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by 구론산바몬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유명세를 떨친 고 신영복 교수는 그의 시화 <처음처럼>에서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라고 썼다. 무수한 저서와 아름다운 서체를 남긴 고인의 흔적을 소주잔을 기울이면서도 만날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반복되는 힘겨운 일상에 익숙해져 문득 초심의 부재를 깨달을 때 우리는 그 부끄러움을 또 다른 일상으로 묻어버리고 만다.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듯 처음의 그 마음을 소환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 계기는 다른 글 <그대 안의 블루>에 기술하였다.]

1995년 4월 20일, 전역을 하면서 영어에 대한 도전은 시작되었다. 전역 이튿날부터 도서관에 파묻혔다. 당시 공공 도서관은 오전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자습실을 운영했고, 입장료 100원을 내고 좌석표를 받는 시스템이었다. 딱히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7시 훨씬 전부터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은 일상이었다.


‘처음처럼’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성문종합영어>를 펼쳤지만 좀처럼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와 머리를 두드리면 에밀레 종소리마냥 깊은 울림이 퍼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머리가 텅 빈다는 뜻일 게다. 2년간의 공백, 아니 고등학교 졸업 후 영어공부를 접은 지 어언 4년, 내 머릿속에는 중학교 수준의 단어 몇 개와 아주 간단한 문법 몇 개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성문종합영어의 수준 있는 예문들과 거친 해설이 머리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그다음 날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는 거진 미쳐있었다.


사실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가세는 더 기울어질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내가 전역할 무렵 아버지는 막노동으로 힘겹게 일당을 벌고 있었고, 어머니는 어느 부잣집의 파출부로 일하고 있었다. 공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형은 입사와 퇴사를 거듭하다 백수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듬해 복학을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대학을 다닐 때도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가급적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으려 애썼는데 전역을 하고 정말 성인이 된 지금 일을 할 것인가 영어라는 괴물과 싸울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공부를 하고 싶었다. 복학하기까지의 10개월 동안 영어만 공부한다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 미래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너무나 막연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렵사리 부모님께 그 결심을 말씀드렸는데, 부모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믿어 주셨다. 내 평생 가장 부끄럽고 미안한 결정이었다. 어머니는 고맙게도 새벽에 일어나셔서 내 도시락을 준비해 주는 수고를 기꺼이 마다하지 않으셨다. 점심은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저녁은 사 먹으라며 매일 천 원을 손에 쥐어 주셨다.


부산 서면에 있는 시립도서관은 버스로 20분 거리였다. 아침에는 자리를 잡기 위해 버스를 탔지만 저녁에는 가끔 버스비를 아끼느라 1시간 넘게 걸어 다니기도 했다. 밥값을 아끼기 위해 도시락은 점심과 저녁에 걸쳐 나눠 먹었다. 도서관 내 매점에서는 커다란 솥에 시래깃국을 끓여 팔았다. 솥은 언제 씻었는지 때가 심하게 끼었고 멀건 국에서는 가끔 파리가 나오곤 했지만 한 그릇에 70 원하는 가격만 보면 그야말로 가성비 갑이었다. 큰맘 먹고 한 그릇을 사다 찬 밥을 말아먹으면 소소한 포만감과 행복감이 밀려오곤 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였건만 종일 영어와 씨름을 해도 단어와 문법은 물에 스며들지 못하는 기름마냥 머리 밖을 맴돌았다. 오랜 군 생활의 후유증인지 머리가 나쁜 것인지 원인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좌절감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결국 안 되는 것인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도서관을 나와 인근 학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번화가인 서면에는 유명한 대입 학원이 많았다. 그 당시 학원은 지금 고등학교나 주택가에 빼곡히 들어선 내신 위주의 학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지간한 학교만큼 큰 건물 전체가 하나의 학원이었고, 1년간의 커리큘럼으로 재수생을 관리하는 학원이 있는 한편, 한 달 단위로 과목별로 선택해서 수강할 수 소위 단과학원이 있었다. 단과학원은 매달 말에 수강생을 받아 고시된 만큼 진도를 책임지는 시스템이었는데, 하루 80분 수업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수업이 이루어졌다. 혹여 예고된 진도에 미치지 못하면 토요일에 보강을 해서라도 진도를 끝내는 책임 강의가 필수였다. 입소문을 탄 강사는 한 반에 수강생이 400명에 달할 정도였고 그나마도 하루 만에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군대를 다녀오니 대입학력고사는 수능시험으로 체제가 바뀌어 있었고, 대부분의 영어강사들은 수능 맞춤형 강의를 편성하고 있었다. 학력고사 영어 고득점을 위해 필수였던 성문종합영어 강의는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문종합영어를 고집하는 강사를 어렵사리 찾을 수 있었다. 명사 편, 동사 편, 준동사 편으로 나누어 3개월 과정으로 성문종합영어를 끝내는 강의였다. 수능 영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은 없었지만 영어의 기본을 익히면 어떤 종류의 시험이라도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집스러운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품고 있던 성문종합영어에 대한 경외감을 반드시 극복하고 싶었다.


