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버티고 있어 줄래요?(3)

불안장애의 연애기 3

by 류아민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이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거면 다 괜찮아요. 원하신다면 제 것도 보여드릴게요."


그는 지갑을 넣으려던 손을 멈칫하더니 내 눈을 3초 정도 바라보았다. 아마 '진짜 보여달라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펼쳐 쑥 내밀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 요구가 당당했다.


"신분증이요? 왜요?"


뒷주머니로 지갑을 넣으려던 그의 행동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지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껌벅이면서 물었다.


"저한테 말했던 정보들이 맞는지 제가 직접 확인해보려고요. 평범하게 만난 사이가 아니니까 확실히 해두는 게 서로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지갑을 펼쳐 투명한 덮게 부분에 꽂혀있던 운전면허증을 꺼내어 뒷면이 보이게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다음에 한 행동은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이건 운전면허증이고 이건 주민등록증이에요. 이건 제 친구들과 찍은 학창 시절 스티커 사진이고 이건 제 누나랑 찍은 사진이에요."


지갑에 꽂혀있던 정보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꺼내어 내 손위에 올려놓았다. 제법 수북이 쌓였다. 이렇게까지 확인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하나하나 들춰보며 확인했다.


나에게 알려준 이름과 나이, 주소가 동일했다. SNS로 보여줬던 학창 시절의 모습과 같은 얼굴이 스티커 사진 속에 있었고 완벽한 타인이라 요구하지 않았던 누나의 얼굴도 여러 장 확인할 수 있었다. 누나라는 분은 그와 참 많이 닮았다.


"음, 아 그리고..."


그는 핸드폰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처음 보는 화면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가 다니는 회사 어플이에요. 여기 보시면 **회사 밑에 사원번호 제 이름, 제 직책 회사주소도 나와있고..."


그리고 다른 화면을 휙휙 넘기더니 숫자가 찍혀있는 화면을 내밀었다.


"이건 제 월급명세서예요. 시급제라 월급이 일정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이 정도는 매월 받고 있어요. 아! 월급날은 매월 10일이고요."


한꺼번에 너무 과한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더 이상의 질문도 필요 없을 정도로 그는 나에게 전부 공개했다. 그리고 마지막 크리티컬 히트.


"이건 제 보유자산이요."


은행 어플을 열어 지금까지 모은 자산이라며 보여줬다. 아마 허튼짓하지 않고 꽤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난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계좌를 하나 열어 지출내역을 확인했다. 뭔가 지고 싶지 않은 이상한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그의 지출내역은 결혼 적령기인 30대 중반 남자라고 하기엔 단출했다. 대부분 카페나 마트, 배달음식비 결제 정도였다. 물론 간간히 약간의 거액이 긁힌 내역도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 했으나 그는 핸드폰 끝을 잡아 내리면서 해명(?)했다.


"그건 친구들이랑 간 꼬치집에서 긁은 거예요. 다들 유부남이라 와이프 눈치 보인다고 제가 한 번에 계산하고 친구들한테 따로 받거든요. 보통은 그렇게 큰 금액을 쓰진 않아요."


큰 금액이라고 해봤자 10만 원이 약간 넘는 돈이었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귀여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그에게 돌려줬다. 그는 지갑에 사진들과 신분증을 넣으며 물었다.


"더 궁금하신 거 있어요?"


더 궁금한 거라... 첫 만남에 이 정도 확인했으면 난 목적을 이루고도 남았다.


"아니요. 지금은 없어요."

"그럼 제가 질문드려도 될까요?"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맞춰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카페 테이블이 원형에 작았던지라 가깝게 다가오는 그가 조금 부담스러웠던 탓이었다. 그는 순간 굳어진 내 표정을 봤는지 급하게 상체를 뒤로 물렀다.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뭔데요? 아, 제 주민등록증 보여드릴까요?"


나는 가방을 열어 지갑을 꺼내려고 했다. 그때 그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뇨! 전 필요 없어요. 아민 씨가 누굴 속일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설령 속인다 해도 그것 또 제 운명이겠죠. 그것보다는..."


나는 그가 내뱉을 말에 집중했다. 내 정보가 아니라면 뭐가 궁금할까. 지금까지의 경험처럼 당연한 수순인 듯 술자리를 가지자거나 하룻밤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많은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겪었던 상황에서 상대방이 원하는 속도와 나의 속도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상대방의 모든 걸 알고 난 후에 관계를 시작하는 편이었고 상대방은 관계를 시작하고 나서 알아가도 괜찮다는 입장이었다.


"뭔데요?"

