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아시나요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by 구론산바몬드

가판대 무료신문 구인란을 보고 우유 보급소를 찾아갔다. 이른 아침에 일을 하면 학업에 큰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하여 내린 판단이었다. 보급소 주인은 대뜸 보증금 50만 원을 요구했다. 보증금 낼 돈 있으면 우유배달을 왜 하겠냐고 버텼다. 젊은 대학생의 호기로운 모습이 먹혔는지 배달원 구하기가 힘들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우유배달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면허였고 여즉 오토바이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당장 이튿날 새벽부터 배달 구역을 돌아야 하는데 오토바이를 탈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평소에 낯을 튼 학교 근처 식당 주인에게 통사정하여 오토바이를 빌렸다. 클러치 없는 배달용 소형 오토바이라 생각보다 쉬웠다. 골목 여기저기를 10여 분 돌다 자신감이 생겼다. 때마침 식당 주인의 아들 녀석을 만났다. 초등학교 6학년쯤 되는 아이였는데 가끔 눈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뒤에 태우고 좀 더 골목을 돌았다. 너무 천천히 달린다고 녀석이 보챘다. 아빠는 씽씽 달린다고 했다. 녀석에게 뭔가를 보여줄 의무감을 느꼈다.


골목을 나와 큰 도로로 진입했다. 크게 좌회전을 하는데 정차해 있던 시내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며 차선을 변경했다. 아직 브레이크에 익숙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회전하는 속도를 못 이겨 그대로 쓰러졌다. 오토바이에 깔린 다리와 무릎이 아팠지만 벌떡 일어나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웠다. 경찰이라도 나타나면 당장 무면허에 헬멧 미착용으로 벌금 꽤나 물어야 할 판이었다. 식당 주인 아들 녀석도 다리가 아픈지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오토바이도 상한 데는 없어 보였다.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녀석을 설득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네가 사고당한 소식을 듣는다면 네 아버지 마음이 어떨까. 아버지가 일하시는 데 쓰는 오토바이가 운행 중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 다면 네 아버지 마음이 어떨까. 그러니 좀 전의 사고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 이것은 오직 네 아버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대충 이런 논리를 폈는데 녀석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함구하겠노라 약속했다. 후일담은 알지 못한다. 오토바이를 돌려주고 그날 이후로는 그 식당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니까.


우유배달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보급소로 가 그날 배달할 우유를 챙겨 담았다. 우유를 주문하는 사람들의 요구는 천차만별이었다. 이틀에 한 번 배달해 달라거나, 월, 수, 금은 큰 용량으로, 나머지 요일은 작은 것으로 배달하고, 어느 날은 이 제품으로, 어느 날은 저 제품으로 배달하라는 식이었다. 왜 사람들은 한결같지 않은 걸까.. 그렇게 분류한 우유는 큰 플라스틱 상자 2개를 조금 넘는 분량이었다. 배달하는 데는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여름날 새벽 인적 없는 길을 달리면 상쾌했다. 배달 코스는 조금 복잡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골목 이곳저곳을 돌고 주택가를 벗어나면 달동네가 다음 코스였다. 달동네로 올라가는 초입에는 제법 경사가 있는 오르막이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기 위해서는 1단으로 변속해야 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길이었지만 그날은 어쩐 일인지 제때 변속을 하지 못하고 오르막에 진입해 버렸다. 변속하기에는 이미 늦어 다급히 브레이크를 잡았다. 경사가 가팔라 발브레이크와 손브레이크를 둘 다 잡았다. 브레이크를 잡은 손으로 악셀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오토바이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자칫하면 수십 개의 우유가 비탈 아래로 굴러가 버릴지도 몰랐다. 왼발은 땅을 딛고, 오른발과 오른손은 브레이크를 잡은 채 마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각, 사위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리와 팔이 저려 왔지만 우유를 지켜야만 한다는 오롯한 생각뿐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들었던 그 말이 나도 몰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살려주세요!" 그 순간 나는 이 넓은 세상에 혼자였다. 변진섭의 노랫말처럼 이별은 두렵지 않고 눈물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아침잠 없는 어느 노인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의 처절한 고독은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배달인들은 가끔 외로움을 싣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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