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마쿠라
만화 <슬램덩크>와 영화 <바닷 마을 다이어리>등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종종 등장하는 가마쿠라.
푸른 바다 옆 기찻길을 따라 오래된 전차 에노덴이 달리는 그곳은 일본 사람들에게도 살고 싶은 동네로 꼽힌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최후로부터 두 번째의 사랑>이란 드라마 때문이다.
베테랑의 프로듀서지만 위기의식을 느끼던 45세의 여성 치아키가 고리타분하고 바른말 잘하는 50세 공무원 아저씨 와헤이의 옆 집으로 이사 오게 된다. 그러면서 그 가족들과 얽히며 살아가는 따뜻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담아낸 2012년 드라마. 두 주인공의 위트 있는 티키타카는 매력적인 케미를 만들어 냈고 중년의 삶과 사랑에 대한 현실적인 공감을 끌어낸 작품이다.
나는 지난 가을에 이어 또다시 가마쿠라를 찾았다. 지역의 주요지를 다니는 전철 에노덴의 시작점 가마쿠라 역.
역에서 이어지는 <고마치 도리> 상점가를 걸으며 달콤하고 쫀득한 당고 하나를 사 먹는 소소한 즐거움으로 시작되는 여행.분주한 그곳을 지나 사찰
<하치만구>까지 걷는 거리의 흩날리는 분홍 벚꽃 나무 앞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사르르 부는 옅은 바람에 작은 벚꽃 잎이 빙그르르 내 손위에 내려앉는다.
덜컹이는 에노덴은 4월의 반짝이는 바다와 동네 사이사이를 지나 그곳으로 달린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가 내린 그곳은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작고 소박한 <고쿠라 쿠지> 역.
여기서부터 고즈넉한 골목길을 따라 집까지 티격태격 걸어오는 치아키와 와헤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주인공들이 담 하나를 두고 이웃으로 살았던 그
오래된 민가는 지금은 대문이 좀 바뀌었지만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고, 늘 따뜻했던 와헤이 가족의 그
카페도 근처 골목 안에 운영 했었다. (2023년 10월 현재 폐업)
나는 마치 미련이 가득 남은 유령처럼 또 그들의 집 앞에서 떠나질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 옛날 욘사마의 흔적을 따라다니던 일본 아줌마들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집 앞 철길의 노란 차단기가 종을 울리며 내려오면 덜컹이는 전철이 지나는 소리가 참 좋았다. 이내 남의 집 앞에서 고즈넉한 카마쿠라 감성에 젖어든다. 그런데 나는 왜 이토록 이곳이 좋은 걸까?
그건 아마... 그 작품 속에 나와 나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투영되어 어느새 이 공간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고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드라마 장면 중에서 와헤이 가족들이 집에서 준비한 치아키의 깜짝 생일파티.
그러나 이 나이에 창피하다며 고사하는 그녀에게 와헤이는 마흔여섯 개의 생일 초가 반짝이는 케이크 앞에서 단호하게 말한다.
"두 가지 축하해 줄 것이 있습니다. 물론... 한 가지는 당신이 태어나 준 것, 또 한 가지는... 당신이 지금껏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 23세 보다 46세의 생일이 두배, 아니 그 보다 더 대단하고 축하받아야 하지 않나요? 가슴 펴고 당당해 지라고요. 생일 초의 개수는 당신이 지금껏 힘껏 살아온 증거니까요. “
나 또한 그랬다.
언제 부턴가 내 생일 따위 뭐 그렇게 챙기며 살아야 하나 왠지 쓸쓸해져서 점점 무심해졌다.
아니, 무심하고 싶었다.
그랬던 나에게 와헤이의 그 대사는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아... 남의 집 앞에서 이렇게 뭉클해져도 되는 건가?
의외의 곳에서 깊은 위로를 주기도 하고 알지 못했던 내 모습도 스스로 마주하게 하는 홀로 여행...
그 속에서 굳어져 있던 내 생각들은 조금씩 유연해지고 작았던 마음을 열 수 있는 용기도 얻게 되는 것.
한 걸음, 한 걸음.
오롯이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 위를 걸어가는 여행의 길목...
봄날의 꽃비가 쏟아지는 거리에서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