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버티고 있어 줄래요?(4)

불안장애의 연애기 4

by 류아민

약속했던 토요일이 왔다. 며칠 전부터 그날에 있을 법한 상황을 상상했다.

그의 지인이라는 사람이 마치 약속한 것처럼 합석한다던가 술에 취하게 해 어디론가 데러 간다던가 술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 음료에 뭔가를 탄다던가... 하는 스릴러 영화의 클리셰적 상황들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났다. 하지만, 곧 그의 절실했던 얼굴이 떠올라 '에이, 설마...'라는 나답지 않은 결론을 냈다.


점심때쯤에 집 근처로 데리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거리가 멀어 오는 게 힘들 것 같다는 이유였다.

난 아직 그를 믿지 못하기에 단호하게 거절하고 조개구이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 시간이나 걸리는, 주말 저녁이라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에 교통편이나 주변시설들을 지도 앱을 통해 꼼꼼하게 살폈다. 그의 말처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찰서가 있었고 꽤 유명한 해수욕장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교통편을 캡처하고 돌아오는 길을 자세하게 메모해 갤러리에 저장했다.

또 하나, 평소에는 활성화시키지 않던 위치서비스를 켜고 SOS 서비스를 설정했다.


SOS 서비스는 볼륨키 3~4번을 연속으로 누르면 미리 입력해둔 번호로 위치가 포함된 메시지가 전송된다. 또한, 전화도 자동으로 가는데 나는 부모님으로 설정해뒀다. 이 서비스의 가장 좋은 점은 주변 소음이 5초간 자동으로 녹음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 아쉬운 점은 잘 열어보지 않는 문자로 메시지가 간다는 것이고(그것도 영어로)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경찰서로 전화를 가게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수로 이 서비스를 활성화시킬 경우... 으, 생각하기도 싫다. 얼마나 민폐인가.


마지막으로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혹시나 납치라도 당하게 된다면, 잠긴 휴대폰을 풀기 위해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바로 날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난 좌절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대체 어딜 가서 누굴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비밀인데...

가방에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와 회사 이름도 적어 넣어놨었다. 진짜 혹시... 혹~시...


약속시간보다 20분이나 먼저 도착했다. 근방을 둘러보며 버스정류장의 위치나 이곳에 정차하는 버스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여의치 않을 경우 본가로 가는 버스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내가 자취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꽤 핫한 곳인지 들고나는 사람이 많았다. 단순히 조개구이집이 아닌 조개구이촌이었다. 포차처럼 천막이 일자로 쳐져있었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장님들이 밖에서 손을 흔들어댔다. 넓디넓은 주차장 옆에는 휘황찬란한 낚싯대를 자랑하며 물고기가 잡히길 기다리는 낚시꾼도 굉장히 많았다. 주변을 구경하며 산책 아닌 산책을 하고 있을 때 SNS 메시지가 왔다.


[필중: 어디예요? 저는 주차장이에요. 오는 길 힘들죠? 버스정류장에 마중 나가 있을까요?]

[나: 아.. 저 사실 도착해있어요. 좀 일찍 나섰더니 일찍 도착했어요.]

[필중: 아 그래요? 그럼 **해녀촌 앞에서 봐요. 거기가 서비스도 좋고 맛있어요.]


지금부터 두 번째 시험의 시작이다.


회색의 약간 두꺼운 재킷을 입고 손을 흔들며 그가 다가왔다. 구름에 달이 가려져 달빛을 머금은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천막에 주렁주렁 매달린 알전구 덕분에 크고 선한 그의 눈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도 약간 굽 있는 운동화를 신었지만 그가 내 앞에 다가와 섰을 때는 내가 그를 살짝 올려다봐야 했다. 어디 가서 키로 빠지지 않던 나였는데, 그의 신발 속이 궁금했다.


그만 그곳의 단골이 아닌가 보다. 가게 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우리는 결국 가게 앞에 줄을 서야 했다.

그래도 우리 앞에 한 팀만 있어 곧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토요일 저녁이라 손님이 많네요. 조금 더 빨리 올 걸 그랬어요. 아민 씨 다리 안 아파요?"

"네. 버스도 앉아와서 괜찮아요."

"여기 기대해도 돼요. 치즈도 많이 주고 조개 말고도 밑반찬도 많아요. 제가 사실 해산물을 못 먹는데 아민 씨는 좋아한다고 해서 여기는 꼭 데리고 오고 싶었어요."

"아... 그럼 필중 씨는 어떡해요?"

"구운 해산물은 조금 먹어요. 밑반찬도 많아서 친구들하고 오면 배는 채우고 가요. 걱정하지 마요."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자리 순환이 빠르지 않았다. 금방 자리 난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던 사장님은 쉴 새 없이 조개를 까고 술을 나르느라 우리를 까먹은 것 같았다. 우리는 20분 동안 밖에서 대기했다. 덕분에 그와 이야기는 많이 할 수 있었지만 서서히 다리가 아파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무릎이 좋지 않은데 크기가 제각각인 자갈돌 위에 뻣뻣하게 서있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원래 했던 대로 자리를 쭉 펴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아민 씨 괜찮아요? 괜히 여기서 먹자고 했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음, 서있기 불편해 보이는데..."


