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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조각
머리카락을 밀고 싶다.
거추장스럽다.
다듬어야 하는 시기마다 반복되는 고민.
밀고 싶다.
하지만 직장인에게 그건 너무 도전적이지.
그렇다면 어디까지 잘라낼까,
아니 그냥 아예 밀어낼까.
하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띈다.
아무래도 사회에서는
가능한 가늘고 길게,
눈에 띄지 않게,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게.
그런데 그런 것도 삶에 부피가 있나?
이렇게 사는 건 마치
바람이 다 빠져 찌글찌글해진 풍선 같은데.
이력서의 몇 줄을 늘리기 위해
100세 시대에 입에 풀칠하며 살기 위해
단돈 천원이라도 필요할 때 쓰기 위해
내 ‘물건’, ‘건강’, ‘공간’을 지키고 만들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 겪어야만 하는
먹물 같은 시간 또는
모든 게 뒤섞인 새까만 일상.
자꾸만 뒤로 나자빠지는 생각.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해가 길어졌어도
온도 따라 마음은 여전히 겨울.
차고 시리고 매섭다.
반항적인 나는 《오즈의 마법사》 속 등장인물.
겁이 많은 사자, 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
세상의 풍파에 휩쓸린 강아지 토토,
집에 돌아가고 싶은 도로시,
어느 날 느닷없이 죽임을 당하는 서쪽 마녀,
서쪽 마녀를 없애고 싶은 오즈의 마법사.
모든 이야기를 종결짓는 은색 구두는,
주말에 쉬는 나로서는 평일 퇴근 시간이자
영원한 안식인 죽음.
하지만, 오늘은 은색 구두가 없다.
퇴근은 늦었고 죽음으로부터도 살아남았다.
언젠가는 은색 구두를 신고 부딪혀야 하겠지.
그러니 언젠가는 머리카락을 깎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나의 의지로.
by 개복사