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lowcarver Oct 23. 2019

느리게, 더 느리게

우드 카빙 - 깎는 행위

때때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무엇이 이리 많이도 변했나 싶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삶이 이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갈수록 사람도, 사회도, 기술도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바로 옆 사람이든, 지구 반대편의 사람이든 언제든 화상으로 얼굴을 보고 얘기할 수 있고, 메일로 실시간 연락을 할 수 있다.

 

나는 6명의 팀원과 함께 일하지만, 각자 맡은 업무가 다르다 보니,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어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지구 반대편에서 온 메일을 읽고 회신하고, 필요한 전화를 받고, 대응한다. 모두들 시선과 손가락이 바쁘다. 나와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베트남에 있는 현지 직원이다. 우리는 카카오톡으로 업무 대화를 하고, 약간의 여유가 있을 땐 안부를 주고받는다. 출근할 때, 점심시간, 퇴근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용한 분위기에서 각자 자기만의 업무에 빠져 있다. 긴 시간- 가장 가까운 공간에 머무는 사람 사이라도 정서적으로 가깝지는 않다.   


우리의 하루는 각자의 화면에서 시작해서 각자의 화면으로 끝난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깨고, 폰을 보면서 출근하고, 출근 후에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일을 하고, (심지어 요새는 듀얼 모니터가 일상 다반사) 다시 폰을 보면서 퇴근한다. 집에서는 폰이나, 또는 TV를 보다가 잠이 든다. 일을 할 때도 쉴 때도 몸의 활동은 점점 줄어드는데, 화면과 함께하는 머릿속은 항상 바삐 움직인다. 내 몸은 현실 속에 있지만, 쉴 새 없이 빛을 내는 화면들 속에 갇혀있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게 점점 더 숨이 가빠질 때, 나무를 깎는다.

나무를 깎을 때. 시간은 더디 흐른다. 느릿느릿. 가는지 아니 가는지 모르게. 한 칼, 한 칼 카빙 나이프로 나무를 깎아내다 보면 조금씩 형태가 나오고, 모양이 갖추어진다. 움직이는 동작만큼, 딱 그만큼. 한 번에 욕심껏 많이 깎을 수도 없다. 나무가 허용하는 만큼, 칼이 허용하는 딱 그만큼이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은 눈이 편안하다. 뭔가를 바삐 찾아 검색하지 않아도, 또 정신없이 스토리를 양산해내는 화면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 시간. 자연을 품은 나무의 색감에 시선을 두고, 손으로 나무의 촉감을 느끼며 매끄럽게 다듬고, 또 다듬는다. 늘 톡 탁이는 플라스틱 자판에 비해 나무는 약간의 온기가 있다. 눈도 손도 휴식하는 시간이다. 한편 생각도 화면에서 놓여난다. 마음도 생각도 탁 놓아버린 채, 무념무상 공백 상태로. 시끄럽던 여러 가지 잡념, 잔상들이 잔잔히 침잠한다.


직장 생활을 10년 가까이했던 동료와 진짜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작업실에 초대하면서부터이다. 일에 지쳐 퇴사하는 이를 보내기가 아쉬워 작업실에 놀러 오라 하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주말을 함께 보내며 나무를 깎았다.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다가 또 조용히 나무를 깎다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느릿느릿 깎고 드문 드문 대화를 하는 새에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저 느리게. 아주 느리게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이는 공장에서 1분이면 뚝딱 찍어낼 수 있는 숟가락 하나를, 몇 시간 동안 나무로 깎아내는 일이 얼마나 비효율이냐고도 하지만. 그 비효율이 일상에 여유를 주고 숨을 틔인다. 세상이 너무나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나 하나쯤은, 나무를 깎는 시간 정도는 그런 것과 무관하게 천천히 흘러도 좋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숟가락 볼에 대한 고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