"전화..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전화번호? 아. 맞다.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한 적이 없다. 처음 연락도 SNS로 왔었고 만나기 전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그에게 난 딱 잘라 거절했었다. 만나서 안전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면 알려줄 심산이었다.


"아... 전화번호요."


나는 망설였다. 안전한 사람이라는 건 알 것 같았지만, 그건 오늘 하루일 뿐이니까.

아직 그를 믿기에는 대면한 시간이 부족했다. 사기꾼도 몇 번은 좋은 사람인척 연기하니까.


"그때 만나면 주시겠다고 하셔서요. 주실 수 있어요?"

"음... 아직은요. 죄송해요."


그의 얼굴엔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한 달 동안이나 연락을 했었지만 SNS일 뿐이었고, 오늘처럼 약속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닿을 방도가 없어 막연한 기다림에 불안했을 수도 있다. 알지만, 그의 마음을 알지만 난 여전히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무서웠다. 0.1%의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 혹시 언제쯤 주실 수 있나요? 한 번 기다려보겠습니다."

"네?"

"기다려보려고요. 아민 씨가 저를 믿을 수 있을 때까지요. 기다리는 건 괜찮을까요?"


이 사람은 날 어떻게 믿고 기다린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난 그에게 지나간 암울했던 연애사 말곤 내 정보를 공개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기다리겠다는 말을 했다. 관계의 시작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단지, 전화번호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이상하게 웃겼고 믿음이 갔다. 사실, 당장에라도 전화번호를 주고 싶었다.

워-워- 들뜨고 있는 날 진정시켰다.


"아... 네. 그쪽이 괜찮으시다면요."

"아 그런데. 그쪽 말고 제 이름 불러주실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난 그를 칭할 때 대부분 '그쪽'이라는 말을 했었다.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 타인의 이름을 부른 다는 건 그만큼 친근하게 느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는 이름 정도야 뭐...


"네, 필중 씨...라고 부를게요."

(* 필중: 남편이 원한 가명)


그는 단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인중이 움찔거렸다.

웃겼다. 그가 웃긴 게 아니라, 지금의 내 상태가 웃겼다. 지금의 내 상태를 들여다보자면,

그와 더 이야기하고 싶고 날이 어두워졌을 때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살짝은 풀어진 그의 모습이 궁금했고 내가 그와 편해진다면 서로에게 칠 장난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온전히 그를 믿은 나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누군가를 한 번도 진심으로 믿어본 적이 없어 그런 사소한 것들이 다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아민 씨 음... 다음 주 토요일에 조개구이 먹으러 가실래요? 그때 사진 보내드렸던 친구들이랑 갔던 조개구이집 기억하세요? 생각보다 서비스도 많고 맛있어서 아민 씨랑 꼭 다시 가고 싶었거든요."


아, 조개구이집이라면 연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과 왔다며 사진으로 보여준 곳이다.

내가 해산물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다음에 꼭 같이 오자고 인증샷처럼 받았던 그 사진.


"아... 음..."


대답을 망설인 건 내가 살던 곳에서 족히 1시간은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안전존이라고 여길 수 있는 곳이 없다는 뜻과 같았다.


"아직 절 못 믿어서 부담.. 스러우신 거죠?"


그는 굳어진 내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탄식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나에게 원망 섞인 불평을 할 타이밍이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거기 앞에 아민 씨 집 근처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있어요. 거의 5분에서 10분 단위로 오더라고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때 아민 씨가 **공원 근처에 사신다고 해서 아민 씨랑 같이 오려고 찾아봤었어요.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경찰서도 있고요. 사람들도 엄청 많아서 제가 허튼짓할 거 같으면 소리 지르세요. 그렇다고 허튼짓할 생각도 없지만요. 오늘도 어떻게 아민 씨를 보게 된 건데요. 솔직히 아민 씨 오늘보고 다짐했어요.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전 꼭 아민 씨랑 잘되고 싶어요. 그래서 아민 씨가 궁금해하는 거 불안해하는 거 다 답해드릴 거고 참고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멀어지지만 말아주세요. 전 그거면 돼요."


조금은 애절하게 들렸다. 절실한 듯도 했다.

나를 보는 그의 눈엔 흔들림이 없었다. 주먹을 살짝 쥔 그의 손이 지금 얼마나 간절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내 믿음을 이토록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나와의 이성적인 관계를 원하는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내 속에서 태풍이 일렁였다. 그동안 불안이란 끈으로 꽁꽁 싸매 두었던 위험한 호기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첫 번째 시험에 무난히 통과한 그를,

나의 두 번째 시험에 들일 생각이다.


"네 좋아요. 다음 주 토요일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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