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남자도 운다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by 구론산바몬드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건 다이어트를 위해서건 또는 나처럼 어찌할 수 없는 사유로 굶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첫 3일이 가장 허기지고 힘들다는 것을. 3일을 넘기고 나면 이상하게도 허기가 다소 가시고 참을 만해진다. 물론 앉았다 일어설 때 약간의 현기증이 일기도 하지만 반면 정신은 또렷해진다.


그 때문일까 대학교 인근을 걸어가다 평소 눈에도 띄지 않던 공중전화기의 계기판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5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어느 날이었다. 목요일쯤으로 기억하는 그날, 그 공중전화기의 송수화기는 널브러져 있었고 계기판에는 잔액 80원이 찍혀 있었다. 100원 단위가 아니면 동전이 환급되지 않아 몇십 원이 남으면 다른 사람이 쓰도록 송수화기를 전화통 위에 올려놓는 것은 당시의 매너였다.


80원이면 짧은 시외전화도 걸 수 있었다. 그런 거액(?)이 들어있는 공중전화기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밥 사 먹을 돈이라도 주운 듯 나는 그 80원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서둘러 송수화기를 들었지만 마땅히 걸 곳이 없었다.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전화하기엔 너무 부족했고, 몇 개 안 되는 번호가 적힌 수첩을 뒤적여봐도 굳이 통화할 상대를 찾기는 어려웠다. 언제라도 누군가가 내 뒤에 줄을 설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는 쫓기듯 전화번호를 눌렀다. 경기도 부천에 사는 군대 동기의 집 전화번호였다.


오후 세 시를 넘긴 시간이라 설마 집에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번호를 눌렀다. 짧은 신호음 후 예의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전역 후 대충 1년여 만의 처음 통화였다. 아주 짧은 안부가 오가고, 그가 때마침 연락 잘했다며 무척 반가운 티를 냈다. 오늘이 그의 생일이며 저녁에 서울에서 몇몇 친구들과 만나 한 잔 할 계획이라 했다.


종로에 있는 어느 고깃집으로 오라고 했다. 거의 돈이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서울까지 어찌어찌 가기는 하겠지만 돌아올 차비는 없노라고. 고맙게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비는 걱정 말고 무조건 오기만 하라고 했다. 부끄러움도 잠시 드디어 배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학교 정문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후배를 협박하여 꼭 갚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과 함께 반 강제로 버스비와 지하철비에 상당하는 돈을 뜯었다.


서울로 가는 국철 창밖으로 군대에서 함께 했던 그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공고인지 상고인지를 졸업하고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다 입대했다던 그는, 키가 170이 채 되지 않는 왜소한 몸에 무척 부드러운 인상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와 얘기를 나눌 때면 짧은 사회생활로 단련된 장사치의 노련함이 간혹 느껴지곤 했다.


그가 고깃집 앞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깃집에서 퍼지는 맛있는 내음이 내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가 식당 안으로 이끌면서 내 손에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슬며시 쥐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고도 최소 한두 끼니 이상을 해결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부끄러움에 굳이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말 나를 반가워해 주었다. 나는 받은 돈과 곧 먹게 될 고기가 더 반가웠다.


연기가 자욱한 식당 안에는 또래의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동석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같은 의류업을 하는 친구라 했고, 여자는 애인이라 했다. 불판 위에서 익어가고 있는 고기에 눈이 팔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아담한 체구에 제법 미모가 출중한 여자였던 것 같다.


그들끼리 많은 얘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그저 따라주는 대로 술잔을 기울이고 고기를 흡입했다. 빈속에 마신 술이었지만 취기는 쉬 오르지 않았고, 배가 슬슬 불러오면서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그들과 대학생활을 하는 나 사이에 공통의 화제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눈치도 보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했다.


고깃집을 나와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택시를 불러 모처의 나이트클럽으로 이동했다. 난생처음 보는 서울 나이트클럽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마치 신세계를 온 듯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클럽 앞에는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 이어폰을 끼고 있는 사내 서넛이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이 입장을 하는데 사내 중 한 명이 나를 막아섰다. 앞서 입장하던 친구가 이유를 물었고, 사내는 말없이 내 하반신을 가리켰다.


당시 나는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순간 이것이 소위 ‘물관리’라는 것이구나 하고 촉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너덜한 군복 바지와 낡은 셔츠를 걸친 내 모습은 마치 잔액 없는 통장을 펴 보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황당함과 쪽팔림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집으로 돌아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놀라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서울의 나이트클럽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이미 나는 배가 불렀고 무엇보다도 주머니 안에는 오천 원짜리 지폐가 있었다.


친구 녀석은 애써 나를 위로하며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고, 일행은 잠시 의논을 하더니 다시 택시를 불러 동대문 근처 어딘가로 이동했다. 다시 도착한 나이트클럽은 내가 입장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클럽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이 층의 테이블에 자리하고 앉았다.


귀를 찢을 듯한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격한 안무가 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시 후 고깔모자를 쓴 직원들이 케이크를 들고 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고, 친구 녀석이 촛불을 끔과 동시에 폭죽을 터뜨렸다. 이어 말로만 듣던 양주와 다양한 안주가 차려졌다. 거기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무엇을 얼마나 더 먹고 마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블루스 타임에 친구가 그의 애인과 껴안고 흐느적거리는 것을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은 선명하다.


