1등 친구의 작품을 교지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완패를 인정했다. 그의 글은 모래알과 모래성을 통해 사람의 마음이 변화하는 과정을 수려한 문체로 표현한 글이었고, 나는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기는커녕 사람들의 행동에만 집중한 피상적인 글이었으니까. 그때쯤 느꼈다. 재능엔 차이가 있구나, 혹은 좋은 글은 언어화되지 않는 감정을 '감히 함부로' 언어화하는 글이구나.
그리고 지금. 스물다섯 살의 내가 '감히 함부로' 덧붙인다. <슬픔이여 안녕>이 그렇게 완결성 있는 구성을 채택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정말 이상적으로 완벽한 글이 아니라는 것. 작품의 클라이맥스가 갈등의 형식으로 등장하고, 그 갈등의 해소를 통해 소설이 끝나는 식의 구성은 (어떤 의미에서 고리타분할 수 있겠지만) 완성도가 높기에 소설의 전형적 형식으로 자리 잡은 구성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줄거리엔 소설 전체를 뒤흔들 만한 강한 갈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랑이 이 소설의 전부다. 나의 아버지가 겪는 사랑을 지켜보고, 내가 겪는 사랑을 느껴보고, 그 사랑을 통해 성인의 세상을 가늠하고, 나아가 내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속이는 계획을 세우는 것. 이 소설은 진짜 이게 전부다. 만약 조금 더 강한 뒤흔듦이 있었더라면, 폭풍우가 치는 배경이 등장한다거나, 나의 비극적 사랑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울 준비를 한다거나, 네가 아니면 죽어버릴 거야 등의 요동치는 마음이 등장한다거나 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없고, 작품은 시공간적 배경인 '여름휴가 중인 바다 별장'에 충실한 느긋하고도 미묘한 격정으로 흘러간다. (느긋하고도 미묘한 격정이란 말이 역설이라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 보시길. 느긋하면서도 미묘하며 동시에 격정적이란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또한 죽음으로 소설이 마무리되는 건 너무 흔하지 않나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소재는 여운을 남기기에 최적인 아주 전형적인 소재이다. 어느 작가라도 죽음을 통해 자신의 소설에 여운을 남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강이 천재인 점은 '전형적 형식 파괴로서의 갈등 부재'와 '죽음이라는 흔한 소재 사용'이라는 비판 요소를 자신만의 통찰력을 통해 장점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폭발적 갈등을 집어넣지 않은 스토리 전개는 오히려 18살의 '나'를 통해 묘사되는 세상의 아릿함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고, 앞서 적었듯 투명도 50%로 묘사된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독자의 인생을 소설에 빗대어 이해하게 만들었다. 투명도가 50%라 해서 작가의 문장이 허술한 그물 같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작중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일체의 빈틈없이 세심히 묘사한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은 백날 아무리 묘사해도 충분치 않은 법. 사강의 소설은 그 점을 충분히 살려 여백이 있기에 오히려 아름다운 그림 같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이라는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죽음이라는 소재를 사용했지만, 소설이 죽음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힘 조절을 했다. 그에겐 죽음조차 50%짜리였다. 등장인물의 죽음은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확실치 않고, 그로 인해 다른 인물들이 슬펐는지 행복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 점이 매력이다.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해결되고 갈등이 고조, 혹은 몰락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사강의 이 놀라운 데뷔작은 죽음과의 힘겨루기를 아주 균형 있게 해내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18살에 쓴 글일 수 있는가. 나는 경외 어린 감탄 이외에 다른 말을 더 뱉을 수 없다. 더 많은 말을 덧붙이는 게 이 수작에 대한 실례라 느낀다.
결국 이 책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사랑에 대한 책을 읽으면 보통 사랑을 하고 싶어지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사강의 책을 읽고 나면 사랑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단어다. 슬픔도 그러하다. 사랑은 슬픔이고, 슬픔은 곧 사랑이 되는가? 사랑과 슬픔 모두 두 글자로 표현되기에는 아깝다고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일이란 일종의 새로운 사전을 작성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표현들을 두 단어 아래 꼬리표처럼 덧붙였다가, 단어의 꼬리가 치렁치렁해지면 그것을 잘라내는 일. 많은 의미를 덧붙이고 난 뒤 비로소 가벼워진 사랑과 슬픔을 독자에게 건네는 게 작가의 업이다.
나는 내가 그동안 사랑과 슬픔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 줄 알았다. 하지만 사강을 통해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내 속엔 아직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남아 있고, 그 무언가를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어 슬픔이라 적을 수밖에 없다. 이제야 떠오른 내 무제 감정에게 반가움의 인사를 건넨다.
사랑이여 안녕, 슬픔이여 안녕.
추신.
소설 속 몇 개의 문장을 첨부한다.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도입부
소설의 도입부를 보고 난 뒤 아래 문장을 다시 읽는다.
나와, 아버지와, 나의 연인과, 아버지의 연인에 대한 묘사를 이렇게나 섬세히 적다니.
인물 간의 관계를 지루함과 권태와 고요와 두려움과 소란으로 풀어 적다니.
결국 요약하면 사랑인 것을.
"나는 지루함이 죽도록 싫었다. 시릴을 진심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사랑하게 된 후 권태의 영향을 훨씬 덜 받게 된 것은 사실이다. 시릴과의 사랑은 많은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무엇보다도 권태가, 고요가 두려웠다. 우리, 그러니까 아버지와 나는 내적으로 고요해지기 위해 외적인 소란이 필요했다. 그리고 안은 결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한 열여덟의 나이에 사강은 이미 사강이었다. 1954년 한 대담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같은 작품을 쓰고 또 쓰는 것 같다. 다만 시선의 각도, 방법, 조명만이 다를 뿐."
- 김남주, 옮긴이의 말, '사강다움'의 원천, 그 소설 속에서 '나'를 만나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