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사실 나는 뉴욕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뉴욕의 지하철에는 고양이 만한 쥐가 나타난다는 얘기와 도심의 정신없는 분주함이 예상되어 왠지 내 스타일은 아닐 것 같은 지레짐작을 했었다.
그런데 뒤늦게 빠진 시트콤 <프렌즈>때문에 뉴욕에 대해 궁금해졌다. 시트콤에서는 실제 뉴욕의 거리가 그리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트콤 배경이 된 아파트도 실제로 있다고 하니 뉴욕을 가보기로 했다.
12월 8일 저물어가는 오후의 한국을 떠나 한 숨 자고 나니 또다시 12월 8일 아침. 하루가 시작되는 뉴욕에 도착했다. 마치 타임 슬립을 한 듯 여행지에서 같은 날짜가 다시 시작되면 덤으로 하루를 더 얻은 것만 같다. 뭐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반납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하루를 더 얻은 것이다. 꽤나 쌀쌀한 뉴욕. 해가 갈수록 시차 적응력은 더뎌만 갔기에 도착 후 정신이 멍했지만 그 와중에도 차가운 크랩 샌드는 입으로 잘도 들어갔다.
역시 뉴욕의 연말 분위기는 단연 으뜸이었고 맨해튼 5번가 거리는 그 옛날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가 떠오르게 한다. 타임 스퀘어의 밤은 그야말로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는 조명들로 가득 채워진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이 들뜬 분위기는 모두에게 고르게 퍼져가는 듯하다.
록펠러 근처 아이스 링크의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셀카 삼매경에 빠져 있자니 갑자기 마이크를 타고 멘트가 흐른다.
아… 누군가 순백의 저 아이스 링크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있다. 맙. 소. 사… 잠시 나는 혼자 짓궂은 상상을 한다. 이 와중에 남자의 프러포즈를 여자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어쩌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몇 초간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른다. 그러더니 이내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오… 신이시여! 이제 저 여인은 빼박입니다!
뉴욕의 겨울은 꽤나 운치가 있다. 나는 <프렌즈>의 그 아파트가 있는 그리니치 빌리지로 향했다. 다음에 뉴욕에 온다면 그 동네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곳. <프렌즈>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시트콤에서의 오프닝 장면이 떠오르고 주제곡이 흘러나와야 할 것만 같다. 기나긴 시즌을 방영하는 동안 주인공들은 세월 따라 많이 변했지만 그 아파트는 그 모습 그대로 있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나는 <프렌즈> 시절의 그들을 만난다.
늦은 오후, 허드슨 강을 따라 흐르는 크루즈에 올랐다. 브루클린 브리지를 통과하며 크루즈는 점점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 가까이로 흘러갔다. 나는 여지없이 갑판 위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고 내 옆의 한 여인도 그랬다.
상하이에서 왔다는 그녀는 혼자 여행 중이라 했고 우린 자연스럽게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정성껏 담아 주었다. 혼자 여행에서는 그러한 친절이 무척 소중한 기회니까… 우린 이메일 주소까지 교환했다. 여행지에서는 왠지 자연스럽게 인연의 손을 내밀게 된다.
전시회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뉴욕의 미술관들은 빠질 수 없는 핫스폿이다. 활기찬 맨해튼 거리를 지나 설레는 마음으로 MOMA미술관을 들어선 순간! 어?! 매우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제주도에서 베이킹 클래스를 운영하던 때 수강생으로 오셨던 분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 먼 미국 땅, 그것도 복잡하고 분주한 맨해튼에서 이 타이밍에 제주도의 인연이라니!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내 서로 놀라며 환한 웃음으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하필이면 그 많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마침 오늘, 마침 여기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게다가 그다음 날 갔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는 관람하고 있던 나에게 "당신 모자가 참 멋지네요!"라며 어느 신사분의 젠틀한 칭찬이 날아오기도 했다. 모든 미국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미국을 여행할 때 지나가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기분 좋은 칭찬을 툭 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그 지나가는 한마디가 하루 종일 기분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뉴욕의 밤. 그리고 재즈... 대표적 재즈 클럽이라 할 수 있는 <블루 노트>로 향했다. 재즈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혼자 즐기기엔 또 재즈 만한 게 없지! 마침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 크리스 보티와 여러 재즈 아티스트들의 콜라보 공연. 여행지에서 들었던 음악은 훗날 그때의 그 공기, 추억들을 순식간에 가져오는 마법을 부려준다. 생동감 있는 그들의 멋진 연주를 들으며 한 번도 본 적도 없던 이들과 함께 감동하고 가벼운 건배를 나누던 맨해튼의 밤은 깊어 갔다.
한국에 돌아온 후 우연히 열어 본 이메일 함에는
크루즈에서 만난 상하이 그녀에게서 내 뒷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낯설었던 겨울의 맨해튼에 따뜻한 온기로 남은 사람들…
그들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뉴욕, 그 소중한 시간에 함께 머물고 있다.
어디선가 나도 그들에게 여행지에서의 만났던 누군가로, 그 시간에 머물렀던 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