새벽 두 시경 우리는 자리를 파했고, 친구의 두 친구가 55만 원을 나누어 계산하는 것을 멀찌감치 서서 보았다. 내 몇 달 치 생활비를 몇 시간의 파티에서 쓰는 그들의 씀씀이가 마냥 경이로웠다. 클럽에서 나온 우리는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소주, 맥주, 그리고 안주를 고르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편의점 한구석에 그냥 서 있었다.


그때 친구의 여자 친구가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와 연락처를 물었다. 돈 많은 애인 몰래 몰골사나운 대학생의 연락처를 물어보는 저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화가 났다. 친구 애인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녀에게 불러 줄 연락처가 없었다. 그 흔한 삐삐 하나 없는 내 처지가 무척 참기 힘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메모지를 꺼내 자신의 호출기 번호를 적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분명 화를 내며 그 종이를 찢어버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는 접힌 쪽지를 아까 친구가 준 오천 원 지폐가 들어있는 주머니에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모텔로 들어가 친구의 친구들은 방 두 개를 요구했다. 여자는 당연히 따로 자겠거니 했다. 하지만 순진한 내 예상과 달리 친구는 애인과 함께 같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우리 남자 셋은 그 옆방으로 들어갔다. 친구의 애인임에 분명했지만 순간 마치 내 여자를 빼앗긴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그 여자에 대해 배신감이 들었던 것도 같다. 모텔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가 준 쪽지를 찢어버린 것을 보면.


친구의 친구들은 소주와 맥주를 마시고 금세 곯아떨어졌다. 꿈자리가 요란했다. 친구의 여자와 블루스를 추었던 것도 같고, 그 비싼 술값을 내가 치렀던 것도 같다. 눈을 뜨니 새벽 5시경, 여전히 두 친구는 잠에 빠져 있었고, 나는 살포시 모텔방을 나섰다. 아침이 되면 또다시 그들에게 아침밥을 얻어먹게 될 것이고 그렇게까지 신세를 지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친구와 같은 방에서 나올 그 여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치 긴 여행을 한 듯 피곤함이 몰려왔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을 망연히 바라보며 나는 문득 찢어버린 그녀의 연락처를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러다 혼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짓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그녀에 대한 아쉬움도 조금씩 소실되어 갔고, 내게는 약 3,000원의 돈이 남았다.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날 하루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전혀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먹은 양질의 고기가 7m에 달하는 창자를 서서히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일주일은 너끈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한번 고기를 맛본 이놈의 창자는 그다음 날이 되자 또다시 먹을 것을 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수중에 돈이 있을 때의 허기는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루를 더 참아볼까 하다가 그냥 먹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이내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당시 학교 인근에는 1,400원짜리 국밥이 가장 쌌다. 싸긴 했지만 싸구려 동남아 쌀을 써서 그랬는지 금세 배가 고팠다. 반면 인근 건물 2층에는 아주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이 있었는데, 밥값이 무려 2,300원이나 했다. 나도 두어 번 가서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값은 다소 비쌌지만 메인으로 나오는 국을 제외하고 밥과 반찬을 무제한 먹을 수 있다는 미덕을 갖고 있었다. 식당 한편에 있는 밥솥 안에는 밥을 꾹꾹 눌러 담아 놓은 밥공기가 수북이 들어있었고, 김치와 콩나물무침 같은 밑반찬은 셀프코너에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3,000원 지폐를 만지작거리면서 무한 고민의 늪에 빠져들었다. 소량의 싼 밥 두 끼를 먹을 것인가, 비싸지만 많은 양의 밥을 먹을 것인가. 이 가게와 저 가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무던히도 오래 고민했고, 마침내 비싼 밥을 먹기로 결심했다. 식당으로 계단을 올라가며 정말 행복했다. 혼자서 그 비싼 식당을 당당히 들어선 것은 처음이었다.


밥 한 공기와 기본 반찬이 차려졌고, 메인 국이 오기 전에 나는 이미 밥 두 공기를 사뿐히 해치웠다. 셀프코너를 오가기를 여러 번, 국이 오고 나서도 밥 세 공기를 더 먹었다. 극도의 포만감에 온몸이 전율했고, 배가 터질 듯 부르다는 표현을 체감했다.


항성을 중심으로 행성이 공전하는 것을 인력과 원심력으로 해석해 내었다는 과학자 뉴턴은, 그렇다면 원심력을 만들게 된 행성의 첫 공전은 무슨 힘으로 시작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신의 손가락’이라 답했다고 한다. 즉, 신이 손가락으로 행성을 밀었다는 뜻으로, 결국 과학자이면서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어찌 보면 무책임한 뉴턴의 사유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언설이다. 하지만 나는 단언컨대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신의 손가락은 행성이 아닌 내 등을 밀었다고. 그렇지 않다면 계단을 내려오며 느닷없이 다리가 꼬여 비척거렸을 리가 없다.


중심을 잡아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함과 동시에 내 입으로는 2,300원어치의 음식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신을 차리니 식도를 역류하여 마치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음식물이 한 판의 큰 피자 모양으로 층계참에 놓여 있었다. 잘게 씹히지도 않은 밥과 반찬이 한데 뒤섞인 그 토사물을 바라보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식당 아주머니에게 들킬세라 눈물을 훔치며 급히 건물을 벗어나는데, 푹 꺼진 배와 100원짜리 동전 일곱 개가 내가 가진 전부였다. 나는 남자가 어쩌고 여자가 어쩌고 하는 마초적인 말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그러나 굳이 그런 표현을 빌어 쓰자면, 남자도 때론 운다. 토했을 때 운다.

keyword
이전 07화내가 카세트 플레이어를 갖지 못할 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