나는 슬쩍 그를 올려다보고는 계획 실행의 타이밍을 기다렸다.


상황에 적용해 이상한 시험을 하는 나에게 욕을 하던 사람도 있었다. 먼저 꼬리 쳐놓고 왜 진도 나가려고 하면 순진한 척하냐고... 정확히 말하면 난 순진하지 않다. 알 거 다 알고 단계별 진도도 안다. 아니까 시험해 보고 싶은 거다. 단계 사이사이마다 나를 얼마나 존중해 주는지.


나의 두 번째 시험은 그의 손버릇이었다.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친근한 스킨십을 좋아한다. 서로의 손끝을 간지럽히고, 꽉 맞잡는 게 아닌 약간의 공간을 두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비비적거리는, 팔짱을 낄 듯 말 듯 팔뚝을 살며시 잡고,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노골적인 스킨십보단 간지러운 스킨십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스킨십 스타일을 미리 아는 것도 나에겐 중요했다.


나는 다리가 아프다며 그의 손목 안쪽을 슬며시 잡고 무릎 뒤쪽을 주물렀다. 12월의 쌀쌀한 날씨라 살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은 손과 손목밖에 었었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서 손을 빼 편히 잡고 있을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많이 아파요? 저쪽에 좀 앉아있을래요? 우리 차례 되면 부를게요."

"아니에요. 이렇게 좀 주무르고 나면 괜찮아져요."


그는 걱정스러운 듯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괜찮다는 걸 보여주었고 그의 손목을 잡은 손은 그대로 두었다. 그는 팔을 니은(ㄴ) 자로 만들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얼어버린 것도 같았다.


"조금씩 배가 고프네요. 우리 언제쯤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 어, 어... 가, 가서 물어볼까요?"


그는 고장 난 로봇 같았다. 방금까지 능숙하게 리드했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딱딱하게 굳어 동공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아래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손목과 손바닥 그 사이. 두툼한 두께감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 관절이 삐그덕거렸고 그의 손바닥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저, 휴지... 드릴까요?"

"네? 아, 아..."


그는 손을 내려 허벅지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자연스럽게 내 손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제, 제가 손에 땀이 많은데 오늘따라 더 많이 나네요. 하하."

"아 원래 손에 땀이 많으시구나."


나는 그가 귀여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참느라 진땀을 뺐다. 땀을 다 닦은 그의 손이 재킷 주머니 근처에 어정쩡하게 있었다. 나는 밤하늘에 희미하게 떠있는 별을 보라며 다시 한번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그의 손이 과감하게 움직였다.


"잡고... 있어도 될까요? 손이 시려 보여서..."


그는 손목에 머물러있던 내 손을 당겨가 잡고는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의 손바닥이 또다시 축축해지는 걸 느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던 것 같다.

사장님이 우리를 부를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온 신경이 그의 주머니 속 살짝 맞잡은 손에 집중됐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낀 남자의 체온에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어휴, 오래 기다렸지? 자리 났어. 들어와, 들어와. 오래 기다린 만큼 서비스 팍팍 드릴게, 잉?"


다리 아파 죽겠으니 서비스 팍팍 안 주면 다음에는 안 올 거라며 넉살 좋게 굴더니 나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과 꽤 친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 답답해졌다. 등지고 앉은 사람들끼리도 닿을 듯 말듯해 자세를 바꾸기에도 쉽지 않아 보였고 테이블마다 겨우 껴있는 보조의자에도 은색의 커다란 쟁반이 올려져 있어 지나다니기 아슬아슬해 보였다.


사장님이 안내한 테이블로 가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기 쉽게 천막에 등을 대고 앉았다.


"지난번에는 이렇게까지 테이블이 많지 않았는데... 좀 불편하죠?"

"뭐,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맛만 있으면 되죠!"


그는 집게손가락을 번쩍 들고 눈썹을 꿈틀거리는 날 보더니 피식 웃었다.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나의 애교였다. 하지만 곧 내 표정은 어두워졌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 대각선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부가 있었고, 그 옆에는 8살도 안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그 부부를 쳐다보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꽤 많은 빈 소주병이 있었다. 잠시 후 그 부부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고 그에 따라 내 불안도 점점 높아겼다.


"저기 참 시끄럽네요. 여기까지 왔으면 기분 좋게 먹고 가지... 아이도 있는데 참... 아민 씨?"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내 눈과 귀는 그 테이블로 향했고 그들의 행동이 격해질 때마다 내 심장은 더 세게 더 빨리 뛰었다. 내 모습이 그에게 어떻게 보일지 중요하지 않았다. 난 무서워졌고 큰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이윽고 그 테이블에서 사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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