모든 학원 모든 과목의 수강료는 공히 3만 원이었다.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20만 원가량 되지 않을까 싶은 큰돈이었다. 또다시 부모님께 부끄러운 손을 내밀었고 우선 명사 편 강의를 신청하였다. 성문종합영어를 재구성하여 편찬한 7천 원 가량의 교재비는 별도였다. 일주일 간의 영어공부 경험으로 미루어 내게 예습은 불가능했다. 학원에서 수업을 받고 도서관에서는 배운 것만 반복해서 복습하는 것으로 전략을 세웠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학원의 수업장면은 낯설었다. 우선 수강생이 어림잡아 300명에 달했고, 칠판은 학교 칠판의 3배가량 길었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수강생을 집어넣기 위해 책상은 교회에서나 봄 직하게 길었고 대략 10명 정도가 밀착하여 앉았던 것 같다. 강의실 곳곳에는 기둥이 많았고 늦게 입실하여 뒷자리라도 않으면 어지간한 시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칠판의 글자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뻐걱거리는 높은 단상에 마이크를 든 강사가 올라 수업을 시작하고 약 10분 여가 지나면 강사는 강의를 멈춘다. 그러면 학원의 아르바이트생 네댓 명이 강의실로 들어와 일제히 수강증을 검사하기 시작한다. 도강을 하는 사람이나 수강신청을 했더라도 수강증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퇴실해야만 했다. 잠시 부산한 검사 시간이 지나면 강사가 다시 들어와 수업을 계속한다. 그 순간 강사와 나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철저한 자본주의의 거래관계임을 깨닫게 된다. 수업시간 동안 질문은 금기시되었다. 질문은 곧 300명 타인들의 귀중한 시간을 허락 없이 차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600개의 시선을 받으며 강사에게 질문을 던지기란 어지간히 어려운 일이었다. 침묵하는 대중들은 강사의 유머에도 어설픈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80분 동안 쉼 없이 진행된 수업시간 동안 진도는 대략 5장 정도 되었다. 학원을 마치면 곧장 도서관으로 돌아와 저녁 10시 도서관이 마치는 시각까지 5장 만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다음날엔 전날 배운 것을 포함하여 10장을 반복해서 읽었고, 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일주일 동안 배운 분량을 반복했다. 모르는 단어는 일일이 사전을 찾아서 외웠고 각종 예문은 무수히 읽고 썼다.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먹는 시간은 각각 3분여, 2번 정도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책을 읽었다. 같은 내용을 무수히 반복해서 보는데도 전혀 졸리거나 지겹지 않았다. 매일 그날 배운 내용을 300번은 보지 않았을까 어림해 본다.


그렇게 명사 편이 끝나갈 무렵 어느 오후, 책장 위에 붉은 액체가 떨어졌다. 고3 때도 흘린 적이 없던 코피였다. 화장지로 피를 수습하며 무척 행복했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계시라도 받은 듯하여 모종의 희열과 결의가 교차했다. 그날 이후 25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외부의 자극 없이 자연스레 코피를 흘린 적이 없다.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양 공급이 원활하거나 체력이 좋아졌기 때문이라 애써 자위해 본다.


한 달이 지나자 공부에 다소 탄력이 붙는 것을 느꼈다. 영어라는 집을 짓기 위해 땅을 잘 다졌다는 느낌이 왔다. 다음 달에는 나머지 두 강좌를 신청하여 책을 마스터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수강료였다. 당시 학원에서 끊어주는 수강권은 색도화지 같은 질감의 종이에 강좌명과 수강기간이 인쇄되어 있고, 학원장의 빨간 직인이 모퉁이에 찍혀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지만 수강권을 위조하기로 했다. 도무지 6만 원이라는 큰돈을 조달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학원을 다니는 동안 안면을 턴 어느 재수생이 끊은 수강권을 빌어 복사를 했다. 수강권의 색은 매달 달랐는데, 전 달은 푸른색, 다음 달은 분홍색 이런 식이었다. 색도화지에 두 개의 수강권을 복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괜스레 가슴이 떨렸다. 배움을 위한 도둑질은 용납되어야 한다며 혼자 합리화했다. 문제는 붉은 직인이 검게 복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포토샵이라도 있었으면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컴퓨터 자체가 그리 일반화되지 않은 시대였다. 우선 이수씨개를 잘라 그 단면에 고운 사포를 본드로 붙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검은 직인을 부드럽게 밀어 제거했다. 다음으로 이수씨개에 솜을 붙여 인주를 묻히고 한 땀 한 땀 직인의 라인을 만들었다. 무려 3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어설픈 위조 수강권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것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애써 만든 수강권이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도 위조의 티가 역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두 가지를 생각해 냈다.


먼저 수강권을 지갑의 신분증 넣는 곳에 끼웠고, 투명한 비닐을 다소 불투명하게 하기 위해 검정 색연필로 비닐 위를 칠했다. 그러면 마치 비닐에 때가 묻은 것처럼 보이면서 안쪽 수강권이 자세히 보이지 않게 된다. 실제로 수강권 검사에서 매번 무난하게 넘어갔다. 두 번째 방법은 좀 더 치밀한 것인데, 일명 인맥 만들기였다. 즉, 수강권을 검사하는 아르바이트생들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학원에서 오가며 아르바이트생들을 만날 때마다 지나치리만큼 반갑게 인사를 해서 눈도장을 찍으려 애썼다. 가끔 100원짜리 다방커피를 대접하기도 했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영어에 관해 질문도 하면서 나를 각인시키려 했다. 그것이 반복되자 그들은 내가 당연히 정당한 수강생인 줄로 생각하게 되었고, 수강권을 검사할 때도 굳이 나에게 수강권을 제시할 것을 강권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세 강좌를 듣고 마침내 성문종합영어를 끝냈다. 하루 15시간 동안 공부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성인으로서 부모님의 경제적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생활의 전선에 나서지 않은 것은 무척 죄스러웠다. 그리고 구체적 목표가 없는 도전과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막연한 미래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되돌려지지 않는 인생에서 무언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난 두 달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섣불리 내딛기 시작한 걸음이 어느 곳으로 나를 데려갈지 그 두려움은 자꾸 커져만 갔다. 하지만 두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실감하는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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